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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사고 현장에 산재조사관이 왔다2화

각성 사고 현장에 산재조사관이 왔다

각성 사고 현장에 산재조사관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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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라진 접지선

다음 날 아침, 우람은 사고 현장의 전원을 끊은 상태로 설비를 다시 살폈다. 지하 자재실에서 발견된 새 접지선은 아직 상자에 봉인되어 있었다. 포장 날짜가 사고보다 뒤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조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납품 업체의 출력 오류일 수도, 창고 담당자의 잘못된 분류일 수도 있었다.

그는 상자 겉면과 봉인 테이프, 재고 번호를 각각 촬영했다. 현장 기사 이태식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거 신품 맞습니다. 내가 교체 요청했으니까 들어온 거겠죠.”

“요청 날짜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시스템에 남아 있을 겁니다.”

“사고 전에도요?”

태식은 그 질문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우람은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지하실을 열어 달라고 했다. 접지선이 보관됐던 선반에는 먼지가 반듯하게 쓸려 있었다. 상자를 놓았던 자국은 바닥의 먼지와 달리 네모가 또렷했다. 누군가 최근에 상자를 옮겼다.

태식은 계단을 내려가다 한 번 멈췄다. “접지선이 없어도 설비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부산물이 밀리면 게이트 안정화가 늦어져요.”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제가 판단했습니다.”

“그럼 이유도 직접 설명해 주세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말고요.”

태식은 턱을 당겼다. 그는 부품을 요청했지만 승인까지 사흘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동안 임시 절연재를 덧대면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계산했다. 원래는 정비 기사 둘이 함께 확인해야 했지만, 인원이 하나 줄어든 뒤 혼자 작업했다. 임시 조치가 며칠이나 유지됐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안 납니까, 말하기 싫은 겁니까?”

“둘 다일 수 있습니다.”

태식의 답에 우람은 펜을 멈췄다. 그는 솔직한 무지를 받아 적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을 확정된 날짜로 바꾸면, 그날 현장에 없던 사람까지 책임질 수 있었다.

안전반장 미정은 교대표 원본을 찾아 왔다. 사고 전날 야간조의 인계 서명은 오후 8시 40분에 끝나 있었다. 하지만 낮조 시작은 오전 9시라고 기록돼 있었다. 출근 기록을 겹쳐 보니 실제로는 작업자들이 오전 8시 35분부터 장비를 돌렸다. 길드의 생산량 집계가 새벽 첫 물량을 그날 실적으로 포함하면서 비공식 조기 가동이 굳어졌다.

“누가 이걸 바꾸라고 했습니까?” 우람이 물었다.

“아무도 종이에 쓰지 않았어요. 자재차가 먼저 와 있고, 본부에서 실적 전광판을 켜면 다들 알아서 움직였죠.”

“말로 지시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선택이 자유로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기 가동을 막으려 했지만, 계약 조가 늦게 출발하면 다음 달 배정에서 빠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안전반장으로서 작업중지를 선언할 수 있었지만, 생산량이 밀릴 때마다 현장 인원에게 책임을 돌리는 분위기였다.

우람은 취소된 정비 요청을 찾기 위해 기록실에 갔다. 길드 사고대응실 변호사 오세린이 동행했다. 그녀는 시스템 로그를 열어 보며 정비 요청 번호를 읽었다. 접지선 교체 신청은 사고 나흘 전 작성됐고, 사고 이틀 전 ‘부품 미입고로 보류’ 처리됐다. 처리자는 장비팀 공용 계정이었다.

“누가 로그인했는지는요?”

“공용 계정이라 개인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로그인 단말기 위치는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세린은 화면을 넘겼다. 기록에는 지하 수리실 터미널이 찍혀 있었다. 폐쇄된 뒤에도 전원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수리실은 언제 폐쇄됐죠?”

“지난달 말입니다.”

“그럼 사고 이틀 전 요청은 폐쇄된 장소에서 처리됐군요.”

세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운영팀이 서버를 옮기면서 단말기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확인 전까지는 기록이 기록인 채 남아야 했다. 우람은 서버 이관 내역과 장비 반출 목록도 함께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린은 처음으로 직접 이의를 제기했다.

“요청 범위가 넓습니다. 모든 기록을 가져가면 작업자 개인정보까지 포함됩니다.”

“그럼 관련된 시간대와 설비 번호만 추려서 보존하겠습니다. 필요한 범위만 요청하죠.”

그는 전체 로그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컨베이어 번호와 정비 요청 번호, 계정 접속 시각을 특정해 문서로 제출했다. 세린은 한숨을 내쉬고 보존 확인서에 서명했다.

점심 무렵, 도윤이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손은 움직였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미정에게 먼저 다가가 “제가 센서를 만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람은 그의 진술을 끊지 않았다.

도윤은 며칠 전부터 경고등이 켜질 때마다 버튼을 눌러 초기화했다고 했다. 정비팀에 말하자 일시적인 잔류파라고 들었다. 그는 처음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사고 전날 경고등이 켜졌을 때 태식이 센서 덮개를 열고 선을 손으로 밀어 넣는 것을 봤다.

태식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단자를 고정한 겁니다. 위험한 작업은 아니었어요.”

“경고등이 왜 계속 떴는지는 모릅니까?” 우람이 물었다.

“접지선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죠. 부품이 없어서 우회한 건 맞습니다.”

“그럼 왜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태식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정식으로 쓰면 라인을 멈춰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조가 계약을 잃을까 봐.”

도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신고했어도 달라졌을까요?”

“그걸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미정이 말했다.

“그런데 제가 센서를 눌렀잖아요.”

우람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작동을 재현해 볼 겁니다.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요. 사고 당시 버튼을 누른 순서가 왜 역회전을 일으켰는지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기술팀은 손상된 센서를 분리해 시험대에 올렸다. 새 접지선을 연결하고 잔류파를 흉내 낸 신호를 넣자 표시등이 정상에서 경고로 바뀌었다. 하지만 센서를 한 번 초기화하면 기록이 지워졌다. 경고등이 사라진 동안에도 전류는 프레임을 타고 흘렀다. 낮은 진동음이 시험대 아래에서 울렸다.

도윤은 소리를 듣고 몸을 움츠렸다. “그 소리였어요. 사고 직전에 들은 거.”

태식이 손을 뻗어 전원을 끄려 했다. 우람이 그의 손목을 막았다. “기록부터요.”

기술자는 센서 로그를 저장한 뒤 전원을 차단했다. 프레임의 한쪽 모서리에서 희미한 청색이 번졌다. 잔류파가 접지 경로를 찾지 못하고 금속을 따라 이동한 자국이었다.

시험 뒤 미정은 사무실에서 비공식 조기 가동을 승인한 사실을 서면으로 제출했다. 손이 떨려 날짜를 두 번 틀렸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이걸 내면 제가 징계를 받을 거예요.”

“그럴 수 있습니다.” 우람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윤 씨가 사고 원인으로만 남는 것보다, 현장을 바꾸는 데 필요한 진술이 됩니다.”

미정은 종이를 봉투에 넣었다. “다음엔 누가 다치기 전에 멈출게요.”

세린은 사고대응실에서 연락해 길드가 교대표와 센서 로그를 외부에 제공하겠다고 했다. 단, 작업자 실명은 가려 달라고 요구했다. 우람은 개인정보 보호에는 동의하되, 책임자의 이름까지 지울 수는 없다고 답했다.

해가 진 뒤 그는 지하 수리실 문을 다시 확인했다. 폐쇄 스티커는 온전했지만, 도어 센서에는 최근 접근 기록이 남아 있었다. 접속 시각은 사고 전날 밤 11시 48분. 카드 소유자는 문태혁 장비팀장이었다.

우람은 기록을 인쇄해 봉투에 넣었다. 그때 등 뒤에서 태식이 말했다.

“팀장님은 수리실을 열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나온 부품은 접지선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 건 검은 절연판이었어요.”

“언제 봤습니까?”

“사고 전날. 그리고 그 판에는 부러진 센서 조각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태식은 그제야 자기가 숨긴 것을 꺼냈다. 접지선을 바꾼 사람과 센서를 손댄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었다. 우람은 새로운 진술을 따로 기록했다.

다음 날 아침, 작업장 게시판에는 ‘정상 점검 완료, 오전 교대부터 가동 재개’라는 공지가 붙었다. 서명란에는 우람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가 하지 않은 서명이었다.

우람은 게시판 앞에 사람을 모았다. “이 확인서는 제 서명이 아닙니다. 설비 점검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업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오늘 가동이 멈추면 계약 조의 일당이 지급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 운반원이 “그럼 오늘도 집에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우람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안전 확인은 몇 시간 더 걸릴 수 있었고, 임금 문제는 그가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가동은 보류합니다. 대신 이 확인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안에 밝히겠습니다. 작업을 멈춘 책임을 현장 인원에게 돌리지 않도록 길드에도 서면으로 요구하겠습니다.”

그는 확인서 원본을 떼어 내지 않았다. 게시판 전체와 고정핀, 주변 공지까지 촬영한 뒤, 세린에게 보존을 통보했다. 세린은 허위 서명은 사고대응실이 조사하겠지만, 우람이 게시판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훼손한 적 없습니다.” 우람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래서 원본을 그대로 둔 겁니다.”

세린은 잠시 침묵한 뒤, 작성 이력과 출력 단말기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길드의 공식 발표를 그대로 방어하던 때보다 말수가 줄어 있었다. 우람은 그녀가 편을 바꿨다고 여기지 않았다. 지금 확인해야 할 건 누구 편인지가 아니라, 누가 자기 이름을 빌려 설비를 다시 돌리려 했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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