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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축가와 입주민1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축가와 입주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축가와 입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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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명 없는 평면도

종이 한 장이 고은채의 무릎 위에서 구겨졌다. 공사 동의서였다. ‘외벽 철거 및 구조 보강’이라는 글자 아래 주민 이름이 열두 줄로 나뉘어 있었고, 마지막 줄만 비어 있었다. 빈칸은 은채의 이름을 기다리는 듯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현장소장 권태식이 시계를 봤다. 안전모 끈에 붙은 업체 스티커가 땀에 젖어 있었다.

“간사님, 일정이 밀리면 크레인 예약부터 다시 해야 해요. 그 비용은 결국 공사비에 붙습니다.”

“공사 범위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명부터 받을 수는 없어요.”

“도면 다 돌렸잖아요.”

“입면도 한 장이요. 어느 집 창문을 막는지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열린 곳은 연립주택 1층 세탁실이었다. 의자 다섯 개와 접이식 테이블 사이에 건조기에서 빠진 보푸라기 냄새가 맴돌았다. 창문은 작아서 열어도 공기가 바뀌지 않았다. 주민들은 구겨진 서류를 하나씩 내려다봤다. 누구도 은채 편을 들지는 않았다. 몇 사람은 어서 끝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보강 공사 안 하면 위험하다는 진단은 사실이죠?”

박선우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일흔둘인 그는 이 집에서 38년을 살았다. 창틀 페인트가 손톱 밑에 남을 만큼 몇 번이고 직접 칠했지만, 계단 난간을 붙들 때는 손이 떨렸다.

“네. 안전진단 결과는 받았습니다.” 은채가 답했다. “문제는 보강 자체가 아니라 이 공사 때문에 세입자들이 어디서 지내는지, 비용을 누가 내는지예요.”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임재원이 도면통을 들고 들어왔다. 셔츠 소매에는 흰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현장에 먼저 와 외벽을 살펴보느라 늦었다고 사과했다.

“제가 도면을 설명하겠습니다.”

“설명은 들었어요. 이 벽을 뜯으면 세입자 방의 창문도 막히는 건가요?”

재원은 벽에 붙인 평면도를 펼쳤다. 붉은 선이 2층 복도에서 꺾여 한 세대의 방을 가로질렀다.

“일단 안전한 보강을 하려면 일부 내력벽을 열어야 합니다. 그 기간엔 방을 비워야 하고요.”

“얼마나 비우죠?”

“공정표에는 사흘입니다.”

“그 사흘 동안 어디로 가는데요?”

“임시 숙소 비용은 사업주와 협의 중입니다.”

“그런데 서명을 먼저 받았네요.”

재원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태식이 팔짱을 꼈다.

“다들 똑같이 어렵습니다. 주민들이 서명해야 업체도 인력을 확보하죠.”

“그건 업체 사정이고요.” 은채가 말했다. “집을 비우는 사람은 주민입니다.”

회의실 한쪽에서 누군가 종이를 탁자에 내려쳤다. “그럼 공사하지 말자는 거야?” 2층에 사는 정미란이었다. 그녀는 아이 둘과 함께 살았고, 지난 겨울 천장에서 물이 샜을 때 마른 이불을 찾아 세탁실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은채가 말했다. “안전 공사는 해야죠. 다만 안전을 이유로 아무 조건 없이 집을 비우게 할 수는 없어요.”

미란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애들 방 천장부터 고쳐 주세요. 서류는 그 다음이에요.”

“그 순서도 맞습니다.” 재원이 말했다. “다만 벽을 열기 전까지 누수 원인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열어 본다더니 그냥 페인트만 칠했잖아요.”

“지난번 업체와 이번 업체가 다릅니다.”

“사는 사람한테는 둘 다 벽 뒤에서 새는 물이에요.”

재원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는 도면을 테이블 위에 눌러 펼쳤다. 은채는 도면의 붉은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벽 안쪽에 표시된 네모를 발견했다. 도면에 없는 창문처럼 보였다.

“여기 네모는 뭐죠?”

“구조 기둥입니다.”

“저 위치에 기둥은 없어요.” 박선우가 말했다.

“할아버지, 벽 안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은채가 물었다.

선우는 대답을 늦췄다. 그의 시선이 계단 아래 오래된 세탁기 쪽으로 갔다. 그곳은 건물 초창기부터 있던 벽이었다. 페인트가 일곱 겹으로 덮여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저 벽을 열어 봐야 합니다.” 재원이 말했다. “다만 오늘 당장 철거할 수는 없어요. 구조 확인 없이 뜯으면 안 됩니다.”

“그럼 진단 장비라도 넣어요.” 은채가 말했다. “서명 대신 그걸 먼저 하죠.”

태식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장비 부르면 비용이 추가됩니다.”

“벽 안에 기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안전진단 아닌가요?”

“제가 임의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결정권자에게 전화하세요. 지금.”

세탁실 공기가 가라앉았다. 주민들은 은채를 바라봤다. 미란은 아이들 학교 가방을 발등에 세워 놓고 있었고, 선우는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재원은 도면을 다시 말아 넣지 않았다.

그가 태식의 공구함을 가리켰다.

“벽을 뜯지는 말고, 내시경 카메라로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은 구멍 하나면 됩니다.”

“그 구멍은 나중에 누가 메웁니까?” 미란이 물었다.

“제가 보강 도면에 복구 비용을 포함하겠습니다.”

“사업주가 승인할까요?”

“제가 요청하겠습니다.”

재원이 먼저 나섰다. 은채는 그가 공사 일정표를 사흘로 잡았다고 했다. 그 계획과 다른 말이었다.

“아까는 공정표가 사흘이라고 했잖아요.”

“네. 그 안에 안 되는 일을 넣어 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제출했습니다.”

태식이 낮게 욕을 삼켰다. 재원은 반박하지 않았다.

“비용과 일정부터 다시 맞추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동의서에는 서명하지 마세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그 말을 건축가가 하니까 더 믿기 어렵네요.” 은채가 말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제가 제출한 도면과 비용표를 보세요.”

“그건 보겠습니다. 서명은 안 해요.”

태식은 결국 사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너머에서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장비 비용을 누가 내느냐는 말이 오갔다. 주민들은 듣기만 하지 않았다. 미란이 자기 방 천장의 물자국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고, 선우는 오래된 벽에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를 가리켰다.

“그 구멍은 여기 내요. 예전에도 창이 있던 자리니까.”

재원은 그 말을 듣고 벽면을 살폈다. 손가락으로 페인트를 두드렸다. 소리가 다르게 울리는 곳이 있었다. 그는 안전선을 긋고 주민들을 한 걸음 물러서게 했다.

내시경을 넣을 작은 구멍은 현장소장이 직접 뚫기로 했다. 드릴이 벽에 닿자 세탁실 천장까지 떨렸다. 먼지가 내려와 은채의 머리카락과 도면 위에 앉았다. 세 번째 구멍에서 재원이 손을 들었다.

“멈추세요.”

카메라 화면에 검은 직사각형이 나타났다. 벽 안에는 기둥이 없었다. 대신 좁은 나무틀과 유리 조각이 보였다. 오래된 창문이었다.

박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 창을 왜 막았는지 아무도 몰랐는데.”

그의 목소리는 세탁기 회전 소리에 묻힐 만큼 작았다. 은채는 손을 뻗어 지팡이를 주워 주었다. 선우는 받지 않고, 구멍 안쪽을 보고 있었다.

“이 집에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어오던 창이었어.”

재원은 카메라를 돌리려다 멈췄다. 벽 뒤편에서 나무틀에 새겨진 숫자가 보였다. 2-17. 선우가 살던 방 번호도, 현재 집 주소도 아니었다.

“누구 방이에요?” 은채가 물었다.

선우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숨긴 건 창문만이 아닌 듯했다.

재원은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벽 속 나무틀 아래로 가는 금이 세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태식에게 드릴 전원을 끄게 하고, 구멍 주변을 더 뚫지 말라고 했다. 태식은 공사 인부를 부르려 했지만 재원은 먼저 계단을 막았다. 누군가 호기심에 가까이 오다 발이 미끄러지면 안 됐다. 은채는 세탁실 문 앞에 임시 안내지를 붙이고, 주민들이 다른 출입구를 쓰도록 알려 줬다. 미란은 아이들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다 먼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멈췄다. 은채는 아이를 안아 올리려는 대신, 손잡이를 잡고 안전한 쪽으로 돌렸다. “오늘은 이 계단으로 가지 말자. 엄마랑 뒤쪽 문으로 나가자.” 아이는 벽의 작은 구멍을 가리켰지만, 재원은 카메라 화면을 껐다. 집 안을 구경거리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긴급 점검을 요청하며 비용을 자신이 제출한 도면 변경 항목에 기록했다. 태식은 추가 작업이 시작되면 그날 인력비가 늘어난다고 불평했지만, 그래도 계단 통제선을 직접 붙였다. 빨간 테이프는 좁은 세탁실을 가로질렀다. 안전을 위한 줄 하나가 벽보다 먼저 주민들을 갈라놓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동의서에는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은 내시경 검사와 누수 진단만 허용한다는 임시 확인서에 이름을 적었다. 은채는 마지막 줄에 자기 이름을 썼다. 계약이 아니라 점검의 범위였다.

재원은 그 확인서를 촬영해 주민들에게 공유했다. 태식은 추가 비용을 공사비에 반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원은 일정 지연 책임을 자기 설계 기록에 남기겠다고 답했다.

주민들이 돌아간 뒤, 은채는 세탁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쓸었다. 재원은 말없이 빗자루를 건넸다.

“도와줄 수 있어요?”

“네.”

“제가 이 집을 지키려고 서명하지 않은 게, 공사를 막는 일이 되면 안 돼요.”

“그럼 공사를 막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를 다시 하겠습니다.”

“혼자 약속하지 말고요. 주민들이 동의할 때까지요.”

재원은 빗자루를 잡은 손을 멈췄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탁실의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벽 속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 사이에서 오래된 유리 조각이 작게 빛났다. 은채는 그 창문이 누군가를 이어 준 것인지, 누군가에게서 숨겨진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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