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층을 깨부수고 돌아왔다

9화: 첫 번째 회복
철컥.
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태현은 차가운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손바닥에 힘을 줬지만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 번 빠르게 뛰고 한 번 쉬었다.
빈 박동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귓속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눈앞의 방폭문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가 움켜쥔 것은 바닥의 먼지가 아니라 자기 몸을 붙들 마지막 감각이었다.
“눈 감지 마.”
서연우가 금속 상자를 끌어와 그의 곁에 내려놓았다. 절뚝이는 발목 때문에 앉는 동작마저 거칠었다. 상자 안에는 엄지손톱만 한 은색 칩과 배양액 두 팩, 일회용 접속 침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태현의 목에 손가락을 댔다.
“맥이 건너뛰어. 이대로면 심장이 먼저 멎어.”
연우는 손목 단말기에 맥박을 옮겨 띄웠다. 톱니처럼 솟던 선이 중간중간 끊겼다. 그녀는 배양액 팩을 집었다가 칩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끝이 급해질수록 절차는 더 위험해졌다.
“투여해.”
“기업 의료 수송차에서 빼돌린 거야. 아직 등록되지 않았지만 처음 켜질 때 장비 인증을 요구해. 이 집 위치를 알릴 수도 있어.”
태현은 상자의 뚜껑 안쪽에 인쇄된 배선도를 보았다. 접속 침과 칩을 잇는 가는 선 옆에 별도의 송신 접점이 붙어 있었다. 등록 전이라도 제조사 진단망을 찾는 회로였다.
“송신 접점만 끊어. 침대 진단판으로 가는 선은 남겨.”
“그럼 자동 진단도 못 해. 손상된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끝이라고.”
“전력선만 닿으면 진단은 내가 한다.”
연우가 그를 내려다봤다. 태현의 입술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가느다란 송신 접점을 니퍼로 잘랐다. 잘린 금속 끝을 절연 테이프로 감싼 뒤 손목 단말기의 수신 화면을 열었다.
딱.
송신 대역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연우가 칩의 유선 접점을 진단판에 대자 녹색 불이 들어왔다. 방 안에서만 작동하는 회로는 살아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도청 모니터에서 잡음이 흘렀다.
[북부 외곽 수색 반경 축소]
[미등록 생체 신호 신고 시 배급 크레딧 지급]
“놈들이 동네 사람까지 동원하네.”
연우는 방폭문 쪽을 힐끗 본 뒤 배양액을 휴대용 온열판에 올렸다. 작은 발전기가 낮게 울었다.
태현은 금속 침대의 다리를 잡았다. 침대 옆 배전선에서 흐르는 전류가 손끝에 희미하게 걸렸다. 지금 신위를 크게 열면 스스로를 태워 버린다. 딱 한 번, 필요한 명령만 바꿔야 했다.
“다친 발로 오래 서 있지 마.”
“내 발은 네 심장만큼 급하지 않아.”
연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침대로 끌어올렸다. 태현은 더 이상 혼자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손에 몸을 맡겼다.
연우가 그의 목덜미를 소독했다. 신경 접속선이 빠져나간 자리 옆으로 접속 침이 들어갔다.
차가운 금속이 살을 가르는 순간 태현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움직이지 마!”
“계속해.”
배양액이 가는 관을 따라 흘렀다. 연우는 칩을 침대의 유선 진단판에 꽂았다. 송신 접점은 잘렸지만 복구 프로그램은 살아 있었다.
[바이오 치료 칩: 로컬 가동]
[신경 전도율: 기준 미달]
[표준 재생 전류 출력]
파직!
태현의 손가락이 제멋대로 굽었다. 호흡을 담당하는 근육까지 경련했다. 모니터의 심박선이 솟구쳤다가 깊이 가라앉았다.
“전류가 너무 세!”
연우가 출력 다이얼을 돌렸다. 이미 시작된 표준 치료 순서는 멈추지 않았다. 칩이 퇴화한 신경을 정상인의 신경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상 차단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전원을 완전히 끊으면 경련은 멎겠지만 치료도 멈춘다. 심박선의 다음 봉우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단할게.”
“전류만 낮춰.”
태현은 침대 다리를 쥔 손에 힘을 모았다.
‘넓게 열지 마.’
전력선이 손바닥을 지나 유선 진단판까지 이어졌다. 그는 아카샤의 권한으로 칩의 복구 순서표를 읽었다. 얽힌 명령 중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심장 전도계가 끊긴다.
그는 전신으로 퍼지는 출력 명령을 먼저 잠갔다. 칩이 다시 전류를 밀어 올리려 하자 복구 허용치를 가장 낮은 칸에 고정했다. 손등에 파란 핏줄이 떠올랐으나 그 이상 권능을 넓히지 않았다.
[기본 프로필: 전신 동시 재생]
[출력 상한: 최소]
[수정 요청: 심장 전도계·호흡근 우선]
푸른 룬이 눈동자 안에서 돌았다. 코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네가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수치가 내려가.”
연우가 흔들리던 배양액 유량을 일정하게 맞췄다.
태현은 심장 박동 사이에 전류를 잘라 넣었다. 끊기던 맥이 세 번 이어졌다. 다음에는 호흡근으로 가는 신호를 골랐다. 숨을 들이쉬는 데만 쓰는 가느다란 길이었다.
연우가 배양액 관을 눌렀다 놓았다. 체액과 영양이 그 길을 따라갈 시간을 벌어 주는 손놀림이었다. 태현은 겨우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쿵. 쿵. 쿵.
심장이 일정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진단판에 뜬 두 줄이 나란히 안정권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태현은 손끝과 다리로 향하는 복구 순서를 열었다.
태현의 손이 침대 다리에서 미끄러졌다. 권능을 더 밀어 넣을 힘은 없었다.
“됐어?”
연우가 물었다.
“이제 시작이다.”
태현의 목소리는 쉰 숨에 가까웠다.
칩은 명령을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간 마른 근육에 쓸 재료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배양액이 실제 조직에 스며들고 신경이 다시 길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연우는 그가 또 배전선을 잡으려 하자 손등을 눌렀다.
“여기서부터는 기계가 할 일이야. 넌 가만히 있어.”
태현은 손을 거두었다. 탑 안에서는 부서진 몸도 의지 하나로 일으켰다. 이곳의 몸은 명령을 기다리는 데이터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살이었다.
벽 너머에서 둔탁한 진동이 지나갔다.
연우가 도청 모니터의 소리를 낮췄다. 폐선로 위 지상에 수색 차량이 멈춰 선 모양이었다. 쇠바퀴 소리 뒤로 확성기 음성이 흘렀다.
“전 구역 생체 검문. 문을 열어라.”
안전 가옥의 방폭벽이 목소리를 흐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발전기의 출력이 평소보다 높았다. 칩의 온열판과 진단판이 전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 오래 쓰면 전력 패턴을 잡힐 수 있어.”
연우가 전원계 바늘을 가리켰다.
“온열판을 꺼.”
“배양액이 식어.”
“체온으로 유지할 수 있다. 진단판만 남겨.”
연우는 배양액 팩을 수건으로 감싸 태현의 옆구리에 붙였다. 온열판 스위치가 내려가자 발전기 소리가 작아졌다.
발소리가 한동안 천장 위를 지났다. 방폭문 안쪽에서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철문을 찾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우가 다친 발을 끌고 모니터 앞으로 갔다. 수색 차량은 폐선로 입구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태현의 침대 곁으로 돌아와 관 속에 기포가 없는지 살폈다.
한참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수치를 보고 배양액 팩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태현도 침대의 전력선에서 손을 떼고 그 시간을 견뎠다. 잘려 나간 신경의 길을 찾는 것은 칩과 그의 몸이었다.
태현은 오른손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푸른 룬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검지를 천천히 굽혔다가 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신경에 강제 명령을 내린 결과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였다.
그는 한 번 더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손톱 아래에 닿은 담요의 거친 실까지 느껴졌다. 놀라울 만큼 사소한 감각에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 움직여 봐.”
연우가 왼손을 가리켰다. 태현은 왼쪽 손가락도 움직였다. 감각이 둔했으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심장 박동: 안정]
[호흡근 반응: 회복 중]
[근육 재생: 초기 단계]
연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살았네.”
“잠깐 연장된 거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쉬어.”
그녀가 젖은 재킷을 걷어 내고 담요를 덮었다. 태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당장 밖으로 나간다면 검문소 하나도 버티기 어려웠다.
“너, 아까 그 힘을 쓰지 않았지?”
“조금 썼다.”
“조금이 이 정도면 더 쓰지 마. 수치가 또 흔들리면 내가 막을 방법이 없어.”
태현은 진단판의 푸른 선을 바라봤다. 연우의 말이 맞았다. 권능으로 몸의 고장을 우회할 수는 있어도 없어진 근육까지 명령으로 빚을 수는 없었다.
진단판의 경과 시간이 한 시간을 넘겼을 무렵 지상의 차량 소리가 멀어졌다.
태현은 침대 끝에 앉았다. 발바닥에 차가운 콘크리트의 감촉이 닿았다. 연우가 말리기 전에 두 발에 천천히 체중을 실었다.
칩이 심장과 호흡을 안정시켰다고 해서 오래 걸을 근육까지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 힘으로 방폭문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다음번 수색이 이곳을 찾으면 누군가에게 업혀 나갈 수는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야!”
연우가 그의 팔을 받쳤다.
“서두르지 않는다.”
태현은 침대 난간을 놓고 다시 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번째 걸음에서는 벽을 짚어야 했다. 숨이 차고 허벅지가 타는 듯했지만 신위의 강제 구동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힘으로 걸었다.
연우가 흘끗 웃었다.
“조금 전엔 죽을 뻔한 사람이 벌써 걷네.”
“아직 겨우 세 걸음이다.”
“그 세 걸음이 필요했잖아.”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벽에서 손을 떼고 다시 침대까지 걸어왔다. 이번에는 연우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진단판의 화면이 조용히 바뀌었다. 치료 중 쌓인 신경 진단 기록이 뒤늦게 정리되며 오래된 접속 흔적을 띄웠다.
[격리된 로컬 기록: 잔존 접속 흔적 판독]
태현은 화면을 좁혀 보았다. 신경 접속선은 몸에서 뽑혔지만 십 년 동안 각인된 접속 주소가 신경계에 남아 있었다. 치료 칩은 이를 불완전한 의료 이력으로 분류했다. 태현에게는 익숙한 주소였다.
[이전 접속망: 아카샤 / 관리 계층 주소 잔존]
“오래된 접속 이력이네. 의료 기록엔 목적지가 안 떠.”
연우가 글래스를 조정했다. 그녀에게는 끊어진 주소 몇 줄만 보였다. 태현은 그 뒤에 이어지는 탑의 관리자 경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외부망과 다시 손이 닿을지는 아직 확인해야 했다.
연우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래?”
“이 경로. 밖으로 송신하지 않고 열 수 있나?”
“여기 독립 전원과 격리 단말이 있어. 선을 직접 물리면 시도는 할 수 있겠지. 다만 접속하는 동안 네 몸이 버텨야 해.”
“송신선을 끊은 칩에 외부 회선을 바로 붙이지는 마.”
“알아. 네가 허락하기 전에는 격리 단말까지만 연결할 거야.”
태현은 손끝의 미세한 떨림을 내려다봤다. 몸은 아직 낡고 약했다. 하지만 더는 쓰러진 채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도 아니었다.
“배양액이 도는 동안 준비해 둬.”
“어디로 들어가려고?”
태현은 닫힌 접속 단자를 보았다.
“내가 나왔던 곳.”
단자의 검은 표면에 푸른 빛 한 점이 맺혔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