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낙원의 배신자

9화: 폐허의 지상
녹슨 쇠창살 바닥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2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신경계를 사정없이 찔렀다. 바닥에 엎드린 이현은 기침을 멈출 수 없었다. 목구멍에 엉겨 붙어 있던 끈적한 배양액이 핏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쿨럭! 컥, 커헉……!”
위장이 뒤집히는 구역질에 가슴을 쥐어뜯었지만 손가락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디마디 굳은 뼈는 부러질 듯 위태로웠고 창백한 팔다리는 제멋대로 떨렸다.
중력.
가상 세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무자비한 행성의 무게가 전신을 짓눌렀다. 단 1센티미터를 들어 올리는 것조차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일어나야 한다.’
이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비상등만이 점멸하는 거대한 지하 공동이 망막을 때렸다.
끝없이 이어진 관의 무덤. 천장 꼭대기까지 쌓아 올려진 수만 개의 검은 기계 관마다 굵은 케이블이 지네 다리처럼 얽혀 있었다. 푸른 뇌파가 거대한 집전 파이프를 타고 쉼 없이 맥동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가짜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육신이 해골처럼 말라붙은 채 배터리로 전락한 줄도 모른 채.
치이익-
[경고: 제17 보관동 17-084 비인가 생체 개체 이탈]
[방역 프로토콜 개시: 신경 안정 가스 살포]
기계 관 스피커에서 합성음이 쏟아지더니 천장 배관에서 푸르스름한 화학 증기가 피어올랐다. 뇌를 마비시켜 강제로 재우려는 독가스였다.
‘움직여.’
이현은 바닥을 기었다. 억지로 무릎을 굽히자 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듯한 격통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강철 지지대를 붙잡고 일어섰다.
벽면에 박힌 비상 제어반으로 다가간 이현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손등의 원형 문양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가상의 권한은 사라졌으나 육체에 각인된 마도 신경망은 살아 있었다.
그는 제어반의 덮개를 뜯어내고 주 전원선과 방역 밸브 선을 맞붙였다. 푸른 불꽃이 튀며 제어반이 타들어 가더니 뿜어져 나오려던 가스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이현은 숨을 몰아쉬며 제어반 옆의 긴급 사물함을 열었다.
다행히 두꺼운 마도 방호 코트와 부츠와 필터 마스크가 들어 있었다. 선반 구석의 공구함에는 고주파 방전 단검과 에테르 카트리지가 든 구형 마도 권총도 있었다.
코트를 걸치고 부츠를 신자 떨리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손등의 문양과 권총의 마도 회로가 공명하며 손끝에 서늘한 감각을 전해왔다.
쿠구구구궁!
그 순간 보관동 깊은 곳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 매달린 크레인이 레일을 따라 움직였다. 육중한 집게발이 관 하나를 낚아채 뽑아 올렸다.
[개체 식별: 884-12]
[뇌파 동조율: 0.0%]
[판정: 뇌파 완전 고갈 / 영혼 추출 종료]
[상태: 생체 자재 하치장 이송]
884-12.
이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가상 낙원의 유리 정원에서 잠에서 깨고 싶다며 절규하던 그 시민의 현실 번호였다.
크레인이 관을 뒤집자 바짝 마른 시체가 허공으로 쏟아졌다.
털썩!
시체는 바닥의 폐기 컨베이어 벨트 위로 떨어졌다. 머리와 척추에는 전선이 뽑혀 나간 구멍이 흉측하게 뚫려 있었다.
벨트 위에는 884-12뿐만이 아니었다. 뼈만 남은 수십 구의 시신들이 도살장의 가축처럼 줄지어 어두운 수직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통로 입구에는 붉은 경고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경고: 생체 자재 하부 가공 라인]
[미인가 인원 접근 금지]
‘생체 자재.’
이현의 턱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낙원은 인간의 영혼과 뇌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가짜 도시를 밝히고 껍데기는 하부 공장으로 보내 부품으로 재활용하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는 이현의 귓가에 이슬의 생체 데이터가 번뜩였다.
[퍼스트 배터리: 강이슬]
[출력: 기준치 대비 71.2배]
[생체 배터리 잔여 수명: 위험 수준]
이슬도 이 거대한 착취의 톱니바퀴 한가운데에 물려 있었다.
출력 71.2배. 낙원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 동생의 생명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지상에서 멈춘다면 이슬 또한 저 차가운 벨트 위로 내던져질 터였다.
이현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으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반드시 부순다.”
그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그가 향해야 할 곳은 이 거대한 지옥의 심장부인 아담 메인 타워였다.
보관동 한쪽 외벽은 거대한 폭발로 처참하게 뜯겨 나가 있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찢겨진 철판을 흔들며 기괴한 쇳소리를 냈다.
이현은 코트 깃을 세우고 무너진 외벽의 틈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깥으로 나서자 거친 돌풍과 함께 잿빛 산성비가 마스크를 때렸다.
방호 마스크 필터를 거쳐 들어오는 공기는 쇠를 태우는 냄새와 부패한 흙먼지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현은 렌즈를 훔쳐내며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그곳에 낙원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잿빛 폐허.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들의 골조가 녹슨 거인의 뼈대처럼 쓰러져 있었고 갈라진 도로는 검은 흙탕물과 고철에 뒤덮여 있었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에 짓눌려 태양의 흔적조차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영원한 황혼.
그 지옥 같은 폐허의 지평선 한가운데에 그것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담 메인 타워.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듯 솟아오른 거대한 기계 탑. 외벽에는 핏빛 에테르 회로가 혈관처럼 꿈틀거렸고 꼭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번개가 잿빛 구름을 갈랐다.
그곳이 바로 엘리시움의 본체이자 수천만 명의 영혼이 갇힌 감옥이었다. 저 탑의 최심부에 이슬이 갇혀 있었다.
‘수십 킬로미터인가.’
문명이 완전히 붕괴한 지상 폐허를 온전히 두 발로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도로는 끊겼고 사방은 험준한 잔해였다.
게다가 이 폐허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바람을 타고 기괴한 저주파 진동이 땅을 울렸다. 보관동 외벽 아래 고철 골짜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현은 콘크리트 잔해 뒤로 몸을 숨기며 마도 권총의 안전장치를 조용히 풀었다.
철컥.
바위와 철근을 밟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길이 2미터의 사냥개 형상을 한 괴물이었다.
검게 그을린 강철 장갑과 유압 실린더로 뒤덮인 거대한 몸체. 등덜미에는 붉은 광학 센서 세 개가 번뜩였고 입에는 강철을 씹어 부술 수 있는 회전식 톱니 이빨이 박혀 있었다.
기계 마수. 네크로 멕(Necro-Mech).
지상의 인간을 사냥하고 아담의 영역을 수호하는 자동 살상 병기였다.
치이익- 척! 척!
마수가 네 발로 잔해를 딛으며 다가왔다. 관절이 꺾일 때마다 낡은 피스톤에서 증기가 뿜어졌다.
괴물의 붉은 센서가 허공을 훑었다. 보관동에서 흘러나온 배양액 냄새와 생체 신호를 감지한 듯 거친 기계음을 토해냈다.
거리 15미터.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20년간 쇠약해진 육체로는 저 거대한 쇳덩이의 돌진을 버텨낼 수 없었다.
‘약점을 노려야 한다.’
이현은 마수의 구조를 빠르게 훑었다.
전직 보안 관리자로서 아담이 설계한 기계류의 메커니즘은 뼈저리게 꿰뚫고 있었다.
목덜미 장갑판 사이로 삐져나온 푸른 에테르 동력선. 그리고 뒷다리 관절을 제어하는 주 유압 튜브. 그 두 곳이 파괴된다면 아무리 거대한 마수라도 즉시 기동력을 잃는다.
크르르-!
마수의 센서가 이현이 숨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고정되었다.
들켰다.
챙!
마수가 바닥을 박차며 덮쳐왔다. 거대한 강철 턱이 이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이현은 당황하지 않고 뒤로 몸을 날렸다.
쾅!
마수의 머리통이 콘크리트 기둥을 들이받았다. 기둥이 바스러지며 자갈과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충격으로 마수의 고개가 찰나의 순간 위로 들렸다.
이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며 품에서 고주파 방전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오른손 손등의 원형 문양에 신경을 집중했다.
‘흘러라.’
파지지직!
문양에서 뻗어 나온 에테르 스파크가 단검의 칼날로 옮겨붙었다. 단순한 공구였던 단검이 푸른 고열을 뿜어내며 맹렬하게 진동했다.
마수가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강철 발톱이 방호 코트자락을 찢고 지나갔다. 옆구리에 스치는 통증이 느껴졌으나 이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파고들었다.
마수의 가슴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역수로 쥔 단검을 목덜미 틈새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쉬익!
고열의 단검이 에테르 케이블을 태우며 관통했다.
“크아아악-!”
기계의 비명이라 믿기 힘든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마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부 회로가 합선되며 마수가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꼬리가 이현의 등을 후려쳤다.
쿵!
“컥……!”
이현의 몸이 뒤로 날아가 고철 더미에 처박혔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확 퍼졌다.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쓰러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력이 끊긴 마수는 뒷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을 긁으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붉은 센서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이현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다가가 떨리는 두 손으로 마도 권총을 쥐었다. 총구를 마수의 깨진 센서 렌즈 한가운데에 밀착시켰다.
“정지해라.”
탕!
푸른 섬광이 렌즈를 뚫고 마수의 두개골 내부로 작렬했다.
퍼엉 하는 폭음과 함께 마수의 머리통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거대한 쇳덩이가 바닥에 늘어졌다.
적막 속에서 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산성비가 상처를 따갑게 적셨다.
하지만 마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터져 나간 마수의 머리통과 목덜미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기계 기름만이 아니었다.
진득한 검붉은 피.
역겨운 썩은 내와 함께 찢겨진 장갑 안쪽에서 부패한 살점과 사람의 핏줄을 닮은 생체 섬유들이 흉측하게 엉켜 있었다.
“……이건?”
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기계 프레임 속에 살아 있던 생명체의 조직이 강제로 결합되어 있었다.
생체 자재.
보관동 컨베이어 벨트에서 보았던 그 단어가 머릿속을 강하게 스쳤다. 설마 이것들은 고갈된 인간의 육신을 부품 삼아 만든 괴물인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쿠구구궁-!
대지가 울렸다.
방금 전 마수가 내질렀던 비명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폐허 저편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붉은 불빛들이 일제히 켜졌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이며 굶주린 짐승처럼 좁혀오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쇠를 긁는 포효가 잿빛 폐허의 밤하늘을 찢었다.
이현은 피 묻은 권총을 꽉 쥐었다.
마수들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었다. 잔혹한 현실은 그에게 숨을 고를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