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건축가와 입주민

3화: 살 사람의 도면
주민 설명회는 세탁실에서 열리지 않았다. 은채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몰아넣으면 목소리가 먼저 부딪힌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근처 작은 도서관의 모임방을 빌렸다. 재원은 도면을 벽에 붙였고, 태식은 공사 일정표와 업체 연락망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미란은 아이들 방의 누수 사진을 큰 화면에 띄웠다.
“오늘은 서명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은채가 말했다. “세 가지 안을 비교하고, 위험과 비용, 거주 조건을 확인한 뒤 다음 회의에서 정하겠습니다.”
주민 몇 명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회의가 또 미뤄진다고 불평했다. 태식은 자기 휴대전화를 들어 야간 대응 번호가 실제로 연결되는 걸 보여 줬다. 전날 밤 배수관 교체를 끝냈고, 미란의 방 천장은 건조 상태를 확인할 때까지 임시로 막아 두었다.
“누수는 해결됐습니까?” 미란이 물었다.
“원인은 고쳤습니다. 천장 내부에 곰팡이가 있는지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 비용은 업체가 부담하겠습니다.”
태식은 바로 말한 뒤, 서면 확인서에 그 내용을 추가했다. 그는 표정이 편치 않았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재원은 세 가지 도면을 차례로 보여 줬다. 첫째는 공사 기간이 짧지만 거주자 두 세대가 방을 비워야 했다. 둘째는 창을 보존하면서 바깥에서 보강하는 안으로 비용과 시간이 늘었다. 셋째는 전체 외벽을 보강하는 대신 임대인이 일부 세입자의 이주를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셋째 안은 제안에서 빼야 합니다.” 은채가 말했다.
“이주를 요구하는 건 임대인 권한입니다.” 재원이 답했다.
“권한이 있다고 가능한 선택이라는 뜻은 아니죠. 여기에 사는 사람 중 누구도 떠나겠다고 동의하지 않았어요.”
“그럼 1안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2안의 비용과 부담을 계산하는 자리예요.”
주민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2안에 반대했다. 3층의 부부는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보증금 대출 이자가 걱정된다고 했다. 1층 세입자는 외벽 공사가 끝나도 임대료가 오를까 두려워했다. 박선우는 창을 보존하자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자기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저 창은 나한테 중요한 거지, 모두에게 중요한 건 아니야.”
그는 어제 사라진 열쇠에 대해 이야기했다. 밤새 찾았지만 없었다. 창을 열기 전에 누가 열쇠를 가져갔는지 확인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은채는 도서관 탁자 아래서 파란 실이 묶인 작은 열쇠를 발견했다. 선우는 자신의 주머니를 비우며 말했다.
“아침에 코트 안주머니에서 나왔어. 누가 가져간 줄 알았는데, 내가 놓친 거였지.”
미란의 아이가 그 열쇠를 보며 물었다.
“그럼 창문은 열 수 있어요?”
“아직은 안 돼.” 선우가 말했다. “고치고 나서 열어야지.”
은채는 창을 남기는 안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보강재 위치와 비용을 주민들이 직접 비교하도록 재원에게 확대 도면을 요청했다. 재원은 각 안의 추가 비용뿐 아니라 예상 공사 소음 시간, 실내 먼지 통제, 임시 숙소가 필요한 날까지 표에 적었다. 숫자 옆에 근거 사진도 붙였다.
“여기 작업 시간은 왜 밤 7시까지예요?” 주민 한 명이 물었다.
“현장소가 하루 한 시간 더 확보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재원이 답했다.
“그럼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집이 공사 중일 수 있잖아요.”
“맞습니다. 그 시간은 다시 낮으로 조정하겠습니다.”
“업체가 동의할까요?”
태식이 먼저 말했다.
“인력 배치를 다시 봐야겠지만, 집 안 작업은 주민이 있는 시간에만 하겠습니다. 외벽 작업은 별도 동의를 받겠습니다.”
그는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연락할 관리자 이름을 적었다. 이번엔 전화번호도 함께 썼다. 미란이 번호로 다시 전화하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을 찍어 자기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주민들은 2안의 세부 설계를 더 검토하고 다음 날까지 추가 의견을 내기로 했다. 서명은 없었다. 하지만 공사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태식은 외벽에 임시 지지대를 설치해 위험을 낮추고, 실내 작업은 보류하기로 했다. 그건 승인이 아니라 임시 안전 조치였다. 은채는 그 차이를 회의록 첫 줄에 적었다.
회의가 끝나기 전, 태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외벽에 설치한 임시 지지대가 바람에 떨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태식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 확인하러 갑니다. 누가 따라오려면 안전모부터 쓰세요.”
은채는 주민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선우가 이미 지팡이를 짚고 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재원은 그를 막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만 보시고, 테이프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셋은 빗속의 골목으로 나갔다. 지지대 하나가 벽에 비스듬히 닿아 있었다. 금속이 긁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태식이 작업자에게 줄을 잡으라고 손짓했지만, 바람이 한 번 더 불자 지지대가 흔들렸다.
“뒤로 물러나세요!” 태식이 소리쳤다.
은채는 골목 입구에서 주민들을 막았다. 아이 하나가 공사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미란이 아이를 잡아끌었다. 재원은 구조기술자와 통화하며 임시 고정 위치를 확인했다. 그가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태식은 줄을 당겨 지지대를 붙들고 있었다. 작업자의 장갑이 미끄러졌다. 은채는 공사장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주변 차량을 멈춰 세워 길을 비웠다. 배달 오토바이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물을 튀겼다. 선우는 우산을 접어 바람 방향을 가리켰다.
기술자가 도착해 추가 버팀목을 설치하고 나서야 금속 소리가 멎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지대를 다시 세우느라 다음 날 실내 작업은 취소됐다. 미란은 자기 집 천장 보수도 늦어진다는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안전이 먼저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우리 가족은 또 기다려야 하네요.”
“맞아요.” 은채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제가 같이 와서 작업 시간을 다시 확인할게요.”
미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본인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만 작업하라고 했다. 태식은 그 시간에 맞추면 추가 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미란은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확인한 뒤에야 동의했다. 작은 합의였지만, 기다리는 시간까지 누가 결정하는지 명확해졌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 재원은 도면을 떼어 말았다. 은채가 남은 종이를 정리하는 동안 그가 종이컵 두 개를 가져왔다. 하나에는 물, 하나에는 따뜻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
“커피는 제가 마실게요.” 은채가 말했다.
“물은 제가 마시겠습니다.”
둘은 자리 바꾸지 않고 각자 컵을 들었다.
“오늘 도면 좋았어요.” 은채가 말했다.
“반대 의견이 더 많았는데요.”
“그게 좋은 도면이라는 뜻은 아니죠. 적어도 반대 이유가 보이게 그렸다는 뜻이에요.”
재원은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처음 제출한 단축안은 사업주한테만 설명했습니다. 주민들에게 보여 주면 반대할 걸 알아서요.”
“그걸 또 숨겼다면 다음엔 같이 일 못 했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이제 알게 된 거겠죠.”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은채는 그가 말없이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장면이 고백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도서관을 나설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재원은 자기 우산을 폈지만 은채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우산 같이 써도 돼요?”
그가 묻자 은채는 속도를 늦췄다.
“네. 제가 오른쪽으로 갈게요.”
둘은 어깨를 맞대지 않도록 우산 가운데를 잡았다. 길 건너 연립주택 외벽에는 태식의 작업자들이 임시 지지대를 세우고 있었다. 불빛 아래 금속 기둥이 벽을 받쳤다. 은채는 그 기둥이 집을 영원히 세워 주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 밤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 줄 뿐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박선우가 계단 창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열쇠를 들고 있었다. 창을 열어 보진 않았다고 했다. 재원은 창틀을 보강한 뒤 함께 열자고 말했다.
“그때는 내가 열게.” 선우가 말했다.
“네. 어르신이 여세요.”
은채가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열지 않겠습니다.”
계단을 오르던 중 재원이 물었다.
“은채 씨는 이 집을 떠날 생각이 있습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이사 매물 목록이 휴대전화 안에 저장되어 있었다. 낮은 임대료를 찾으려면 멀리 가야 했다. 이 집에 남는 것만이 집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있어요. 공사와 상관없이요.”
“그럼 제가 설계에 포함할 수 있는 건 뭘까요?”
“떠날 사람도 안전하게 떠날 수 있는 조건이요. 남는 사람만 집의 주인은 아니니까.”
재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 생각을 자기 도면에 넣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몰랐다. 은채도 그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박선우는 벽 앞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유리창 복원용 임시 덮개가 희미하게 빛났다. 벽의 안쪽 면에는 낮에 보지 못한 숫자가 하나 더 있었다. 2-17 아래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다음 집에도 불을 켜 둬.’
박선우는 그 문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은채는 사진을 찍기 전에 그에게 물었다.
“기록해도 괜찮으세요?”
그는 한참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기억이니까. 내가 허락할게.”
은채는 글씨를 촬영해 기록에 남겼다. 재원은 다음 날 구조 점검표에 창의 위치뿐 아니라 세입자 동의 범위도 적겠다고 했다. 그 약속은 건물을 완성하는 것보다 느렸지만, 이번엔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다음 도면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