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그림자 배달꾼

3화: 형의 빚을 산 무인
해가 지기 전, 진호와 월령은 대나무 골짜기 끝에서 형 진석을 발견했다. 그는 다리 밑에 앉아 오른손으로 무릎을 누르고 있었다. 발목에는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
“그 끈은 누가 묶었어?” 진호가 물었다.
“채권자.”
“빚을 갚으러 왔어?”
“널 말리러 왔지.”
진석은 문서를 보지 않았다. 동생의 오른쪽 무릎만 봤다. “그 다리로 내리막을 달리면 다시 못 걷는다.”
“그럼 형이 앞장서면 되잖아.”
“나는 길을 잘못 들었어.”
월령이 근처의 발자국을 확인했다. “다섯 번째 사람은 어디 있지?”
“곧 올 거야.”
“누구?”
“내 빚을 산 사람.”
골짜기 맞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검은 망토를 입은 묵산이 대나무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말을 타지 않았다. 길이 좁아 말이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리에는 푸른 칼집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백진호, 봉인을 넘기면 형의 빚을 없애 주겠다.”
“왜 문서가 필요하죠?”
“왜 형의 빚을 사들였습니까?”
“처음 채권자는 진석을 표국의 짐꾼으로 팔려고 했어. 그 계약은 사람을 담보로 삼는 조항까지 붙어 있었지.” 묵산은 소매에서 낡은 영수증을 꺼냈다. “내가 빚을 사서 그 조항은 없앴다. 빚 자체는 남겼고.”
진석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네가 원하면.”
“원하지 않아.”
“좋아. 그럼 거래로만 남겨 두자.”
묵산은 영수증을 진호에게 건넸다. 금액은 도박판에서 빌린 원금과 같았지만, 채권 이전 수수료가 따로 적혀 있었다. 이자가 붙기 전의 기록이었다. 진호는 그가 채무자를 괴롭히려 빚을 산 게 아니라, 다른 채권자가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다고 형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이 문서를 받으면 형을 풀어 준다고 했죠. 형이 직접 갚게 하겠다는 건가요?”
“그건 진석이 정할 일이다. 나는 봉투를 원하는 이유를 설명할 의무가 없지만, 적어도 너희를 다시 담보로 잡지는 않겠다.”
진호는 영수증을 돌려줬다. “설명은 믿음이 아니에요. 이 기록은 월령 선배와 표국에도 보여 주세요.”
묵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영수증을 접었다. “좋다. 거래 상대가 늘면 내 선택에도 책임이 생기겠지.”
“빚을 산 사람에게 그 문서가 있으면 다음 약속을 잡을 수 있어.”
“그 문서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지시라면요?”
“전쟁을 막는 건 문서가 아니라, 누가 칼을 뽑느냐에 달렸지.”
진석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빚을 졌어. 네가 대신 갚을 일은 아니야.”
“형이 표국패를 남겨 놔서 내가 여기까지 왔어.”
“그건 네가 쫓아오지 말라는 뜻이었어.”
“그런데 표식은 남겼잖아.”
진석은 대나무 잎을 하나 꺾어 손가락 사이에서 찢었다.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뒤, 네 이름을 담보로 적었어. 월령 선배가 그걸 막으려 보증을 섰고. 그 빚이 팔렸다는 건 나도 어제 알았어.”
월령의 얼굴이 굳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네가 대신 갚을까 봐.”
“이미 보증인인데.”
“그래서 더 말 못 했어.”
진호는 형을 보았다. “그럼 봉인 문서에 형의 이름이 왜 들어가 있지?”
“문서가 우리 집으로 배달되기로 했어. 나는 수취인이 아니야. 발신자가 옛 표국장에게 보내는 길 지시를 내게 맡겼지.”
“불탄 배달처는 누가 태웠어?”
진석은 묵산을 바라봤다. “내가 불을 냈어.”
월령이 칼을 뽑았다. “왜?”
“사람들이 문서에 적힌 주소를 따라오고 있었어. 집에 사는 사람을 빼내려면 불을 내서 비우는 수밖에 없었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남문으로 갔어. 하지만 네가 오면 안 된다고 한 건 맞아. 봉투를 가진 사람을 따라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진호는 주머니의 배달표를 꺼냈다. “답장은 ‘형은 오지 말라’고 했어. 수취인이 형을 걱정한 거야.”
“그 사람은 내가 오면 다시 사라질 거야.”
“그럼 찾아갈지 말지는 그 사람이 정해야지.”
묵산은 가볍게 웃었다. “형제끼리 서로 보호하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상대에게 묻지 않는군.”
진호는 봉투를 들어 올렸다. “봉인은 못 드립니다.”
“그럼 진석의 빚은 그대로야.”
“형이 직접 갚을 겁니다.”
“그가 가진 돈은?”
“모릅니다.”
“네가 대신할 수 있잖아.”
“저는 대신하지 않겠습니다.”
진석이 고개를 들었다. “진호야.”
“형의 빚을 없애 주겠다는 조건으로 다른 사람의 문서를 내놓지 않을 거야. 형이 원한다면 자기 이름으로 다시 약속해.”
진석은 오래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낡은 표국패를 꺼내 묵산에게 던졌다. “이 표국패를 담보로 잡아. 그리고 내가 배달을 끝낼 때까지 따라와.”
“그건 계약이 아니야.” 월령이 말했다.
“이제 계약을 쓸 거야. 내 이름으로.”
묵산은 표국패를 받지 않았다. 패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허리를 굽혀 줍지 않았다. “빚은 이미 내가 샀다. 담보를 바꾸려면 값을 치러야 해.”
“얼마를 원해?”
“네 동생이 가진 봉인 문서.”
진석은 진호를 보았다. “내가 대신 받으면 안 돼?”
“그건 형이 선택할 일이 아니야.” 진호가 말했다. “이 문서를 받을 사람도 있어.”
“그러면 네가 계속 쫓기겠지.”
“그걸 알면서도 배달하는 거야.”
묵산이 손을 뻗었다. 대나무 숲 양쪽에서 네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호는 발자국을 세었다. 다섯. 한 명은 뒤에서 길을 막고, 둘은 좁은 다리 쪽으로 움직였다.
“선배, 왼쪽 둘. 형은 오른쪽으로 돌아요.”
월령은 바로 움직였다. 진석도 표국패를 주워 진호의 반대쪽으로 뛰었다. 무인들은 봉투를 노리며 두 형제를 갈라놓으려 했다. 좁은 대나무 다리 위에서 진호는 무릎을 굽혔다. 한 명이 칼을 내리쳤다. 그는 대나무 줄기를 밟아 몸을 낮추고, 상대의 손목을 배달 가방 끈으로 감았다.
매듭을 당기자 사내의 칼이 다리 난간에 부딪혔다. 진호는 손목을 꺾지 않고 끈을 놓았다. 그 틈에 두 번째 무인이 봉투를 낚아챘다. 진석이 몸을 던져 그의 허리를 붙잡았지만, 다리 밑으로 함께 미끄러졌다. 진호는 가방을 벗어 난간에 걸고 형의 옷깃을 잡았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만 버티고 있었다.
“가방부터 챙겨!” 진석이 소리쳤다.
“형부터 잡을 거야!”
월령이 옆에서 팔을 뻗어 둘을 끌어올렸다. 봉투는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진호는 난간에 가방 끈을 매듭지어 봉투가 다시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도망치던 무인은 나무다리 끝에서 멈춰 서서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싸울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더는 앞으로 오지 않았다.
진호는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가고 싶으면 가요. 대신 뒤따르는 사람에게 여기서 문서는 못 가져갔다고 전하세요.”
사내는 믿지 못하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칼을 챙겼다. 도망치는 발자국은 좁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숲 바깥으로 향했다.
진석은 다른 무인의 칼집을 쳐 손에서 떼어냈다. 오래전 표국에서 배운 동작이었다. 형은 여전히 빠르지 않았지만, 동생의 발걸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빈틈을 막으며 다리 건너편으로 물러났다.
묵산은 칼을 뽑지 않았다. “네가 형을 믿는구나.”
“아니요. 형이 지금 무엇을 할지 지켜보는 겁니다.”
다리 건너편에서 진호는 가방 끈을 풀었다. 형은 무릎을 눌러 가방을 받아 들려 했지만, 동생이 먼저 끈을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
“예전에는 네가 먼저 내 손에서 짐을 빼앗아 갔어.”
“형이 떨어뜨리니까.”
“이번엔 네가 놓을 때까지 기다렸어.”
“내가 형한테 넘긴 건 아니야. 네가 들겠다고 했잖아.”
진석은 가방을 받아 어깨에 걸었다. “그래. 그 차이는 기억할게.”
진석은 다리를 건너다 멈췄다. “나는 도박판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번 배달을 돕고 빚을 갚겠다. 월령 선배의 보증도 내가 풀어.”
월령은 그 말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말로는 부족해.”
진석은 표국패를 자기 손바닥에 올렸다. 패의 모서리를 칼로 긁어 이름을 다시 새겼다. “그럼 내가 책임질 일을 적어 둘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 표국패는 네가 돌아와야 쓸 수 있어.”
“그래서 돌아올게.”
무인들이 물러났지만 묵산은 골짜기에 남았다. 그는 바닥의 표국패를 주워 진석에게 돌려줬다. “빚을 없애진 않겠다. 대신 원래 계약서의 이자 계산을 다시 하겠다. 네가 배달을 마치면 재협상하지.”
“왜요?” 진호가 물었다.
“문서를 갖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나도 확인해야 하니까.”
묵산은 돌아서며 덧붙였다. “내가 그 문서의 수취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가 떠난 뒤 진석은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호는 잡지 않았다. 대신 배달 가방의 끈을 형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형이 들어.”
“무거워.”
“그래야 제대로 걷지.”
진석은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다친 무릎을 절뚝이며 월령 뒤를 따랐다. 진호는 봉투의 접힌 모서리를 확인했다. 봉인은 그대로였지만, 그늘 속에서 새 글씨 하나가 나타났다.
‘수취인은 월죽재에 없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라.’
진호는 강 상류를 바라봤다. 형의 빚을 산 무인은 떠났지만, 봉투가 가리키는 다음 길은 더 멀어졌다. 진호는 강가에 남은 짚신 자국을 살폈다. 이번엔 다섯 사람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