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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8화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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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우물물의 단맛

초봄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아침이었다.

청운촌 복판의 공동 우물가에는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겨우내 바닥을 드러내던 우물 안쪽에서 제법 굵은 물소리가 찰랑거렸다.

“물 차오른 것 좀 보게!”

물지게를 내려놓던 배씨 노인이 탄성을 질렀다.

“어제 비탈에서 물길을 서쪽 골로 돌렸다더니 그 물이 땅 밑으로 스며든 모양이오. 흙탕물은 간데없고 물빛이 거울처럼 맑구려.”

“마을 밭이 다 떠내려가는 줄 알고 철렁했는데 하늘이 도왔어요.”

옆에 선 아낙의 말에 배씨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늘이 아니라 진 공이 도운 게지. 그 가파른 벼랑을 치고 올라가 바위를 쪼개지 않았나. 농투사니 손에서 그런 재주를 볼 줄은 몰랐소.”

우물가로 걸어오던 도겸의 발소리에 웅성거림이 멎었다. 주민들은 길을 비켜섰다. 시선 속에는 고마움과 함께 서늘한 경외가 깔려 있었다.

“진 공 오셨는가.”

촌장 강노인이 걸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손에는 삼베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어제 자네가 아니었으면 마을 밭은 농사를 망칠 뻔했네. 말려 둔 산나물과 굵은 소금일세. 부디 받게.”

거친 주름투성이 손에 들린 주머니는 이 산골에서 가벼운 물건이 아니었다.

“내 밭을 지키려 돌을 깼을 뿐이오.”

“자네 밭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살렸네.”

촌장이 주머니를 안겨 주자 도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두레박 물을 퍼 담은 배씨 노인이 단숨에 목을 축였다. 소매로 입을 훔친 노인의 눈이 커졌다.

“어라? 물맛이 왜 이래?”

“흙내라도 나시오?”

임씨가 묻자 배씨 노인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찌 이리 달고 시원한지 모르겠네. 꿀물을 탄 것처럼 혀에 감겨 기운이 솟구쳐. 한 모금 마셔 보게!”

임씨가 바가지를 넘겨받아 들이켰다.

“진짜네! 물이 차지다 못해 달아. 이런 단맛은 난생처음이오!”

“가뭄 뒤에 복이 터졌네!”

주민들이 다투어 물을 마시며 웃었다.

그러나 우물 한편에서 지켜보던 연화의 표정은 굳어 갔다. 연화는 다가가 두레박 물을 표주박에 따랐다. 겉으로 풍기는 냄새는 보통 지하수와 같았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머금었다.

혀끝을 타고 부드러운 단맛이 번졌다. 과실의 단맛과는 달랐다. 바위가 삭아 내린 떫은맛 밑에서 짙은 쇳내와 함께 끈적한 열기가 목구멍을 훑고 내려갔다.

‘어제 그 흙탕물의 뒷맛이야.’

비탈에서 손을 씻으며 느꼈던 엷은 단맛이었다. 서쪽 골로 돌린 물길이 밤새 지하 수맥을 타고 우물 바닥까지 스며든 것이 분명했다.

연화는 머금었던 물을 풀숲에 뱉었다. 호리병에 우물물을 채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르는 도겸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겸의 초가 마당은 고요했다.

도겸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왼쪽 어깨를 돌렸다. 바위를 깰 때 끌어올린 내력이 가슴의 흉터를 건드려 숨을 쉴 때마다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싸리문이 열리며 연화가 들어섰다. 호리병을 마루에 내려놓았다.

“마셔 봐요.”

도겸은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입술 안쪽에 문질렀다.

살수로 살아가며 독초를 감별하던 감각이 곤두섰다. 미세한 단맛이 혀를 마비시키듯 퍼지더니 혈관을 타고 가벼운 박동을 일으켰다.

“단맛 뒤에 쇳내가 섞여 있소.”

“맞아요. 사람들은 꿀물 같다지만 이건 약초의 독성이 응축되었을 때나 나는 기운이에요.”

연화가 낮게 읊조렸다.

“어제 서쪽 골로 돌린 물길이 지하 암반 틈을 타고 우물로 들어간 거예요.”

“지하 깊은 곳에 희귀한 광맥이 있거나 약수가 갇혀 있었을 수 있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과거에 비슷한 물을 본 적이 있소. 지친 몸을 억지로 깨우지만 과하게 마시면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물이오.”

혈우각 시절 살수들에게 먹이던 비약의 기운과 닮아 있었다. 기혈을 억지로 폭발시키는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었다.

그때 마당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연화 언니!”

소연이었다. 소연의 양손에는 넓적한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흙 위로 파란 싹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어제 건져 낸 조랑 보리 씨앗이에요!”

소연이 상자를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저녁에 우물물을 주고 창고에 두었거든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싹이 이렇게나 자랐어요! 사나흘은 걸려야 싹이 트는데 하룻밤 사이에 이만큼 자랐다고요!”

소연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잎은 놀라울 만큼 짙은 녹색이었다. 그러나 줄기는 지나치게 가늘었고 잎사귀 끝마다 붉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연화가 싹 하나를 뽑아 뿌리의 흙을 털었다.

“소연아 싹 밑을 보렴.”

소연이 고개를 숙여 손끝을 보았다. 잔뿌리는 하얗지 않았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끝부분은 검게 짓물러 있었다.

“어……? 왜 뿌리가 이래요?”

“줄기는 급하게 뻗었지만 뿌리가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물속에 든 거센 기운이 씨앗의 생명력을 한 번에 태워 버린 거야.”

연화가 뿌리를 누르자 힘없이 바스러졌다.

“지금은 푸르러 보여도 며칠 뒤면 잎부터 말라죽을 거야. 타들어 가는 중이란다.”

소연은 바스러진 뿌리를 보더니 상자를 끌어안았다.

“그럼 우물물이 나쁜 물이에요? 밭에 이 물을 주면 씨앗이 다 죽는 거예요?”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겸이 소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든 씨앗이 죽은 것은 아니다. 밭의 흙이 물을 걸러 내고 있으니 아직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이 물을 주면요?”

“계속 주지 않으면 된다.”

도겸의 단단한 음성에 소연의 눈동자가 안정을 찾았다.

연화가 호리병을 들고 일어섰다.

“서쪽 골짜기로 가 봐요. 물이 어디서 새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가자.”

도겸은 손도끼와 괭이를 챙겨 들었다.


서쪽 암반 골짜기는 인적이 드문 험지였다.

어제 쏟아부었던 급류는 거친 암벽을 타고 흘러내려 군데군데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물살은 잦아들었지만 바위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는 음산하게 울렸다.

도겸과 연화는 젖은 바위를 디디며 안쪽 암벽 아래로 다가갔다.

연화가 품에서 붉은 자초 뿌리를 짓이겨 만든 즙을 꺼냈다.

“물길을 볼 때 쓰는 즙이에요. 물에 타면 흙에 쉽게 흡수되지 않고 붉은 선을 남겨요.”

연화가 웅덩이에 붉은 즙을 떨어뜨렸다. 선명한 핏빛 줄기가 생겨나더니 암반 밑의 거대한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겸은 젖은 암반에 손바닥을 얹었다. 무흔수의 감각이 차가운 돌의 결을 훑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이 바위를 깎으며 흐르는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물이 바위 밑 갱도를 타고 공동 우물 밑바닥으로 닿고 있소.”

“역시 그랬군요.”

연화가 깨진 바위틈에 코를 댔다. 짙은 쇳내와 함께 달착지근한 냄새가 훅 끼쳤다.

“이 냄새…… 폐광 깊은 곳에서 나던 냄새예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이 있어요. 산 깊은 곳의 물은 사람의 목을 축이는 물이 아니라고요. 쇠와 돌의 독기를 품고 있어서 마셨다간 피가 끓어 몸이 망가진다고 하셨어요.”

“선친께서 수맥을 알고 계셨소?”

“폐광 근처 물줄기는 마을로 흘려보내선 안 된다며 남몰래 돌둑을 쌓곤 하셨죠. 그런데 관부에서 광산을 파헤쳤고 아버지는 그걸 막으려다가…….”

연화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도겸은 암반 틈새를 응시했다. 폐광 안쪽에서 누군가 굴을 파고 수맥을 건드려 희귀한 광물성 약수를 끌어내고 있었다. 비탈의 둑을 터뜨린 자들은 그 작업을 감추려다 사단을 낸 것이다.

“당장 우물을 막으면 안 돼요? 저 물을 계속 마시면 배씨 어르신도 다른 사람들도 열독이 쌓일 거예요.”

“지금 우물을 막으면 혼란만 커지오.”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가뭄으로 메말랐던 우물이오. 사람들은 물맛이 달아졌다며 기뻐하고 있소. 증거도 없이 마시지 말라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거요.”

“그럼 어쩌죠?”

“걸러 내야 하오.”

도겸은 손도끼로 바위를 툭 쳤다.

“우물 밑바닥 용천구에 틀을 짜 넣을 거요. 참숯과 자갈, 고운 모래, 불에 볶은 왕겨를 층층이 쌓아 물길을 통과시키면 거친 광물 가루는 대부분 가라앉소.”

“숯이 이 독기까지 잡을 수 있을까요?”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당장 기혈을 해치지 못하도록 기운을 둔하게 만들 수는 있소. 그 틈에 서쪽 수맥의 근원을 찾아 막아야 하오.”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를 흡수하는 황련과 감초가 있어요. 물에 오래 닿아도 잘 삭지 않는 약재들을 엮어 틀에 끼워 넣으면 쇳내를 가라앉힐 수 있을 거예요.”

“해가 지면 움직이겠소. 낮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오.”

“소연이에게는 비밀로 해요. 알면 또 혼자 밭을 지키겠다고 잠도 안 잘 테니까요.”

“그러는 게 좋겠소.”

두 사람은 서둘러 골짜기를 내려왔다.


밤이 깊어지자 마을의 불빛이 꺼졌다.

자정 무렵 도겸은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당에는 낮에 준비해 둔 참숯 세 자루와 굵은 자갈, 고운 모래가 쌓여 있었다. 연화는 약재 냄새가 밴 마포천으로 숯과 돌을 감싼 사각 틀을 안고 나타났다.

“준비 끝났어요.”

“소리 내지 말고 따르시오.”

도겸은 숯과 모래 자루를 가볍게 짊어졌다. 짚신 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어둠을 틈타 우물가에 닿았다. 도겸은 두레박 줄을 걷어 올리고 우물 난간 위로 올라섰다.

“도겸 씨 내려가려고요? 벽이 미끄러워요.”

“용천구를 직접 덮어야 하오.”

도겸은 숯 자루와 여과틀을 쥐고 우물 안쪽 돌벽으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무영보의 경력이 발끝을 통해 이끼 낀 돌 틈으로 스며들었다. 도겸의 몸은 미끄러지지 않고 수직의 돌벽을 타고 소리 없이 내려갔다.

우물 바닥에 닿자 차가운 물이 허리춤까지 찼다. 바위틈에서 솟구치는 물줄기가 발목을 감돌았다. 손을 뻗어 결을 짚자 암반 틈새로 거센 수압이 뿜어져 나오는 용천구가 잡혔다.

도겸은 자갈과 숯 자루를 용천구 주변에 둘렀다. 그 위로 연화의 약재 여과틀을 덮고 무거운 참숯 판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고운 모래와 볶은 왕겨 주머니를 틈새마다 끼워 넣었다.

용천구의 물이 여과층을 통과하며 거품을 일으켰다. 거칠게 뿜어지던 기운이 숯과 모래 틈새를 지나며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겸은 우물 벽의 요철을 디디며 단숨에 솟구쳐 올라왔다. 난간을 딛고 내려선 도겸의 옷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떻게 됐어요?”

도겸은 두레박으로 물을 한 바가지 길어 올렸다. 맑은 물이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였다.

연화가 조심스레 손가락을 담가 맛을 보았다.

“단맛이 거의 사라졌어요. 혀를 찌르던 쇳내도 잡혔고요. 미세하게 서늘한 약기운만 남았어요.”

“참숯과 약재가 독기를 흡수하고 있소.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오.”

도겸이 젖은 소매를 짜며 말했다.

“걸러 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보름이오. 그사이 수맥의 근본을 돌려놓지 못하면 다시 단맛이 올라올 거요.”

“보름이면 충분해요. 그 안에 폐광 수맥의 진상을 알아내야죠.”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우물 주변의 흔적을 지우고 돌아섰다.

초가로 돌아온 도겸은 옷을 갈아입고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골랐다. 가슴의 상처가 차가운 물에 닿아 쓰라렸지만 우물을 지켜냈다는 안도가 밤공기 속에서 온기로 번졌다.

그때였다.

도겸의 귀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산골 마을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서쪽 고갯길 너머에서 들려왔다.

딸랑. 딸랑.

새벽바람을 타고 울려 퍼지는 맑은 놋쇠 방울 소리였다. 행상들이 밤길을 걸을 때 맹수를 쫓기 위해 지팡이나 지게 끝에 다는 방울 소리였다.

도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깊은 청운촌 고갯길을 한밤중에 홀로 넘어오는 장돌뱅이라니.

발소리는 무거웠으나 발끝이 땅을 차는 간격은 일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짐의 무게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산길을 타는 자의 걸음걸이였다.

도겸은 어둠 속 서쪽 능선을 응시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고갯마루 위로 낡은 삿갓을 눌러쓴 채 커다란 등짐을 진 사내의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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