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축가와 입주민

2화: 벽 속의 작은 창
아침에 벽을 다시 보러 온 주민은 여섯 명이었다. 박선우는 밤새 잠을 설쳤다고 했다. 정미란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라 작업복 위에 외투를 걸쳤고, 임재원은 내시경 카메라와 구조도면을 챙겨 왔다. 권태식은 회사에서 승인한 추가 비용표를 들고 있었다.
“보강 전에 벽을 열면 하루 반은 더 걸립니다.” 재원이 말했다. “임시 지지대를 세우고, 안쪽 목재의 부식 정도를 확인하겠습니다.”
“그 하루 반 동안 우리 집은요?” 미란이 물었다.
“주방과 방 사이 벽은 오늘 열지 않습니다. 먼저 바깥에서 물이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실내 누수는 별도로 살핍니다.”
“그럼 아이들 방은 언제 고쳐져요?”
“오늘 원인을 확인하면, 내일 보수 범위와 임시 숙소가 필요한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미란은 대답 대신 사진을 내밀었다. 얼룩은 천장 모서리에서 창틀까지 번져 있었다. 그녀가 사진을 찍은 날짜는 두 달 전이었다. 태식은 업체가 누수 흔적을 이미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미란은 이전에 점검하러 온 사람이 천장만 보고 갔다고 했다.
“그때 누가 왔는지 기억하세요?” 은채가 물었다.
“명찰을 안 달았어요. 회사 이름도 몰라요.”
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이전 업체라면 저희 하청은 아닙니다.”
“그래서요? 벽은 지금도 젖어 있는데.”
“제가 책임을 피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찾으려는 겁니다.”
태식의 목소리는 방어적이었지만, 미란은 그의 말에 바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 뒤에 적힌 날짜를 보여 줬다. 새 공사업체가 들어오기 한 달 전이었다. 태식은 자기 회사 점검표를 다시 펼쳤다. 기록에는 ‘누수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우리 점검표예요.” 그가 말했다. “누수 흔적이 있는데 없다고 썼네요.”
“누가 썼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태식은 종이 아래 서명을 살폈다. 이름이 아닌 이니셜이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동안 천장에 물이 차면 바로 연락 주세요.”
“연락해서 누가 와요?” 미란이 물었다.
태식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는 전화번호를 적어 주려다가, 그냥 종이를 내려놓았다.
“오늘 오후에 제가 직접 와서 확인하겠습니다. 밤에도요.”
“그 약속은 적어 주세요.” 은채가 말했다.
“네.”
태식은 연락 시간과 대응 인원을 확인서에 추가했다. 미란은 서명하기 전에 그가 적은 번호로 실제 통화가 되는지 휴대전화로 시험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자 그녀는 그제야 종이를 접었다.
벽 속 창문은 생각보다 작았다. 재원은 외벽 쪽에서만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내 페인트를 벗기는 건 선우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선우는 벽을 볼 때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창은 예전에 내가 막았어.”
은채가 물었다. “왜요?”
“옆방에 살던 사람이 떠났거든. 그 사람이 나한테 열쇠를 맡겼어. 돌아오면 달라고. 그런데 몇 해가 지나도 안 왔어. 창을 열어 놓고 있으면 자꾸 그 사람이 올 것 같았어.”
“그래서 벽을 막으셨군요.”
“응. 내가 그 사람을 기다렸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미란은 창틀이 있는 벽과 선우를 번갈아 봤다. “그럼 지금 창을 열면 안 되는 건가요?”
선우는 지팡이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은 아니지. 이제 옆방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
재원은 기존 도면을 펴 놓았다. 창을 보존하면 외벽 보강재 위치를 조금 옮겨야 했다. 공사비는 늘고, 시공 기간은 하루 더 필요했다. 대신 실내 벽을 뜯는 범위가 줄어들고, 미란의 방 천장으로 이어진 누수 관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가능한가요?” 은채가 물었다.
“가능하지만 계산을 다시 해야 합니다. 창틀이 구조를 지탱하고 있지는 않아요. 다만 목재가 부식됐으면 추가 보강이 필요해요.”
“창은 남기고, 구조는 보강하고, 아이들 방은 더 빨리 고칠 수 있는 거네요.”
“검사 결과가 그렇게 나오면요.”
재원은 창문을 당장 살리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 점이 은채에게는 오히려 믿을 만했다.
벽을 열기 전, 미경? 아니, 재원은 안전선을 붙이고 실내 가구를 옮길 사람을 정했다. 미란은 아이들 책장을 직접 밀고 싶다고 했지만, 무거운 장은 태식의 인부들이 옮겼다. 은채는 중요한 물건을 상자에 담고, 박선우는 창 앞의 낡은 의자를 다른 방으로 옮겼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걸리자 재원이 들어 올리려 했다.
“그거 부러지면 안 돼.” 선우가 말했다.
“다리가 약해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들 거야.”
은채가 의자의 다른 쪽을 잡았다. “같이 들어요. 선우 어르신이 방향을 알려 주세요.”
세 사람은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등받이가 문틀에 스쳤고 오래된 니스가 조금 벗겨졌다. 선우는 혀를 찼지만, 의자를 놓지는 않았다.
“왼쪽으로.”
“이쪽이요?”
“조금만. 거기서 멈춰.”
의자는 무사히 방 밖으로 나왔다. 선우는 숨을 고르며 창문 앞에 섰다. 벽에 작은 구멍이 뚫리고 내시경 카메라가 들어갔다. 화면에는 검은 먼지와 썩은 나무가 보였다. 그 뒤로는 빈 공간, 다시 낡은 유리창이 있었다. 그리고 창틀 아래에 여러 개의 긁힌 자국이 나타났다.
“숫자 말고 글자도 있네요.” 은채가 말했다.
재원은 화면을 키웠다. 거꾸로 된 글씨가 겨우 읽혔다. ‘문을 열면 불을 켜 둬.’
선우는 웃지 않았다.
“그 사람이 쓴 말이야.”
“옆방에 살던 분이요?”
“응. 밖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 두라고 했지. 길을 잃어도 찾을 수 있게.”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창문으로 손을 뻗었지만, 재원이 부드럽게 막았다.
“지금은 만지시면 안 됩니다. 목재가 약해요.”
“내 창인데.”
“그래서 더 안전하게 열어야 합니다.”
선우는 재원의 손을 밀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열쇠 머리에는 파란 실이 묶여 있었다.
“이걸 맡았어. 그 사람한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찾지 않았지.”
은채는 열쇠를 받지 않았다.
“옆방 기록을 확인할까요?”
“아니. 지금은 창을 고쳐 줘.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도, 불을 켤 수 있게.”
작업은 벽을 크게 뜯지 않고 창틀 바깥쪽 보강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미란의 천장 누수는 상부 배수관의 이음부가 풀려 생긴 것으로 확인됐다. 태식은 임시 덮개를 씌우고 그날 밤까지 교체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미란은 아이들 방에 다시 들어가도 되는지 직접 확인했다. 천장에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어깨를 내렸다.
배수관을 교체한 뒤, 태식은 물을 흘려 이음부가 새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는 미란에게 주방 수도를 열어 달라고 요청했고, 아래층 세탁실에서는 재원이 천장 안쪽을 비췄다. 처음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미란이 수도를 잠그려던 순간, 천장 틈에서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튀었다. 아이가 “또 새요?”라고 물었다. 미란은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수건을 가져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 아래에 놓았다.
태식은 사다리를 옮겨 이음부를 다시 열었다. 관 안쪽에 굳은 실리콘 조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조각을 빼냈고, 젖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재원은 물을 다시 틀기 전 미란에게 작업을 더 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계단 밖으로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고, 은채는 세탁실 문을 잡았다. “안에서 소리 나면 바로 멈춰요.”
두 번째 시험에서는 물이 멈췄다. 하지만 미란은 천장을 바로 믿지 않았다. 그녀는 새 수건을 놓고, 다음 날 아침까지 젖는지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다. 태식은 그 확인을 공사 완료로 대신하지 않겠다고 서면에 적었다. 누수 하나가 멎었다고 벽 안의 상태까지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미란은 종이를 받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는 그제야 가방을 내려놓았다.
재원은 도면을 수정해 창문 보존안과 비용 차이를 적었다. 은채는 주민 회의에서 이 내용을 보여 줄 수 있게 파일을 받아 두었다.
“이 안이면 공사가 하루 더 걸립니다.” 그가 말했다.
“주민들이 싫다고 하면요?”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제가 먼저 낸 단축안은 철회하겠습니다. 비용도 제 설계 변경 사유로 적겠습니다.”
“회사에서 싫어할 텐데요.”
“그러겠죠.”
그는 두려워 보였다. 은채가 그걸 지적하자 재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왜 해요?”
“일정을 줄인다는 말이 누구에게 시간을 빼앗는지 이제 알았으니까요.”
은채는 그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 믿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 주민들에게 보여 줄 새 도면이 생겼다는 사실은 반가웠다.
해가 지기 전, 선우는 벽 앞에 작은 스탠드를 놓았다. 빛은 창문을 통과해 벽 속 빈 공간에 닿았다. 불을 켜 둔 채로 그는 집에 돌아갔다.
은채는 재원과 현장을 나섰다. 공사장 앞에 서 있던 세입자들이 수정 도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창문 하나 남긴다고 우리 방이 안전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내일 안전 보강안과 임시 거주 조건을 같이 놓고 결정하겠습니다.”
재원은 그녀를 돌아봤다. 은채는 그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약속은 주민들에게 한 것이었다.
그날 밤, 박선우가 맡겨 둔 열쇠가 사라졌다. 방 안에는 창문을 향해 놓인 스탠드 불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