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마수, 말로 합시다!

11화: 봉인 아래로
새벽부터 공사장 입구에는 카메라가 줄지어 서 있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장 공사 현장에서 대형 토룡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 지역 뉴스의 단골 소재가 됐다. 화면 속 자막은 마수의 이름보다 ‘공사 지연 피해 수십억’이라는 문구를 더 크게 띄웠다.
유진우는 임시 상황실 모니터를 보다가 혀를 찼다.
"굴각이 새끼를 구한 이야기는 한 줄도 없네요. 사람도 다치지 않았고요."
신아린은 책상 위 조사 허가서를 뒤집었다. 문서 첫 줄에는 ‘지반 침하 가능 구간에 대한 긴급 안전 조사’라고 적혀 있었다.
박은채가 태블릿을 돌려 보였다. 밤새 분석한 파형이 화면 위에서 붉은 선으로 솟아 있었다.
"공명은 굴각의 둥지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수직으로 올라온 뒤 벽이 드러난 지점에서 한 번 꺾였어요. 자연 지반에서 나올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박은채가 씁쓸하게 웃었다.
"본청에서 확정되지 않은 표현은 빼라고 반려했습니다."
상황실 문이 열리며 오세만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책임 분담서가 들려 있었다.
"관리국과 협의한 결과 오늘 정오부터 상부 공사를 재개합니다. 조사 구간만 따로 표시할 겁니다."
신아린이 허가서를 내려다봤다.
"재개 근거는요?"
"토룡 둥지의 안전이 확보됐고 마수도 비공격 협약을 받아들였습니다. 지하 벽은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지반 이상입니다."
오세만은 서류 한 장을 진우 앞에 밀었다.
"조사 중 발생하는 붕괴와 공사 지연은 조사 요청자 측이 책임진다는 내용입니다. 진우 씨가 비공식 발언으로 작업을 막은 부분도 확인해야 하고요."
진우는 문서의 한 줄을 읽었다.
‘비공식 통역인의 판단에 따른 작업 중단.’
그때 주머니 속 지맥석이 얼음처럼 식었다.
쿵…….
진우의 귀 안쪽으로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아직 닫혀 있다. 아래로 내려오면 네가 고를 수 있다.]
"무슨 소리입니까?"
신아린이 즉시 물었다.
"벽 안쪽에서 말합니다."
오세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또 마수의 포효입니까? 굴각은 둥지에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마수의 소리가 아닙니다."
진우는 책임 분담서를 오세만에게 돌려줬다.
"지금부터 제한 탐사를 하겠습니다. 폭약과 천공기는 전부 반출하세요. 승인된 인원만 들어가고 영상 기록은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럴 권한이 진우 씨에게 있습니까?"
신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S급 현장 안전 책임자인 제가 승인합니다. 이 구간을 다시 건드리는 장비는 압수하겠습니다."
오세만의 얼굴이 굳었다.
"공사를 막으면 손실이 발생합니다."
"사람을 묻고 나서 손실을 계산하는 것보다 쌉니다."
진우는 박은채의 파형을 가리켰다.
"제한 시간은 사십 분입니다. 구조물 상태와 하강 통로의 안전성만 확인하고 돌아오죠. 대신 자연 지반 이상으로 결론 내리지 마세요. 다른 공명이 확인되면 그것도 기록해야 합니다."
상황실 밖에서 거대한 흙덩이가 차단선 앞에 멈췄다. 굴각이 머리를 내밀고 통로 아래의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들만 내려가면 또 쇳소리를 낼 것이다.]
진우는 확성기를 들었다.
"쇳소리는 금지했습니다. 길을 알려 주면 장비도 멈추게 하겠습니다."
[내 새끼들은 두고 가지 않는다.]
"통로 입구와 안전한 발판만 알려 주세요. 새끼들은 둥지에서 지켜야 합니다."
굴각은 한참 진우를 내려다보다가 앞발로 바닥을 두 번 긁었다.
[내가 먼저 울림을 듣겠다. 네가 멈추라고 하면 멈춘다.]
"그 약속으로 충분합니다."
신아린이 검집의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계약상 통역사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돈이 걸린 약속은 잘 기억하는군요."
굴각이 낮게 울자 지하에서 세 번의 진동이 돌아왔다.
쿵. 쿵. 쿵.
[첫 번째는 물이 없는 돌. 두 번째는 사람의 발을 삼키는 틈. 세 번째는 그 아래의 벽이다.]
"세 번째까지 가겠습니다."
[세 번째 뒤는 가지 마라.]
임시 환기 갱도는 굴착선 가장자리의 낡은 콘크리트 계단과 이어져 있었다.
백여 미터 아래부터 조명선이 끊겼고 무전기는 잡음만 흘렸다.
지맥석이 차가워질 때마다 벽 어딘가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오른쪽으로 두 걸음만 옮기세요."
신아린이 멈춘 순간 박은채의 조사봉이 바닥을 뚫고 사라졌다. 얇은 흙 아래에 사람 하나를 삼킬 만큼 깊은 빈틈이 있었다.
신아린은 검기를 가느다랗게 뽑아 양쪽 벽에 박았다. 푸른 칼날이 임시 난간이 됐다.
"이걸 밟고 건너세요."
진우가 검기를 밟자 발바닥 아래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신아린은 손목을 고정해 칼날을 붙잡았다.
"검이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벽면에 희미한 푸른 선이 켜졌다. 선들은 진우의 망막에 자막이 나타날 때와 같은 박자로 맥동했다.
박은채가 손전등을 가까이 비췄다.
"문양입니까?"
"제 눈에는 글자처럼 보이는데 읽히지는 않습니다."
진우가 손을 뻗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칼은 선 밖에 세워라. 아직 문턱은 아니다.]
"뭐라고 합니까?"
"검을 선 옆에 세워 달랍니다."
신아린은 검집을 푸른 선 옆에 세웠다. 지하의 파동이 한 번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진우의 지맥석 표면에도 선 하나가 나타났다. 선은 아래로 뻗다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굴각이 위쪽에서 짧게 울었다.
[둘 다 길이다. 하나는 잠든 곳으로 가고 하나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
"어느 쪽이 벽으로 이어집니까?"
[차가운 쪽. 하지만 그곳에서 내 새끼 냄새가 끊긴다.]
신아린이 진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리해서 내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 내려가야 합니다."
진우는 차가운 선을 골랐다. 굴각은 더 내려오지 않았다.
[작은 혀.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인간들을 다시 믿지 않겠다.]
"돌아가 있어. 새끼들을 지켜."
차가운 선의 끝에는 사람 둘이 겨우 들어갈 만한 석실이 있었다.
바닥과 천장은 자연 암반이 아니었다. 매끈한 회색 면이 서로 맞물려 있었고 벽 중앙의 세로 틈만이 다른 색을 띠었다.
푸른 문양이 동시에 켜졌다.
[곁에 선 칼이 왔다.]
신아린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검을 대라는 겁니까?"
"아직은 선 밖에 세워 두랍니다."
"그럼 함정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대지 마세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벽 안쪽의 파동이 낮게 떨렸다.
[너는 질문을 두 개 들고 왔다.]
진우의 시야가 흔들렸다. 파란 자막 아래에 두 문장이 겹쳐 나타났다.
[왜 네가 듣는가.]
[이 벽이 무엇을 붙드는가.]
신아린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질문 하나에만 답하겠답니다."
진우는 자신의 능력이 생긴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벽 아래에는 굴각의 둥지가 있었고 공사장은 바로 위에 있었다. 통로가 무엇을 향하는지 모른 채 다시 장비를 들이면 사람과 마수가 함께 위험해진다.
진우는 숨을 고르고 물었다.
"이 벽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석실 전체의 공기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너지는 쪽이다.]
"무너지는 쪽?"
[하늘이 내려앉은 곳. 땅이 갈라진 곳. 발 디딜 곳을 찾아 넘어오는 것들이 있는 곳.]
신아린의 눈이 진우에게 향했다.
"무슨 말입니까?"
"저편의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답니다. 이 벽은 그쪽과 이쪽이 맞닿는 틈을 붙들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문을 지키는 자가 아니다. 문이 한꺼번에 열리지 않도록 무게를 나누는 자다.]
진우의 관자놀이가 뜨거워졌다. 자막 일부가 깨졌다.
[넘어오는 것들이 모두 적은 것은 아니다. 굶주린 것은 칼보다 먼저 집을 찾는다.]
마수가 이 땅에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통로를 열면 무엇이 나옵니까?"
[그 질문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왜요?"
[너는 듣는 자다. 문을 여는 자가 아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가장 궁금한 답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원을 묻고 싶다면 더 아래로 와라. 곁의 칼이 문턱을 건너고 네가 혼자 오지 않을 때.]
신아린이 검을 세웠다.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문턱에 검을 대라고 합니다."
"함정인지 확인한 다음에 하죠."
진우가 대답하려는 순간 석실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세로 틈 아래에서 푸른 먼지가 솟구쳤다. 지맥석이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너무 오래 열렸다. 돌아가라.]
"이번에는 묻지 말고 뛰세요!"
신아린이 진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돌아가는 길의 바닥이 먼저 내려앉았다.
신아린의 검기가 발밑을 받쳤다. 푸른 칼날 두 줄이 균열 아래로 박히며 임시 지지대가 됐다.
"왼쪽 계단은 끊겼습니다. 오른쪽으로 갑니다."
진우가 방향을 틀자 무전기에서 박은채의 목소리가 끊겨 들어왔다.
"공명이 굴각 둥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진우는 확성기를 켰다.
"굴각! 물소리가 들리면 새끼들을 오른쪽 굴로 옮겨! 왼쪽 벽은 건드리지 마!"
[내 새끼를 겁주지 마라! 네가 말한 대로 하겠다!]
천장이 갈라지며 돌덩이가 쏟아졌다. 신아린은 검기를 넓혀 진우의 머리 위를 막았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경호 계약에 제가 먼저 도망치는 조항은 없습니다."
"보호 대상이 죽으면 계약금도 못 받습니다. 뛰세요."
진우는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발판을 밟는 순간 신아린이 몸을 굴려 빠져나왔고 천장 일부가 그 자리를 덮쳤다.
콰앙!
지상으로 끌려 올라온 진우는 흙먼지를 털었다. 신아린도 검집을 끌어안은 채 무릎을 세웠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검이 조금 긁혔습니다."
칼날에는 벽의 문양과 닮은 푸른 금이 생겨 있었다. 진우가 지맥석을 꺼내자 차가운 선이 검을 향해 길게 뻗었다.
오세만은 무너진 갱도를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건 탐사 중 발생한 붕괴입니다. 조사 기록에는 그렇게 남기겠습니다."
박은채가 저장된 파형을 내밀었다.
"천공기 전원을 내린 뒤에도 공명은 계속됐습니다. 자연 지반 이상으로만 적으면 자료와 맞지 않습니다."
진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확인되지 않은 존재가 하강 통로의 개방을 경고했다고 쓰세요. 녹음되지 않았다고 없던 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신아린이 차단선을 한 겹 더 둘렀다.
"공사 중단 기간은 사흘입니다. 자료와 안전 검토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박은채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긴급 통역 자문료와 위험 수당은 별도로 정산하겠습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하에서 올라온 목소리에 더 신경이 쓰였다.
[다음에는 혼자 오지 마라. 칼을 문턱에 대고 네가 듣는 것을 끝까지 들어라.]
진우의 망막에 푸른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평소처럼 한국어로 바뀌지 않았다.
[해석 불가: 낯선 세 음절]
문양이 사라지자 신아린의 검날이 잠깐 푸르게 빛났다.
"신 팀장님. 다음 탐사는 경호 계약서에 넣어야겠습니다."
"무슨 조항입니까?"
"문턱을 넘을 때 검을 빌리는 조항이요."
신아린은 푸른 금이 간 칼날을 내려다봤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같이 갑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대답처럼 낮은 진동이 한 번 올라왔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