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아포칼립스

9화: 환풍구의 붉은 냄새
“문 좀 열어 주세요.”
셔터 밖에서 김도현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바로 뒤에서 민석의 입술도 움직였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두 문장은 같았지만 소리는 같지 않았다. 밖의 목소리는 철판을 한 겹 통과한 것처럼 낮고 눅눅했다. 민석의 목소리는 목 안에서 걸렸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 차이를 듣고도 박두식의 손은 민석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들었지? 이제 확실해.”
“확실한 건 따라 했다는 것뿐입니다.”
한결은 민석의 손목을 잡은 채 말했다. 손목의 맥박은 빠르고 불규칙했지만 사람의 박자였다. 민석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뼈와 천이 서로 스쳤다.
셔터 밖에서 짧은 숨이 들렸다.
“한결 씨.”
민석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지우가 한결의 팔목을 두 번 눌렀다. 밖의 목소리가 먼저였다는 신호였다. 민석은 한 박자 뒤에 따라 했다. 하지만 두 목소리 사이의 간격은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한결은 민석의 손바닥을 폈다.
“손가락 하나만 세워 보세요.”
민석의 엄지가 올라왔다.
“둘.”
검지가 따라 올라왔다.
“셋.”
민석은 중지를 올리려다 멈췄다. 숨이 짧게 끊겼다. 셔터 밖에서 손톱이 철판을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민석의 중지가 올라왔다.
박두식이 이를 악물었다.
“밖에서 신호를 주니까 따라 한 거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묶으면 안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죽일 셈인가?”
박두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셔터 아래의 틈에서 바람이 한 번 세게 밀려왔다. 팔레트의 생수병들이 낮게 부딪혔다. 밖의 존재가 안쪽의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철판을 긁었다.
한결은 손을 들어 모두의 입을 막았다. 박두식의 거친 숨이 가장 가까이에서 부딪혔다. 수아는 랩이 묶인 난간을 다시 눌렀고 지우는 민석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자 셔터 밖의 소리도 멎었다.
대신 천장 쪽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톡.
한결의 손등에 차가운 액체가 닿았다. 물처럼 묽었지만 냄새가 달랐다. 젖은 철과 오래된 피를 섞은 듯한 냄새가 코 안쪽에 달라붙었다.
수아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 냄새…… 셔터 쪽에서만 나는 게 아니에요.”
환풍팬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아까까지 일정하던 바람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한결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타일에 붙였다. 셔터 틈으로 들어오던 바람은 낮고 차가웠다.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목덜미를 향해 축축하게 흘렀다.
“환풍구에서 내려옵니다.”
박두식이 민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놈부터 떼어 놓자.”
민석이 몸을 뒤로 빼며 벽에 등을 부딪쳤다. 눈가리개 매듭이 흔들렸다.
“저도 들었어요.”
“뭘 들었습니까?”
한결이 물었다.
민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환풍구의 덜컹거림 사이로 누군가 아주 가까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거친 숨은 한 번 길게 이어진 뒤 끊겼다. 그 다음에는 민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 있어요?”
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말한 게 아니에요.”
“아직은 믿습니다.”
한결은 민석의 손을 지우에게 넘겼다.
“다만 이제부터는 목소리만 대답으로 쓰지 마세요. 손을 한 번 쥐면 예. 두 번이면 아니오입니다.”
지우가 민석의 손가락을 감쌌다.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놓지는 않았다.
수아는 벽을 따라 한 걸음 옮겼다. 천장 환풍구의 위치를 찾으려는 듯 손을 위로 뻗었다. 손끝이 금속 그릴에 닿자 얇은 진동이 전해졌다.
“여기예요. 직원 통로 분기구.”
그릴 사이로 축축한 공기가 내려왔다. 한결은 손등을 가까이 대고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바람은 통로 안으로 밀려오다 갑자기 왼쪽으로 꺾였다. 분기구 안쪽 어딘가에서 압력이 바뀌고 있었다.
“방재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아가 말했다.
“환풍 차단 스위치가 제어반 아래쪽에 있어요. 예전에 화재 훈련할 때 본 적 있습니다.”
“지금 끄면 안쪽 공기가 막히는 것 아닙니까?”
박두식이 물었다.
“방재실에서 분기별로 끊을 수 있어요. 전체를 끄는 게 아니라 정문 쪽 흡입만 닫는 방식일 거예요.”
“일 거예요?”
“화면을 봐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화면은 못 봅니다.”
수아의 말끝이 낮게 가라앉았다. 익숙한 버튼과 배치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그녀의 손이 그릴 위에서 멈췄다.
그때 지우가 한결의 팔목을 한 번 세게 쥐었다.
“멈춰요.”
모두의 발이 멎었다.
지우가 환풍구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눈가리개 아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말고 다른 게 있어요.”
한결은 숨을 낮췄다. 환풍팬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금속 덕트가 울렸다. 그 사이에 아주 가벼운 마찰음이 섞였다.
긁는 소리였다.
금속 안쪽을 손톱으로 훑는 것처럼 얇고 느린 소리. 한 번은 그릴 가까이에서 났고 다음에는 멀리 밀려났다.
박두식이 허리춤을 더듬었다. 무전기나 손전등을 찾는 동작이었다.
“불 켜지 마세요.”
한결이 먼저 말했다.
“볼 수 없다는 건 놈도 우리를 바로 못 본다는 뜻입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그 목소리를 확인하려고 그릴을 열면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그럼 안에 있는 사람을 버리자는 건가?”
박두식의 말이 환풍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곧바로 덕트 안쪽에서 같은 문장이 되돌아왔다.
“안에 있는 사람을 버리자는 건가?”
이번에는 민석이 따라 하지 않았다.
그는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았다. 천이 손바닥에 눌리는 소리가 났다.
“저 목소리 아니에요. 제 머리 안에서 들려요.”
민석의 무릎이 꺾였다. 지우가 그의 팔을 붙잡았고 한결은 반대쪽 어깨를 받쳤다. 민석의 이마는 뜨거웠다. 땀이 눈가리개 아래로 흘러 매듭을 적셨다.
“무슨 말을 합니까?”
“계속 문을 열라고 해요. 밖에 사람이 있다고…… 김도현 씨가 기다린다고…….”
셔터 밖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번 웃음은 민석의 귀 안에서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팔레트의 생수병들이 떨렸고 난간에 감긴 랩이 바스락거렸다. 외부의 존재가 민석의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박두식이 민석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었다.
“이제 격리한다.”
“잠깐.”
한결이 팔을 가로막았다.
“손을 묶는 동안 셔터를 놓게 됩니다.”
“수아가 대신 잡으면 돼.”
“수아 씨는 환풍구를 확인해야 합니다. 지우는 민석의 반응을 봐야 하고요.”
“네가 다 정해?”
박두식의 손이 한결의 가슴을 밀쳤다. 한결은 한 걸음 물러났지만 환풍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밀린 발뒤꿈치가 물기 위를 밟았다. 축축한 액체가 양말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환풍구에서 민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결 씨. 아래에 있어요.”
민석은 한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입은 닫혀 있었다.
지우의 손가락이 한결의 손등을 빠르게 두드렸다. 환풍구 안쪽에서 난 소리라는 뜻이었다.
한결은 발을 빼지 않았다. 발바닥 아래의 물기는 차갑지 않았다. 체온보다 조금 낮은 정도로 미지근했다. 그 액체가 배수 홈을 따라 흐르며 셔터 쪽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수아 씨. 그릴을 열지 말고 나사 위치만 확인하세요.”
“확인했어요. 네 개예요.”
“그릴 위를 덮을 수 있습니까?”
수아가 주변을 더듬었다. 비상 담요가 접히는 사각거림이 났다.
“덮을 수는 있어요.”
“완전히 막지는 마세요. 바람이 다른 곳으로 밀리면 분기구가 더 열릴 수 있습니다. 직접 내려오는 부분만 늦춥니다.”
수아가 담요를 그릴 위에 올렸다. 금속 진동이 천을 타고 약해졌다. 그러나 환풍팬의 소리는 오히려 커졌다. 통로 오른쪽 끝에서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다른 데로 빠졌어요.”
수아가 말했다.
“오른쪽 분기구가 열렸습니다.”
한결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 대신 공기의 결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오른쪽 벽 위에서 비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의 바람은 약했지만 냄새는 더 짙었다. 녹슨 철 냄새가 아니라 달고 비린 냄새였다. 혀끝에 닿지도 않았는데 입안이 저렸다.
지우가 헛기침을 했다.
“머리가 아파요.”
수아도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저도 조금…….”
한결은 즉시 사람들을 벽에서 떼어 냈다.
“셔터 쪽으로 붙지 마세요. 환풍구 아래에서도 떨어집니다.”
박두식이 민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래도 격리하지 않을 건가?”
“민석 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우와 수아 씨도 냄새를 맡고 두통을 느꼈어요.”
“민석은 목소리를 따라 해.”
“민석은 지금도 손 신호에 반응합니다.”
한결은 민석의 손바닥을 다시 폈다.
“민석 씨. 손가락 두 개.”
민석의 손가락 두 개가 올라왔다.
“지우가 손을 쥐고 있습니까?”
민석은 손을 한 번 쥐었다. 지우의 손을 느꼈다는 뜻이었다.
“제가 지금 눈을 뜨고 있습니까?”
민석은 두 번 쥐었다. 아니오였다.
박두식의 숨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는 당장 반박하지 못했다.
한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환풍 차단을 위해 방재실로 돌아갑니다. 민석 씨는 가운데에 둡니다. 지우가 한쪽 손을 잡고 저는 다른 쪽 손목을 확인합니다. 팀장님은 뒤에서 셔터와 환풍구 소리를 같이 들어 주세요.”
“내가 네 지시를 왜 따라야 하지?”
“지금까지 셔터를 막은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박두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팔레트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랩이 팽팽해지며 난간이 낮게 울렸다.
밖의 존재가 그 소리를 듣고 셔터를 밀었다.
쿠웅.
카트 바퀴가 바닥을 긁었다. 팔레트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한결은 즉시 카트 아래에 발을 걸고 수아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순간 환풍구 안에서 여러 목소리가 겹쳤다.
“문을 열어 주세요.”
김도현의 목소리였다. 박두식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민석의 목소리였다.
민석의 입술이 닫힌 채 떨렸다.
그가 먼저 말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아직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환풍팬이 멎었다.
어둠 속에서 내려오던 붉은 냄새가 통로 전체로 퍼졌다.
한결은 모두의 손목을 확인했다. 누구도 눈가리개를 풀지 않았다. 누구도 셔터를 놓지 않았다.
그런데 방재실 쪽에서 카드키를 찍는 소리가 났다.
삑.
수아의 손이 한결의 팔을 붙잡았다.
“저쪽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두 번째 전자음이 울렸다.
삑.
방재실 문 쪽에서 누군가 대열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