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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7화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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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산비탈의 물길

새벽 안개가 비탈을 짙게 덮고 있었다.

도겸은 초가 마당에서 낡은 곡괭이 자루를 새끼줄로 단단히 동여맸다. 서쪽 비탈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는 젖은 흙내와 함께 서늘한 쇳내가 섞여 있었다. 어제 산 위쪽에서 들렸던 둔탁한 쇠붙이 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싸리문을 밀고 연화가 들어섰다. 어깨에는 물길을 틀 때 쓰는 굵은 가래가 걸려 있었다.

“채비를 벌써 마쳤군요.”

“위쪽 물길을 먼저 봐야 하오.”

“혼자 갈 생각이었죠?”

연화가 도겸의 곡괭이를 보며 물었다. 산 위쪽 능선은 가파르고 험했다. 어제 소연이 말한 덮개 수레와 붉은 끈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위험한 자들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길이 험하오.”

“험한 길이라서 같이 가는 거예요. 산 물줄기는 바위틈 하나만 비틀려도 터지는 자리가 달라져요. 흙만 파서는 물길을 못 잡아요.”

도겸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울타리 너머에서 숨찬 발소리가 들렸다.

소연이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소녀의 손에는 숯으로 줄을 그은 얇은 나무판이 들려 있었다.

“아저씨! 저도 왔어요.”

“소연아.”

“밭 기록은 제가 맡기로 했잖아요.”

소연은 숨을 몰아쉬며 나무판을 내밀었다. 어제 건져 낸 조 열한 알의 상태와 해 질 무렵 수레 소리가 났던 시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너는 밭 아래에 있어야 한다. 비탈 위는 흙이 무너진다.”

“알아요. 벼랑 끝까지 올라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어제 수레가 사라진 능선 길목을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아래에서 보면서 물길이 어느 밭으로 치고 드는지 적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도겸은 소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가락마디에는 풀에 베인 상처와 흙먼지가 배어 있었다. 억지로 밀어내도 기어이 따라올 눈빛이었다.

“밭 아래 도랑 너머로는 단 한 발자국도 올라오지 마시오.”

“약속해요.”

세 사람이 계단밭 위쪽 첫 단으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우르릉.

땅 밑바닥에서부터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짐승이 달리는 소리도 산새가 날아오르는 소리도 아니었다.

도겸은 즉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비탈 위쪽에서 잔돌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뒤이어 짙은 흙탕물이 굉음을 내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해요!”

연화가 소연의 팔을 잡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흙탕물은 어제 손봐 둔 배수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단숨에 둑을 집어삼켰다.

거센 물살이 돌둑을 들이치자 굵은 돌덩이들이 힘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대로 두면 도겸의 밭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보리밭과 조밭까지 붉은 진흙탕에 송두리째 파묻힐 판이었다.

“내 밭! 아이고 내 밭이 다 떠내려간다!”

아래쪽 길에서 비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삽과 괭이를 든 촌장 강노인과 장정들이 숨을 헐떡이며 비탈길로 뛰어 올라왔다. 촌장은 이미 흙탕물이 무릎께까지 차오른 밭두렁을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을 뻔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비도 안 왔는데 어찌 산에서 흙탕이 쏟아져!”

“촌장님 물러서세요! 위쪽에서 돌이 굴러떨어져요!”

연화가 소리치며 장정들을 둑 뒤편으로 밀어냈다.

소연은 챙겨 온 흰 천 장대를 진흙탕 가장자리에 단단히 박아 세웠다.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면 안 돼요! 거긴 둑이 꺼져요!”

소녀의 외침에 마을 장정들이 겨우 멈춰 섰다. 배씨 성을 가진 늙은 농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위쪽 바위턱을 깨서 서쪽 골로 물을 빼야 해! 안 그러면 아래 밭 열두 마지기가 죄다 진흙 밑에 묻힌다고!”

“그걸 누가 올라가! 저 비탈은 원숭이도 발을 못 붙여! 진흙이 쓸려 내려오는데 다가가면 뼈도 못 추려!”

장정의 말이 맞았다. 물길이 터진 곳은 계단밭 한참 위쪽에 솟은 바위턱이었다. 가파른 경사면 위로 진흙과 날카로운 낙석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밧줄을 던질 틈도 발을 디딜 자리도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겨우 씨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이 산골 밭을 다 쓸어가려나 보구나.”

촌장이 흙 묻은 주먹으로 땅을 쳤다.

도겸은 흙탕물이 쏟아져 내리는 절벽을 응시했다.

귀를 찢는 물소리 사이로 흙과 바위가 무너지는 결이 보였다. 물이 자연적으로 터진 것이 아니었다. 둔탁하게 깎여 나간 흙벽의 단면과 비정상적으로 쏠린 수압. 누군가 위쪽에서 바위를 억지로 괴어 물을 모아 두었다가 한 번에 터뜨린 모양새였다.

‘밭을 버릴 수는 없다.’

도겸의 잿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도겸은 수백 번도 넘게 벼랑 끝에 섰다. 그때마다 길은 언제나 죽음과 삶의 아슬아슬한 경계 사이에 있었다.

도겸은 손에 쥔 낡은 곡괭이를 고쳐 쥐었다.

“도겸 씨 설마?”

연화가 도겸의 눈빛을 알아채고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길을 틀 수 있는 곳은 저 바위턱 하나뿐이오.”

“저긴 길이 아니에요! 흙이 무너지고 있잖아요!”

“길은 딛는 순간 생기는 법이오.”

도겸은 연화를 지나쳐 진흙탕이 쏟아지는 벼랑 밑으로 걸어 나갔다.


도겸의 신형이 허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다.

사르륵.

도겸의 짚신 끝이 무너져 내리는 진흙 절벽의 표면을 스쳤다. 진흙이 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푹 꺼지려는 찰나 도겸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무영보(無影步).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혈우각의 비전 보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도겸이 펼치는 걸음걸이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신선의 기술이 아니었다. 발바닥에 실리는 체중을 깃털처럼 가볍게 분산하고 낙석과 진흙의 미세한 마찰력을 발끝으로 읽어 내는 극한의 신체 제어였다.

위쪽에서 머리통만 한 바위가 굉음을 내며 굴러떨어졌다.

“아저씨!”

소연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위가 머리를 짓부수기 직전 도겸은 허리를 기묘하게 비틀며 날아오는 바위의 윗면을 발끝으로 가볍게 툭 찼다.

탁.

반동을 이용해 오히려 몸을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렸다. 굴러떨어지던 바위는 궤적이 꺾여 허공을 갈랐고 도겸은 비탈 한가운데 솟은 작은 나뭇가지 끝을 스치듯 디뎠다.

나무뿌리가 뽑혀 나가기도 전에 도겸의 신형은 이미 다음 디딤돌로 도약하고 있었다.

지그재그로 비탈을 가르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거대한 흑표범과 같았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굳어 버렸다.

“저…… 저게 대체 뭐여?”

“사람이 어떻게 저 벼랑을 타고 올라간단 말인가!”

배씨 노인이 괭이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비탈 중턱을 돌파한 도겸은 마침내 거대한 바위턱 위에 도달했다.

발밑에서 흙탕물이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집채만 한 화강암 바위가 비탈의 본래 물길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고 그 틈새로 모인 수압이 흙벽을 무너뜨리며 계단밭으로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도겸은 숨을 낮게 몰아쉬었다. 가슴 깊은 곳의 옛 흉터가 불에 덴 듯 욱신거렸다. 숨을 멈추고 단전에 남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무흔수(無痕手)의 경력이 곡괭이의 쇠 날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겸은 바위의 결을 꿰뚫어 보았다. 수천 번의 칼질을 거치며 익힌 생사의 감각이 돌의 숨구멍을 정확히 짚어냈다.

“터져라.”

쾅!

도겸의 곡괭이가 바위턱의 가장 취약한 균열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쇠붙이와 바위가 부딪히며 거센 불꽃이 튀었다. 쩌적 하는 파열음과 함께 거대한 바위가 두 동강 나며 옆으로 기울어졌다.

막혀 있던 물길이 굉음을 내며 방향을 바꾸었다.

콸콸콸!

계단밭을 덮치려던 거센 흙탕물이 밭과 정반대 편인 서쪽 암반의 마른 골짜기로 꺾여 들어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위틈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비탈 전체를 울렸다.

밭으로 쏟아지던 토사는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도겸의 발걸음은 더없이 차분했다.

도겸은 바위턱 뒤편에 걸려 있던 붉은 실 오라기를 손바닥에 쥐고 있었다. 깨진 바위 틈새에는 쇠지렛대로 흙을 파헤쳐 억지로 물을 가두었던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이곳에 물을 모았다가 아래로 터뜨린 것이 분명했다.

도겸은 붉은 실을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가 흙탕물이 잦아든 밭두렁에 발을 딛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기적처럼 살아난 밭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경이로움과 말로 다 못 할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진…… 진 공.”

촌장 강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무림의 고수라도 되는 건가? 저 깎아지른 벼랑을 날아올라 집채만 한 바위를 깨부수다니…….”

장정들도 침을 삼키며 도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흙투성이 외지인 노인이라 부르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도겸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에 쥔 곡괭이를 가볍게 털었다.

“벼랑을 날아오른 게 아니오.”

“뭐라고?”

“물에 젖은 진흙은 무너지지만 박힌 돌은 무게를 견디오. 발을 헛딛지 않고 단단한 디딤돌만 골라 밟았을 뿐이오. 바위도 금이 가 있던 자리를 건드려 무너뜨린 것뿐이오.”

도겸의 목소리는 너무나 무덤덤해서 오히려 듣는 이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저 비탈을 저리 빨리 탄단 말인가?”

장정들이 수군거렸지만 도겸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연화가 앞으로 걸어 나와 주민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촌장님 밭고랑부터 정리해야 해요. 물길은 돌렸지만 도랑을 넓히지 않으면 남은 물이 고여서 씨앗이 썩어요.”

연화의 단호한 목소리에 촌장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밭이 먼저지! 얘들아 멍하니 서 있지 말고 가래를 쥐어라!”

촌장의 호통에 장정들이 허둥지둥 아래 밭으로 흩어졌다.

소연은 곁에 남아 흙 묻은 도겸의 짚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녀의 둥근 눈에 경외심이 가득 차 있었다.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

“위험한 짓을 했을 뿐이다.”

“아니에요. 밭을 구했잖아요.”

소연은 소중하게 품고 있던 나무판에 숯으로 힘주어 적었다.

‘초봄 여섯째 날 아침. 비탈의 물길이 터짐. 진 아저씨가 비탈을 달려 바위를 깨고 물을 돌림. 계단밭과 씨앗 무사함.’

도겸은 그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민들이 물러간 뒤 연화가 도겸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슴에 흉터가 아픈가요?”

도겸은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소?”

“숨을 쉴 때 왼쪽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어요. 무리했잖아요.”

도겸은 대답 대신 소매 속에서 꺼낸 붉은 실 오라기를 연화에게 내밀었다.

“바위턱 뒤에 걸려 있었소. 쇠지렛대로 바위를 파낸 흔적도 있었소.”

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역시 누군가 일부러…….”

“폐광 쪽에서 작업을 감추기 위해 물길을 우리 쪽으로 터뜨렸을 가능성이 있소. 사람이 비탈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던 거요.”

연화는 붉은 실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아래쪽 밭에서 손을 씻던 연화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어?”

“왜 그러시오?”

연화가 도랑을 타고 내려오는 물을 손바닥으로 떠올려 냄새를 맡고 살짝 혀끝을 대보았다.

“물맛이…… 달라요.”

“뭐가 말이오?”

“흙탕물인데도 뒷맛에서 아주 엷은 단맛이 돌아요. 보통 산골 물에서는 이런 맛이 나지 않는데…….”

연화의 미간이 좁혀졌다.

도겸은 서쪽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물길은 잡았지만 산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은 이제 청운촌의 물줄기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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