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9화: 방울 단 장돌뱅이
딸랑.
도겸은 싸리문을 열지 않았다. 서쪽 고갯마루에서 내려온 사내가 길모퉁이에서 멈추자 방울도 멎었다. 소리를 내며 걷는 장돌뱅이가 문 앞에서는 발소리까지 죽였다.
“바늘 사시오. 실도 있소.”
삿갓 밑의 목소리는 젊었다. 도겸은 문틈으로 등짐의 끈을 보았다. 짐은 제법 큰데 어깨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이 밤에 바늘을 팔러 왔소?”
“해가 늦게 떠서요.”
사내가 삿갓을 살짝 들었다. 창백한 얼굴과 검은 두건 끝이 달빛에 드러났다. 백린이었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각…….”
도겸의 손가락이 문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백린은 입을 다물었다. 짧은 신호를 알아듣는 얼굴이 지나치게 반가워 보였다.
“밤손님은 사지 않소. 날 밝으면 다시 오시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고요?”
“목소리를 낮추시오.”
백린이 웃으려다 실패했다. 눈가에는 잠을 못 잔 붉은 선이 있었다. 삿갓에서 이슬이 떨어졌다.
“뒤에 누가 있었소?”
“고개 둘을 넘기 전까지는요. 마지막 개울에서 떼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만 했군.”
백린은 대답 대신 등짐을 내려놓았다. 바늘통과 실타래가 보이도록 입구를 벌렸다. 이것만큼은 진짜 장삿짐이었다.
그의 손이 등짐 안쪽의 이중 솔기를 더듬었다. 꺼내 보이려는 듯하더니 멈췄다. 골목 저편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싸리문 밖에서 흙 밟는 소리가 났다. 우물에서 돌아오던 연화가 두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손에는 빈 약재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새벽에 손님이 왔네요.”
“길을 잃은 장사꾼이오.”
연화의 눈은 백린의 등짐에서 도겸의 젖은 소매로 옮겨 갔다. 그녀는 우물에서 무리한 그의 어깨가 아직 내려앉아 있음을 알아챘다.
“그럼 길은 아침에 알려 주세요. 도겸 씨는 이제 쉬어야 해요.”
“알겠소.”
연화가 지나갈 때 백린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겸은 그 등이 펴진 뒤에야 문을 열었다.
“내 뒤꼍 헛간에서 자시오. 내 이름을 남 앞에서 함부로 부르지 말고.”
“계속 여기 있어도 됩니까?”
“날이 밝으면 물건부터 파시오. 그 뒤에 묻겠소.”
백린은 등짐을 다시 들어 올렸다. 방울이 울리려 하자 손으로 붙잡았다.
아침 햇빛이 창고 앞 공터를 데웠다.
백린은 씨앗 창고 벽 아래 돗자리를 펼쳐 바늘통 세 개와 실타래, 작은 가위, 천 조각을 늘어놓았다. 등짐은 벽에 기대 두었다. 밤새 잠을 거의 못 잤는데도 손님 앞에서는 웃음이 빨랐다.
“바늘은 쌀 한 줌. 실은 달걀 하나면 드립니다.”
“달걀이 바늘보다 비싸지 않나?”
배씨 노인이 묻자 백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값까지 외워 왔지만 마을의 달걀 값은 몰랐다.
“그럼 달걀 하나에 실 두 타래.”
“세 타래.”
“두 타래에 바늘 한 자루 더 얹겠습니다.”
배씨 노인은 그제야 웃으며 달걀을 내밀었다.
소연은 터진 씨앗 자루를 품에 안고 공터로 뛰어왔다. 바닥이 벌어져 보리 몇 알이 소매에 붙어 있었다.
“이거 꿰맬 굵은 바늘 있어요?”
백린은 자루를 받자마자 찢어진 곳을 안쪽으로 접었다. 바늘을 넣는 손이 너무 빨라 도겸의 시선이 굳었다.
“바늘만 주시오. 꿰매는 법은 이 아이가 아오.”
백린의 손이 멈췄다. 소연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할 수 있어요. 할머니한테 배웠거든요.”
“이음매는 두 번 꿰매요. 곡식 자루니까.”
백린은 굵은 바늘을 건넸다. 소연이 실을 꿰며 물었다.
“얼마예요?”
“달걀 하나요.”
“달걀은 없어요. 말린 조 한 줌은요?”
“그렇게 하죠.”
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린은 자신이 꿰매 버렸으면 순식간이었을 자루를 소연이 한 땀씩 고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서툴러도 구멍은 점점 닫혔다.
연화가 우물 쪽에서 작은 숯자루를 안고 왔다. 그녀는 소연의 손을 먼저 살핀 뒤 백린을 보았다.
“밤길에 고개를 넘었다죠? 서쪽 길은 위험해요.”
“길이 험하더군요.”
“무슨 일로 이런 산골까지 왔어요?”
“살 사람을 찾으러요.”
대답이 지나치게 짧았다. 연화의 미간이 좁아졌다.
백린은 곧장 바늘통 하나를 들었다.
“바늘 살 사람이요. 산골은 바느질할 일이 많잖습니까.”
도겸이 헛기침했다. 백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연화는 그를 더 캐묻지 않았다. 숯자루를 도겸에게 건넸다.
“마른 숯은 처마 밑에 들여놓을게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와 남들은 듣지 못하게 말했다.
“어젯밤 넣은 여과층 겉에 벌써 누런 가루가 붙었어요. 맛은 괜찮지만 살펴야 해요.”
“오후에 겉층을 점검하겠소.”
“어깨부터 봐요. 무거운 건 제가 들게요.”
백린은 둘을 번갈아 봤다. 누군가 도겸에게 일을 시키고 도겸이 당연한 듯 듣는 광경이 낯설었다.
그때 소연이 자루 밑을 살피다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이 노끈 누가 잘랐어요?”
장삿짐 바로 뒤 창고 벽에는 가느다란 절단 자국이 있었다. 소연이 어제 매듭지은 자루 끈이었다. 마른 흙 위에는 낯선 짚신 자국도 하나 찍혀 있었다.
도겸은 창고 문을 닫고 소연을 안쪽에 들였다.
“남은 종자를 세어 보시오. 끈을 다시 묶기 전에는 이쪽으로 나오지 말고.”
“누가 자루를 훔치려는 거예요?”
“확인하고 오겠소.”
연화가 도겸을 가로막았다.
“저 상인과 관계가 있죠?”
도겸은 곧장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모르는 사람이 뒤따라왔을 수 있소. 마을 안에서 맞닥뜨리게 두지 않겠소.”
“소연이는 제가 볼게요. 그리고 이번엔 혼자 무리하지 마요.”
도겸은 백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 안에 무엇이 있소?”
“팔 물건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
백린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등짐의 안감을 눌렀다. 얇은 종이가 천 아래에서 바스락거렸다.
“제게 있어야 하는 것 하나요.”
“그걸 쫓는 자가 여기까지 왔군.”
“개울에서 놓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틀렸소.”
백린은 창고 쪽을 돌아봤다. 소연이 문틈에서 종자 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까지 손길이 닿을 줄은 몰랐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명령을 기다린 게 아니군.”
백린은 눈을 내리깔았다.
“제 짐 때문에 왔으니까요.”
도겸은 빈 자루 하나를 들어 백린의 방울 달린 지게에 얹었다. 진짜 등짐은 자기 집 뒤꼍 헛간 볏짚 속에 숨기고 두 사람은 서쪽 마른 물도랑으로 향했다.
고개를 넘는 길과 갈라지는 자리였다. 돌 아래로 물이 조금 스며들었으나 도랑 바닥은 대부분 진흙이었다. 도겸은 쇠 냄새가 나는 물웅덩이를 피해 발 디딜 곳을 골랐다. 어깨에 통증이 올라와 보폭을 작게 줄였다.
백린이 뒤돌아보려 하자 도겸이 말했다.
“뒤를 찾지 마시오. 방울을 울리시오.”
“적이 따라올 텐데요.”
“그러라고 울리는 거요.”
딸랑. 딸랑.
마른 갈대 뒤에서 낮은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도겸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방울 소리가 도랑 깊숙이 들어갔다.
백린은 지게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바늘통 몇 개만 얹힌 빈 등짐이 진짜처럼 보였다. 갈대 사이에서 회색 옷자락이 튀어나왔다.
낯선 사내가 끈을 잡아챘다. 등짐 밑을 찢어 손을 넣었지만 잡히는 것은 자루뿐이었다.
“종이는 어디 있지?”
백린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도겸은 그보다 먼저 흙바닥의 옛 물꼬를 괭이 끝으로 들췄다. 얇은 돌판이 비스듬히 들리고 고인 물이 사내의 발목으로 흘렀다.
사내가 무게를 옮긴 발이 젖은 진흙에 빠졌다. 백린은 손에 닿은 칼자루를 놓고 자루 묶음줄을 던졌다. 줄이 사내의 손목을 감았다. 도겸이 한 번 당기자 그가 흙바닥에 넘어졌다.
사내가 품속에서 작은 침을 꺼냈다. 도겸은 괭이 자루로 손등만 눌렀다. 침은 물웅덩이에 빠졌다. 도겸은 침 끝을 건드리지 않고 두 겹으로 접은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누가 보냈소?”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이름도 소속도 말하지 않았다.
“그 종이를 가져가면 끝이었어.”
백린이 묻지 않은 대답만 했다. 도겸은 더 캐지 않았다. 칼집과 침통을 치우고 손목을 다시 묶었다.
“마을 씨앗 창고 끈을 자른 건 왜요?”
백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짐이 그 옆에 있었으니까.”
백린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끌어온 발자국이 밭까지 닿은 것이다.
도겸은 그를 바라봤다.
“이곳에 머물고 싶다면 짐 뒤를 살피는 것부터 배우시오.”
“시키시면 하겠습니다.”
“그 말을 그만하시오.”
도겸은 묶인 사내를 일으켰다. 소란을 듣고 온 촌장에게는 씨앗 창고를 뒤진 도둑이라고 말했다. 촌장은 소연이 들고 온 잘린 노끈과 사내의 손목에 묶인 자루 끈을 번갈아 보았다.
“종자부터 다시 세어야겠군. 이놈은 내가 맡겠네.”
촌장은 마을 입구 빈 헛간에 사내를 가두고 장정 둘에게 번갈아 지키게 했다. 백린은 장사꾼의 얼굴로 눈을 낮추고 있었다.
해가 기울자 도겸은 자기 집 뒤꼍 헛간에서 백린을 만났다. 백린은 볏짚에서 등짐을 꺼냈다. 연화가 가져다 놓은 마른 숯자루가 담장 옆에 쌓여 있었다.
“떠나라고 하시면…….”
“내가 할 말을 정하지 마시오.”
“그 종이를 읽기 전에는 보내지 않을 거요.”
백린은 등짐 안감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잘려 나간 가장자리에 오래된 피얼룩이 있었다.
“해산 당일 장부에서 뜯어 냈습니다. 그 뒤로 이것을 찾는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도겸은 종이를 받지 않고 펼쳐 보게 했다. 빼곡한 숫자와 낯익은 결재란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날 자신이 내린 명령의 기록과 맞지 않는 줄이 있었다. 글씨는 낯익은 장부 필체였지만 날짜 옆의 빈칸이 칼끝으로 다시 긁힌 듯 거칠었다.
“이 부분을 어디서 봤소?”
백린이 손끝으로 종이의 맨 아래를 짚었다.
“그걸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 기록을 보고 도망쳤거든요.”
도겸은 종이를 오래 바라봤다. 등 뒤의 우물에서는 물 긷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물과 밭과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이 젊은이가 무엇을 들고 왔는지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