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20화: 감시망의 틈
시계탑의 추가 한 번 더 흔들렸다.
배수 통로 안쪽의 공기가 얇게 떨렸다. 서준은 벽에 그어진 붉은 빗금 세 개를 바라봤다. 하수인은 세 번째 종 전까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빚을 갚을 마지막 기한인지 서준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지금 통로를 나가 하수인에게 동전을 내밀면 그는 돈을 받은 뒤에도 장부를 놓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다른 이름의 빚을 들이밀고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르네가 손가락 두 개를 펴고 시계탑 쪽을 가리켰다. 이어 배수 통로 바깥을 가리킨 뒤 손바닥을 교차시켰다. 순찰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 같았다.
그녀는 바닥의 오물 자루를 가리키고 손가락 세 개를 접었다. 물통 수레와 붉은 찌꺼기 수레가 만나는 때를 세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길드 경비병들이 샛길 끝을 지나갔다. 두 사람의 검은 장화가 서로 엇갈린 뒤 사라졌다.
르네는 빈 틈을 가리켰다. 곧바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사각은 도망칠 길이 아니었다. 잘못 움직이면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은 채 하수인과 마주치는 자리였다.
서준은 손안의 동전 두 닢을 꺼냈다. 르네가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동전을 빼앗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대신 동전과 통로 밖을 번갈아 가리켰다.
돈을 주고 끝내자는 뜻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걸 주면 끝나는 게 아니야."
르네는 알아듣지 못했다. 서준은 마르코의 손도장이 찍힌 종이를 흉내 내고 손가락을 하나씩 늘렸다. 같은 종이가 계속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다음 손바닥을 펴서 목덜미를 가리켰다.
르네의 시선이 푸른 표식에 닿았다.
서준은 세리아에게 받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손바닥 그림 아래의 검은 선과 상자 모양을 돌려 보였다. 이어 옷 안쪽에 숨긴 기호 조각을 꺼내 둥근 모양을 맞췄다.
르네는 기호 조각을 보자마자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통로 밖을 살피고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이 물건을 드러내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조각을 다시 숨기지 않았다.
하수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비병이었다. 폭행을 하면 붙잡히지만 계약서와 장부를 들고 오면 경비병은 채무 문제로 분류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수인이 경비병 앞에서 계약서를 손에 대려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했다.
서준은 동전 두 닢을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통로 밖 돌바닥을 가리킨 뒤 저울을 재는 시늉을 했다. 돈을 길드 앞에서 확인받겠다는 뜻이었다.
르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뒤 그녀는 서준의 손등을 한 번 쳤다. 하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막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물통 수레가 지나간 뒤 생긴 틈으로 나왔다. 르네는 먼저 벽에 붙어 경비병의 발소리를 확인했다. 서준은 그녀가 가리키는 돌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샛길 끝에는 길드 등록소의 작은 접수창이 보였다. 창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낡은 저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채무 고발을 접수하는 곳인지 물건을 거래하는 곳인지 서준은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길드 문양이 찍힌 판과 여러 사람의 손이 오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갈색 덧옷이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수인은 오물 자국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는 서준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올렸다. 손에는 여전히 두꺼운 장부가 들려 있었다.
하수인은 장부를 펼쳐 서준에게 보였다. 붉은 줄이 가득한 페이지였다. 그는 서준의 목을 가리키고 동전을 가리켰다. 이어 길드 접수창을 향해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고발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도망치지 않았다. 동전 두 닢을 꺼내 하수인 앞에 내밀었다. 하수인의 눈이 잠깐 빛났다.
서준은 동전을 바로 건네지 않고 접수창의 저울 위에 올렸다.
하수인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손을 휘저으며 돈을 자기 쪽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서준은 저울과 하수인의 장부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장부를 펼친 뒤 빈손을 보였다.
증명하라는 뜻이었다.
하수인은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장부의 특정 줄을 손톱으로 긁었다. 탈출 위약금과 등록 대가를 말하는 듯했다. 서준은 토반이 고정편을 받아 가던 장면을 떠올렸다. 토반은 저울을 사용했고 기호가 있는 부분은 가져가지 않았다. 거래가 있었다면 물건과 값이 함께 남아야 했다.
서준은 기호 조각을 저울 옆에 놓았다. 둥근 홈이 드러난 쪽을 위로 향하게 했다.
하수인의 손이 멎었다.
기호는 그의 단추와 같은 모양이었다. 서준은 단추를 가리킨 뒤 조각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하수인의 장부도 함께 가리켰다.
하수인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길드 접수창 안의 담당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저울 위의 동전과 조각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는 흉내를 냈다. 서준은 그가 거래 내용을 기록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수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준은 저울에서 동전을 집어 들었다. 하수인의 눈이 동전을 따라 움직였다. 서준은 돈을 자기 손에 쥔 채 접수창을 가리켰다. 하수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멀리서 첫 번째 종이 울렸다.
낮고 긴 소리가 건물 벽을 타고 퍼졌다.
하수인은 품에서 붉은 종이를 꺼냈다. 그는 이번에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았다. 길드 경비병 하나가 접수창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지만 아직 거리가 있었다.
하수인은 붉은 종이를 서준의 손목 가까이 내밀었다. 서준이 손을 빼면 도망친 것으로 몰고 그가 참으면 종이에 접촉시킬 생각이었다.
서준의 손가락이 떨렸다.
르네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배수 통로 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하수인이 도망칠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서준은 그 이유를 바로 알지 못했다.
하수인이 붉은 종이를 더 밀어붙였다. 종이 끝에 묻은 인주가 서준의 손목 표식 근처에서 끈적하게 빛났다.
서준은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하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준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보며 동전 두 닢을 저울 위에 다시 올렸다. 그런 다음 접수창을 향해 큰 동작으로 손가락을 세 번 폈다. 세 번째 종까지 공식 확인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하수인은 욕설처럼 짧은 소리를 뱉었다.
그는 붉은 종이를 서준의 손바닥에 갖다 대려 했다.
서준은 마지막 순간 손목을 뒤로 꺾었다. 종이가 손바닥을 스치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하수인은 균형을 잃고 서준의 팔을 잡았다.
"잡았다!"
누군가 소리쳤다.
길드 경비병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창끝이 하수인의 손목을 향했다. 하수인은 서준을 잡은 손을 놓았지만 붉은 종이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경비병은 하수인의 손과 붉은 종이를 번갈아 봤다. 이어 서준의 손바닥을 확인했다. 인주가 닿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접수 담당자에게 손짓했다.
접수 담당자가 달려 나왔다.
하수인은 장부를 펼쳐 경비병 앞에 내밀었다. 그는 빠르게 손짓하며 서준이 빚을 갚지 않고 거래 물건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경비병은 장부를 받아 들고 첫 줄을 읽었다. 다음에는 동전 두 닢과 저울을 보았다.
서준은 기호 조각을 가리켰다. 그리고 토반이 저울을 사용하던 모습을 손으로 흉내 냈다. 물건을 팔았고 값은 저울 앞에서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접수 담당자는 조각을 집으려다 멈췄다. 그는 천을 꺼내 조각을 감싼 뒤 둥근 기호를 살폈다. 하수인이 손을 뻗자 경비병이 창대로 막았다.
하수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준은 이제야 르네의 의도를 이해했다. 르네는 도망칠 틈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수인이 물건을 빼앗으려면 경비병 앞에서 먼저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자리를 비워 둔 것이었다.
접수 담당자가 장부의 아래쪽을 펼쳤다. 그곳에는 고정편의 인계 표시가 없었다. 금액만 붉은 글씨로 덧붙어 있었다. 담당자는 하수인에게 영수증을 요구하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수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장부를 빼앗으려 했다. 이번에는 경비병 둘이 동시에 움직였다. 한 명이 팔을 비틀고 다른 한 명이 붉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붉은 종이가 접수 담당자의 장갑에 닿자 얇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담당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종이를 금속 상자 안에 던져 넣고 뚜껑을 닫았다. 상자 표면에 푸른 선이 번졌다.
하수인은 더 이상 서준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길드 안쪽 문과 장부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두 번째 종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세리아."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세리아가 회색 머리끈을 고쳐 묶으며 접수소 안쪽에서 나왔다. 그녀는 서준을 보자마자 기호 조각과 장부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리고 하수인의 단추를 가리킨 뒤 자기 품에서 작은 장부를 꺼냈다.
세리아는 하수인의 장부에 있는 문양과 자기 장부의 붉은 줄을 맞춰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서준에게 손가락 하나를 보였다. 이어 입을 가리키고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대신 본 것을 정확히 말하라는 요구였다.
서준은 잠시 가족사진이 든 안주머니를 눌렀다. 길드 기록에 이름을 남기면 다시 숨을 곳이 줄어든다. 하지만 하수인이 공식 기록을 만들기 전에 자신이 본 것을 남겨야 했다.
서준은 마르코의 이름을 손으로 썼다. 글씨는 삐뚤고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세리아는 알아보았다. 그는 손도장을 찍는 흉내를 내고 붉은 종이를 가리켰다. 다음에는 하수인의 장부에서 고정편 그림과 금액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기호 조각과 단추를 번갈아 가리키자 세리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수인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경비병의 손에서 빠져나오려는 움직임이었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분노를 터뜨리거나 붙잡으려는 대신 저울 위의 동전 두 닢을 손으로 덮었다.
그 돈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일이었다.
세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종이 울렸다.
접수 담당자는 서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돈을 요구하는 손짓이 아니었다. 사건 기록에 올릴 표식을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준의 목에 걸린 임시 패를 본 뒤 그는 안쪽 문을 가리켰다.
하수인이 끌려가는 방향과 같은 곳이었다.
서준은 르네를 돌아봤다.
르네는 안쪽 문을 가리킨 뒤 검지를 세웠다. 한 번 들어가면 자기 말대로 움직이라는 경고였다. 그녀는 동전을 보지 않았다. 기호 조각만 보고 있었다.
서준은 동전 두 닢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세리아가 가리킨 문 안으로 걸어갔다.
안쪽 벽에는 수십 개의 장부가 꽂혀 있었다. 접수 담당자가 하수인의 장부를 펼치자 맨 아래 모서리에서 작은 번호 하나가 드러났다. 번호 옆에는 물건이 길드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인계되었다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세리아가 그 번호를 보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마르코의 이름을 찾지 않았다.
대신 더 위쪽 서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상단 보관소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세리아가 번호를 한 번 두드렸다.
원본 계약은 하수인의 손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장부가 가리키는 곳은 길드 안쪽보다 훨씬 높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