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낙원의 배신자

10화: 흉측한 마수
붉은 안광 하나가 고철 더미 위로 솟았다.
그다음에는 셋.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불빛이 이현을 향해 일제히 기울었다.
이현은 죽은 마수의 머리에서 총구를 떼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 갈비뼈를 따라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마스크 필터 안에는 그의 뜨거운 숨이 맺혔다.
‘여기서 싸우면 죽는다.’
사냥개 형상의 마수가 앞발로 철판을 눌렀다. 그 한 기 뒤에서 다른 세 기가 벌어졌다. 포위망의 양쪽 끝이 잔해를 돌아 그의 등 뒤로 움직였다.
놈들은 죽은 동료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붉은 센서를 잠깐 맞댄 뒤 살아 있는 이현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협곡의 좁은 길마다 발톱 소리가 겹쳤다.
방금 쓰러진 놈의 목에서는 아직 붉은 불이 깜박이고 짧은 경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현은 단검을 뒤집어 쥐고 깨진 장갑 안의 센서 묶음을 끊었다.
지직.
죽은 마수의 경고음이 뚝 끊겼다. 두 기가 곧장 달려오던 자세에서 잠시 머리를 돌렸다. 이현은 그 찰나에 왼쪽 고철 골짜기로 뛰었다.
센서 불빛을 끈 것만으로 추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놈들의 머리가 다시 한꺼번에 돌아왔다. 이현은 속도를 내는 대신 낮은 차체 밑을 통과해 가장 가까운 앞발의 직선 경로를 끊었다.
두 걸음째에 숨이 찼다. 폐 속에 남은 배양액이 다시 끓는 듯했다. 뒤에서 금속 발톱들이 서로 다른 높이의 철판을 긁었다.
그가 향한 곳은 막다른 길처럼 보였다. 붕괴한 도로 밑으로 둥근 폐수 배수로의 입구가 벌어져 있었다. 사람 하나는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으나 마수의 강철 어깨는 통과할 수 없는 크기였다.
입구 위의 도로는 하중을 버티지 못해 가운데가 내려앉아 있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도 마수와 함께 아래로 떨어진다. 그래도 탁 트인 골짜기보다 그곳이 나았다.
입구까지 열두 걸음.
오른쪽에서 튀어나온 마수가 그의 발목을 물려 했다. 이현은 권총을 들었다가 내렸다. 총탄을 여기서 쓰면 뒤의 놈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발끝으로 녹슨 판재를 걷어찼다. 판재가 마수의 센서에 부딪힌 사이 몸을 비틀어 철근 사이로 빠졌다.
발톱 하나가 코트 등판을 길게 갈랐다. 피부가 스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입구 위에 더 큰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마수들이 갑자기 좌우로 갈라졌다. 그 사이를 무거운 발소리가 메우며 폐차 한 대가 옆으로 밀려났다. 선두가 이현을 쫓아 입구로 몰아넣고 뒤따르던 놈이 통로를 막은 꼴이었다.
네 다리가 아니었다. 굴착기처럼 굵은 여섯 다리에 고철을 끌어모으는 집게가 달린 회수형 마수였다. 아래로 처진 둥근 몸통이 배수로 입구를 통째로 덮었다.
이현은 뒤로 미끄러졌다.
회수형 마수의 집게가 그가 섰던 자리의 철판을 구겨 버렸다. 굵은 철근이 과자처럼 부러졌다.
사냥개형들은 대형 개체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들은 돌격하지 않고 양쪽을 지켰다. 이현은 자신에게 남은 공간이 마수의 배 밑 한 칸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턱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마스크의 필터에 닿았다. 이미 숨이 가쁜데 필터마저 젖으면 달아날 힘도 남지 않는다. 이현은 소매로 물기를 털어 내고 벽의 철근을 짚어 상체를 세웠다.
배수로 덮개는 반쯤 들려 있었다. 오래된 경첩 하나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산성비가 고여 검은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큰 마수의 앞다리 하나가 경첩 바로 옆을 디뎠다.
‘다리를 빼앗는다.’
이현은 권총으로 경첩의 접합부를 겨눴다. 빗물이 렌즈를 흘러내렸다. 손목이 떨려 총구가 조금씩 흔들렸다.
탕!
푸른 탄환이 경첩을 깨뜨렸다. 덮개가 아래로 뒤집히며 마수의 앞다리를 물웅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반동에 손목이 꺾였다. 그는 빈손으로 몸을 지탱하려다 구멍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권총을 놓칠 뻔한 손이 겨우 고리를 붙잡았다.
콰앙!
대형 마수의 몸통이 기울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뻗은 집게가 옆의 철제 벽을 움켜쥐었다. 몸통 양쪽 장갑판이 서로 비틀리며 으스러진 고정 볼트가 튀어나왔다.
드러난 틈은 손바닥 너비였다.
그 안에는 푸른 에테르 도선과 붉은 관이 함께 박혀 있었다. 관 속에서는 묽은 피 같은 것이 뛰었다. 이현은 단검 끝을 장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끼이이익!
톱니 마찰음과 다른 소리가 났다. 누군가 목이 상한 채 비명을 삼키는 듯한 소리였다.
이현의 손이 멎었다.
마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측면 집게가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몸을 낮췄으나 집게의 끝이 필터 마스크를 긁었다. 마스크 옆 고리가 끊어지며 찬 공기가 틈으로 스몄다.
이현은 반사적으로 고리를 잡고 몸을 굴렸다. 무릎이 빗물 속의 돌에 부딪혔다. 머리 위로 쇳덩이가 지나가고 있던 고철 더미를 으깼다.
끊어진 고리는 다시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마스크를 뺨에 밀착한 채 왼손으로 눌렀다. 이제 단검과 권총을 동시에 쓸 수 없었다.
깨진 장갑에서 붉은 관이 하나 더 흘러나왔다. 인간의 목에 꽂히는 호흡관과 비슷한 굵기였다. 관 끝에는 하얀 뼈가 매달려 있었다.
‘기계 속에 넣은 건가.’
그는 다시 장갑을 보았다. 검은 철판 안쪽에 접힌 이송 고리의 글씨가 비를 맞아 드러났다.
[제17 보관동 / 생체 자재]
그 아래에는 손으로 뜯긴 듯한 작은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대형 마수의 몸이 한번 크게 떨렸다.
빠진 앞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자 몸통의 찢긴 장갑이 더 벌어졌다. 부품처럼 배열된 것은 피스톤만이 아니었다.
머리였다.
사람의 턱과 한쪽 뺨이 금속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꺼풀이 벗겨진 눈은 앞을 보지 못했다. 뒤통수에서는 케이블이 목뼈를 따라 이어졌다.
그가 관에서 떼어 낸 호흡관 자국과 같은 둥근 상처가 그 턱 아래에 있었다.
번호판이 마침내 펼쳐졌다.
[개체 226-41 / 뇌파 동조율 0.0% / 하부 가공]
이현은 숫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884-12가 시체로 컨베이어에 떨어지던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그 벨트가 닿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이제는 의심할 수 없었다.
가상 낙원의 관리자였을 때 그에게 인간은 숫자로 먼저 도착했다. 삭제를 막겠다고 붙잡았던 로그에도 번호가 있었고 보관동의 관에도 번호가 있었다. 지금 눈앞의 숫자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붙어 있었다.
사람의 뼈를 구동축에 묶고 피와 신경을 도선처럼 끌어 쓴다. 낙원에서 쓰고 남은 몸을 지상의 사냥개로 보낸다.
기계의 센서가 다시 붉어졌다. 얼굴의 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현은 열린 장갑 틈에서 이송 고리를 잡아당겼다. 금속 고리가 사람의 목 뒤에 달린 것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고리는 척추를 묶은 받침대에 박혀 있었고 잡아당기는 순간 얼굴이 함께 흔들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리에서 작은 번호판만 뜯어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이현의 손이 한순간 흔들렸다.
“미안하다.”
그 말에 대답할 사람은 남지 않았다. 마수의 남은 집게가 그를 향해 돌아왔다. 뒤에 선 사냥개형들도 배수로를 막으려고 벌어졌다.
이현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장갑 바깥의 회로에 단검을 갖다 댔다. 안쪽의 사람을 찌르지 않고 움직임만 끊으려면 도선이 합쳐지는 자리 하나를 태워야 했다.
손등의 원형 문양이 푸르게 일렁였다. 그는 남아 있는 감각을 단검에 집중했다.
파지직!
단검의 방전날이 외부 회로에 박혔다. 부서진 다리와 나머지 다리에 흐르던 에테르가 한곳으로 몰렸다. 회수형 마수의 몸통이 요동쳤다.
통증이 이현의 손목까지 거슬러 올랐다. 코트 소매 아래 피부에서 탄내가 났다. 손을 놓고 싶었으나 아직 도선 하나가 살아 있었다.
마수의 집게 끝이 그의 발목에서 손가락 두 마디 거리까지 왔다. 그는 몸을 빼지 않았다. 도선을 절반만 태우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 사이에는 입구로 들어갈 틈이 없었다.
“멈춰.”
마지막 푸른 불꽃이 튀었다.
대형 마수의 다리가 꺾이며 배수로 입구와 사냥개형 무리 사이에 쓰러졌다. 집게가 바닥을 긁었으나 더는 몸을 끌지 못했다.
이현은 단검을 뽑았다. 칼날의 고주파 떨림이 불규칙하게 꺼졌다 켜졌다. 손가락에도 감각이 없었다.
뒤편에서 사냥개형 한 기가 쓰러진 몸통을 뛰어넘었다.
이현은 배수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검은 물이 장화 안으로 찼다.
등 뒤에서 쓰러진 회수형 마수의 다리가 마지막으로 철판을 두드렸다. 이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몸속에서 들렸던 비명이 머릿속에서는 아직 멎지 않았다.
배수로는 낮았다. 등을 펼 수 없어 팔꿈치로 몸을 끌어야 했다. 갈비뼈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숨이 끊겼다.
뒤에서 발톱이 배수로 입구의 쇠 테두리를 긁었다. 덩치 큰 마수는 못 들어왔지만 작은 정찰형의 머리는 철판 사이로 들이밀 수 있었다. 붉은 광선이 이현의 등 뒤를 훑었다.
그는 마스크의 끊어진 고리를 한 손으로 눌렀다. 필터 가장자리로 새어 들어오는 공기에서 금속성 단맛이 났다. 기침을 하면 위치가 드러날 것 같아 혀를 깨물었다.
통로는 멀지 않았다. 무너진 도로의 반대편으로 둥근 빛이 보였다. 그러나 출구에 다다르자 이현은 움직임을 멈췄다.
빛 너머에서 또 다른 붉은 점들이 켜졌다.
앞에도 마수가 있었다. 뒤의 발톱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는 탄 수를 확인하려고 권총의 손잡이를 더듬었지만 손이 저려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현은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등을 벽에 붙였다. 손끝이 코트 안주머니의 모서리에 닿았다. 부서진 장갑에서 직접 뜯어 낸 작은 번호판이었다.
226-41.
낙원의 누구였는지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그 번호의 주인이 마지막에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알았다.
출구 쪽 안광들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수의 다리와 빗물에 젖은 잔해뿐이었다. 먼저 소리가 났다. 쇳덩이를 길게 끌어당겼다가 놓는 듯한 낮고 둔탁한 진동이었다. 마수들이 고개를 돌린 쪽은 아담 메인 타워가 아니었다.
두꺼운 포성이 폐허 바깥에서 터졌다.
쾅!
배수로 바깥의 마수 하나가 옆으로 뒤집히며 콘크리트 조각이 통로 안까지 날아들었다. 이현은 머리를 감싸며 물속에 엎드렸다.
포탄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붉은 안광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저린 손으로 권총을 쥐고 출구를 겨눴다.
그때 무너진 콘크리트 너머에서 두 번째 포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