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을 깨부수고 돌아왔다

8화: 시티 7의 어둠
쏴아아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는 맑지 않았다.
잿빛 매연과 화학 물질이 뒤섞인 산성비는 뺨을 따갑게 때렸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공기는 축축하고 비릿했다. 썩은 기름 냄새와 탄 전선 냄새가 목구멍을 긁었다.
강태현은 녹슨 철제 배수관 난간을 짚었다.
10년 만에 마신 현실의 공기는 가상세계 아카샤와 완전히 달랐다. 탑 100층의 황금빛 구름도, 신전의 맑은 마력도 없었다. 피부를 갉아먹는 유황 냄새와 뼈마디를 파고드는 차가운 냉기뿐이었다.
“멍하니 서 있지 마!”
등 뒤에서 서연우가 다급하게 태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다친 발목을 절뚝거리며 좁은 골목의 함석 차양 아래로 몸을 숨겼다.
쿠우우웅―.
그 순간 먹구름 낀 밤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유토피아 콥의 대형 전술 수송정이었다. 반중력 터빈의 묵직한 진동이 지면을 울렸다. 수송정 하부의 탐조등이 백색 광선을 쏟아냈다.
번쩍!
하얗게 번뜩이는 서치라이트가 방금 빠져나온 배수 환기 해치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빗줄기 너머로 무장 감시 드론 서너 대가 추가로 사출되었다.
“제7저장소 비상경보가 도시 관제망 전체로 번졌어.”
서연우가 벽에 등을 붙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사이버네틱 글래스에 붉은 로그가 흘러내렸다.
[시티 7 북부 외곽: 1급 봉쇄 발령]
[특수안전부 관할 수색 자산 전개 중]
“호넷 편대가 전멸한 걸 본부가 확인했어. 곧 기동 타격대가 골목 전체를 포위할 거야. 얼쩡거리다간 뼈도 못 추려.”
“이곳이 시티 7인가.”
태현이 낮게 읊조렸다.
골목 밖으로 폐허의 풍경이 펼쳐졌다. 녹슨 철골과 깨진 콘크리트로 세워진 판자촌이었다.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낡은 홀로그램 간판들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고통 없는 안식처, 아카샤로 오십시오.]
[유토피아 콥 생체 접속 캡슐: 보급형 40% 특별 할인]
저 멀리 구름 위로 솟은 유토피아 콥의 초고층 첨탑 빌딩들은 눈부신 은색 빛을 뿜었다. 하지만 그 빌딩들이 딛고 선 지상은 거대한 쓰레기장이었다.
“그래. 우리가 사는 진짜 세상이지.”
서연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카샤에 있던 10년 동안 바깥이 천국이 됐을 줄 알았어? 현실은 진작 망했어. 기업 놈들이 산소와 전기와 영양분을 전부 사유화했으니까.”
그녀는 소형 주파수 방해기를 바닥에 꽂아 두 사람의 생체 열 신호를 가렸다.
“따라와. 내 아지트로 가려면 이 슬럼가를 뚫어야 해.”
서연우가 진흙탕을 밟으며 앞장섰다.
태현은 뒤를 따랐다. 앰플 덕에 다리에 힘은 들어갔지만 굳었던 근육이 냉기에 굳어지며 묵직한 통증을 뿜었다. 태현은 바닥에 묻힌 전력선의 파동을 읽으며 걸음을 옮겼다.
슬럼가 안쪽은 더욱 참혹했다.
녹슨 컨테이너와 천막 틈새마다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뼈만 앙상한 사람들의 뒤통수에는 조잡한 신경 케이블이 박혀 있었다. 케이블 끝은 컨테이너 벽면의 소형 배전함으로 이어졌다.
치이익, 치익.
배전함 계량기 숫자가 붉은빛을 내며 줄어들었다.
[잔여 크레딧: 14]
[바이오 에테르 추출 효율: 62%]
오물 바닥에 누운 채 그들은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상세계의 환각 속에서 뇌수를 갉아먹히는 줄도 모르고 침을 흘렸다.
“저게 뭐지?”
태현의 물음에 서연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유토피아 콥의 공짜 밥을 먹는 대가지. 저 배전함이 저가형 뇌파 추출기야. 탄수화물 죽을 받는 대신 뇌파와 신경 에너지를 상납하는 거지. 저 바이오 에테르가 상층 도시 빌딩을 밝혀.”
“스스로 원해서 꽂은 건가?”
“현실에 남으면 굶어 죽으니까. 밖에서는 숨 쉬는 공기조차 정화세를 내야 해. 하지만 잭을 꽂으면 배고픔도 추위도 잊거든. 가짜 궁전에서 왕 노릇을 하다 죽는 거지.”
서연우가 주먹을 쥐었다.
“크레딧이 0이 되면 전원이 끊겨. 그럼 네가 있던 저장소 같은 폐기장으로 실려 가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이고 소각되는 거야.”
태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탑 1층부터 99층까지 스쳐 간 무수한 도전자들이 떠올랐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그들은 단순한 낙오자가 아니었다.
이 썩어 빠진 밑바닥에서 말라붙어 가던 현실의 인간들이었다. 기업의 사육장에서 뇌수를 바치던 제물들이었다. 100층 신전의 주춧돌은 이 가축들의 피와 뇌파였다.
‘윤장호.’
유토피아 콥 회장의 이름이 차갑게 박혔다.
인간의 영혼을 쥐어짜 영생을 노리는 자.
가슴 깊은 곳에서 서늘한 살의가 솟구쳤다. 10년간 자신을 속인 거대한 거짓의 우리를 뿌리째 부숴버리겠다는 결의였다.
골목 끝에 이르자 서연우가 태현의 앞을 막아서며 몸을 낮췄다.
“쉿! 멈춰.”
골목 너머 사거리가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다.
치지직!
붉은 경광등 아래 검은 강화 외골격을 입은 보병들이 서 있었다. 유토피아 콥 산하 하청 용병단 ‘철견대’였다. 그들 곁에는 두 대의 자주식 중화기 터렛이 거리를 겨누고 있었다.
“가두 검문소야.”
서연우가 이를 갈며 속삭였다.
“생체 양자 스캐너야. 폐기 자산인 너나 수배자인 내가 다가가는 순간 경보가 울려. 터렛 유탄에 흔적도 없이 찢길 거야.”
“다른 길은 없나?”
“우회로는 기업 차단벽이 내려앉았어. 여길 뚫지 못하면 우린 고립돼.”
서연우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연막탄은 안 통해. 다중 열화상 렌즈가 달려 있거든.”
그녀의 말을 들은 태현은 벽면을 보았다.
방수 피복이 벗겨진 지상 변전함이 보였다. 그곳에서 바리케이드 터렛과 통신 릴레이로 케이블이 이어져 있었다.
태현이 천천히 걸어갔다.
“야! 어디 가?”
서연우가 경악해 손을 뻗었지만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서서 젖은 고압 단자함에 오른손을 얹었다.
지잉―.
전류의 맥동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현실의 기계라도 전기가 흐르고 데이터가 오가는 한 신위의 지배를 받는 노드였다.
‘물리적 파괴는 필요 없다.’
소음이 커지면 추격군이 몰린다. 필요한 것은 은밀한 침투였다.
팟!
태현의 눈동자에서 푸른 룬 문자가 회전했다.
[로컬 분전망 접속]
[철견대 통제 시스템 역추적]
태현의 신위 데이터가 구리선을 타고 제어 콘솔로 파고들었다. 아카샤의 관리자 라이브러리에서 튜토리얼 탑 관리용 루트 키를 꺼내 주입했다.
[최고 감사관 점검 코드 주입]
[터렛 피아 식별 반전]
[통신 중계기 과부하 발생]
치지지직!
터렛 두 대의 총구가 덜컥거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뭐야! 터렛 제어가 안 먹힙니다!”
“스캐너도 먹통이야! 상위 감사 시스템 접속 감지? 4번 창고에 1급 오류가 떴다고?”
“통신망이 왜 이래!”
용병들이 우왕좌왕하며 사거리 남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터렛 총구가 연기를 뿜었고 바리케이드 경광등이 팍 꺼졌다.
국소 과전압으로 일대 조명이 나가며 짙은 어둠이 깔렸다.
“말도 안 돼…….”
서연우가 턱을 벌렸다.
총 한 발 쏘지 않고 기업 군용 통제망을 속여 길을 연 것이다.
태현이 돌아보며 말했다.
“30초 뒤면 알아챈다. 뛰어라.”
“응!”
두 사람은 바리케이드를 넘어 버려진 지하철 환승구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지하로 내려가자 빗소리가 멎었다.
침수된 폐선로와 녹슨 배관을 지나 10여 분을 걷자 콘크리트 방폭벽이 나타났다. 플러그아웃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서연우가 숨겨진 키패드에 암호를 눌렀다.
철커덕, 쿠우웅―.
육중한 문이 열리고 건조한 공기가 밀려왔다. 모니터들과 냉각 팬, 의료 키트가 갖춰진 비밀 벙커였다.
“살았다…….”
서연우는 문을 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개인 안전 가옥이야. 독립 발전기라 위성 감시도 못 훑어.”
그녀가 마른 수건과 군용 재킷을 던졌다.
“물기 닦아. 그러다 폐렴 걸려.”
태현이 얼굴을 닦고 재킷을 걸치는 순간이었다.
치익―.
벽면의 도청 모니터가 켜지며 흑백 화면이 떴다. 유토피아 콥 특수안전부 긴급 방송이었다.
[시티 7 전역에 알린다.]
화면에 차가운 남자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턱선과 반쯤 티타늄으로 치환된 얼굴. 은색 의안을 번뜩이는 사내였다.
특수안전부 팀장, 김도진.
[02시를 기해 탈주한 1급 폐기 자산 ‘오류 개체 119번’ 및 조력자에 대한 즉결 처분령을 발효한다.]
태현의 인적 사항이 붉은 수배 전단으로 떠올랐다.
[시티 7 전 구역은 계엄 상태다. 은닉하거나 조력하는 자는 즉시 뇌사 처리 및 자산 몰수형에 처한다. 타격 부대가 10분 내로 전 구역 진입을 시작한다.]
방송이 끊기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연우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김도진…… 미친 사냥개가 직접 떴어. 뇌 절반을 기계로 바꾼 괴물이야. 도시를 통째로 뒤집어엎겠다는 뜻이야.”
하지만 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쿵.
태현의 무릎이 바닥으로 꺾였다.
“큭……!”
거친 숨을 토하며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고 목덜미 혈관이 검게 부풀었다. 심장 부근에서 타는 작열감이 번졌다.
서연우가 기겁하며 다가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앰플의 약효가 끝났다.”
태현이 이를 악물었다. 임시 처방이 끝나자 10년간 말라 있던 신경계에 권능을 연속으로 쏟아부은 대가가 닥쳐왔다.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세포들이 비명을 질렀고 근육 조직이 뒤틀렸다. 몇 시간 안에 심장이 멎을 터였다.
서연우가 다급히 안쪽 비밀 금고로 달렸다.
“기다려! 기업 수송차량에서 털어온 미등록 고농축 바이오 치료 칩이 있어! 그걸 신경계에 박고 배양액을 부어야 해!”
금고 다이얼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태현은 바닥을 짚은 채 꺼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김도진의 은색 눈동자와 도시를 짓누르는 거대한 기업의 그림자.
‘무너지지 않는다.’
태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가상세계의 정점에 섰던 유일신이었다. 시궁창 바닥에서 육체의 한계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몸을 고쳐야 한다.
완벽한 육신을 되찾아 저 사냥개와 기업의 심장을 뜯어내야 했다.
태현의 감겨가는 푸른 눈동자 속에서 서늘한 살의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