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6화: 씨앗 창고의 문
새벽 종이 울리기 전에 도겸은 촌장댁 마당에 도착했다.
연화는 먼저 와 있었다. 손에는 전날 물길에 묶었던 흰 천 조각과 짧은 메모가 들려 있었다.
“세 군데를 표시했어요. 우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은 아니지만 비가 오면 아래 밭까지 번질 수 있어요.”
“비가 오기 전까지는 물길을 돌릴 수 있소.”
“그 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야죠.”
연화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촌장이 문을 열고 흰 천과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서쪽 물은 예전에도 말썽이었지. 하지만 파종을 미루면 올해 밥상이 먼저 마른다.”
“오염 여부를 모르는 물을 밭에 대자는 뜻은 아니에요.”
“물을 대기 전에 씨앗부터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창고를 열게요.”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짧은 머리에 흙 묻은 소매. 강소연은 허리춤의 낡은 열쇠를 풀어 들고 있었다.
“소연아. 너는 밥이나 먹어라.”
“밥은 먹었어요. 씨앗은 아직 안 먹었고요.”
소연은 도겸을 올려다봤다.
“아저씨 밭에 심을 거죠?”
“아직 정하지 않았소.”
“그럼 정하면 돼요. 창고 문부터 열어야 하잖아요.”
촌장이 눈을 찌푸렸다.
“어른들이 할 일이다.”
소연은 자물쇠에 열쇠를 꽂았다.
“어른들이 씨앗 냄새를 더 잘 맡는다는 법은 없잖아요.”
도겸은 소녀의 손을 보았다. 손톱 밑에 흙이 박혀 있었고 손가락에는 마른 풀을 베며 생긴 작은 상처가 있었다.
“열어 보시오.”
촌장이 그를 노려봤다.
“자네까지 아이를 부추기는군.”
“씨앗 상태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오.”
소연은 자물쇠를 두 번 흔든 뒤 힘을 주어 돌렸다. 녹슨 쇠가 끼익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자 눅눅한 곡물 냄새가 마당으로 흘러나왔다.
“문을 여는 것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에요.”
소연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자루 네 개와 나무 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소연은 가장 안쪽 자루부터 눌렀다. 단단한 소리가 나는 자루와 물먹은 천처럼 출렁이는 자루를 곧바로 갈라 놓았다.
“이건 보리예요. 겉은 말랐는데 안쪽에 곰팡이가 났어요.”
“열어 보지도 않고 아는구나.”
“자루가 처진 쪽이 다르고 냄새도 달라요.”
소연이 끈을 풀었다. 마른 알곡 사이에 검게 눌어붙은 알이 섞여 있었다. 연화가 나뭇가지로 몇 알을 꺼내 살폈다.
“이건 심으면 안 돼요. 물을 먹고도 싹이 안 날 수 있어요.”
“좋은 것만 골라 내면 되죠.”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해요.”
“사람 손이 없어서 씨앗을 버리면 내년에도 손이 없어요.”
소연은 자루를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도겸은 자루 입구에 손을 넣었다. 알곡을 한 줌 쥔 뒤 손가락 사이로 흘려 보냈다. 가벼운 알은 먼저 떨어졌고 속이 찬 알은 손바닥에 남았다.
그는 남은 씨앗의 껍질을 눌러 보며 하나씩 옆 광주리에 놓았다.
“이건 심을 수 있소.”
소연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껍질이 단단하고 안쪽이 비어 있지 않소.”
“안쪽을 봤어요?”
“만져 보면 알 수 있소.”
소연은 도겸의 손을 바라봤다. 거친 손가락이 씨앗을 누를 때는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지 않았다.
연화는 옆 상자를 열었다. 콩과 조가 섞인 상자였다. 바닥 한쪽에는 검은 흙이 얇게 붙어 있었다.
도겸은 흙을 손도끼 끝으로 살짝 긁었다. 쇠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이 상자는 어디서 왔소?”
“작년에 서쪽 빈 밭에서 가져왔대요. 씨앗을 담을 곳이 없었거든요.”
“폐광 아래쪽이오?”
“그 근처예요.”
연화가 흙을 살폈다.
“물에 젖었다가 말라붙은 흙 같아요. 씨앗과는 달라요.”
도겸은 더 만지지 않았다. 검은 가루와 같은 것인지 확정할 수 없었다.
“이 상자는 씨앗과 분리하시오. 바깥에서 말리되 다른 자루와 닿지 않게 하오.”
소연은 곧바로 상자를 들고 나갔다. 무거운 상자가 흔들렸지만 끝까지 놓지 않았다.
“제가 들 수 있어요.”
“들 수 있는 것과 들어야 하는 것은 다르오.”
“그 말은 아저씨도 기억하세요.”
연화가 창고 안쪽의 낡은 나무판을 가리켰다. 가구마다 빌려 간 씨앗과 돌려줄 양이 적혀 있었지만 몇 줄은 오래전에 지워져 있었다.
“이 기록은 제가 다시 적을게요. 누구 밭에 얼마나 갔는지 모르면 가을에 또 싸워요.”
도겸은 소연을 바라봤다.
“씨앗을 관리해 본 적이 있소?”
“할머니가 하던 걸 봤어요. 할아버지는 숫자만 세고 냄새는 못 맡아요.”
창고 밖에서 촌장이 헛기침했다.
“들린다.”
“들으라고 한 말이에요.”
소연은 좋은 씨앗이 담긴 광주리를 끈으로 묶었다.
“이건 제가 들고 갈게요. 창고를 연 사람은 어디에 심는지도 봐야 해요.”
“창고를 열었다고 밭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소.”
“그럼 누가 간격을 맞춰요?”
소연이 연화를 보았다.
“약초밭은 연화 언니가 보겠지만 곡물밭은 제가 알아요.”
연화가 도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요. 대신 서쪽 물에는 가까이 가지 않게 하고요.”
도겸은 광주리를 소연에게 건넸다.
“앞장서시오.”
소연이 웃었다.
“말은 잘 듣네요. 아저씨.”
세 사람은 낮은 논둑을 따라 계단밭으로 올라갔다.
소연은 광주리를 안고 앞장섰다. 도겸은 뒤에서 미끄러운 돌을 치웠고 연화는 밭 아래 물길을 살폈다.
“조는 물을 적게 먹으니 위쪽에 심고 보리는 아래쪽이 나아요. 콩은 물이 오래 머무르면 안 돼요.”
“그 순서를 알고 있소?”
“씨앗 창고를 여는 사람은 심을 자리까지 알아야 해요.”
소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른들은 씨앗을 나눠 주고 끝내지만 밭은 다 다르잖아요.”
첫 번째 단에 도착하자 소연은 막대기로 흙에 일정한 간격을 표시했다. 연화는 약초밭과 곡물밭 사이에 얕은 선을 그었다.
“물이 약초밭으로 넘어가면 안 돼요.”
“서쪽 마른 골로 빼면 되오.”
도겸이 손으로 작은 홈을 냈다.
세 사람은 일을 나눴다. 소연이 구멍을 만들면 도겸이 씨앗을 놓았고 연화가 흙을 덮었다.
도겸은 마른 흙에는 씨앗을 조금 깊게 넣었다. 습기가 남은 곳에는 얕게 눕혔다. 손끝 하나로 깊이를 달리하는 모습은 농부의 일치고는 지나치게 정확했다.
“아저씨는 씨앗을 놓을 때도 안 떨어뜨리네요.”
“떨어뜨리면 다시 주우면 되오.”
“흙에 떨어진 씨앗은 어느 게 심은 건지 모르게 되잖아요.”
“그래서 손에서 놓는 자리를 정하는 거요.”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첫 고랑이 채워졌다. 도겸이 마지막 흙을 누르자 소연이 밭 아래를 바라봤다.
“잠깐만요.”
작은 도랑 안에 물이 고여 있었다. 전날보다 가늘었지만 흙의 색이 달랐다.
연화가 천 끝으로 물을 찍었다.
“냄새가 있어요.”
그녀는 천을 햇빛에 들었다. 가장자리에 옅은 회색이 남았다.
도겸은 물이 내려온 산비탈을 바라봤다. 물길은 중간에서 끊긴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이 물이 없었소.”
“있었어요.”
소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며칠 전부터 해가 지면 폐광 입구에 수레가 와요.”
연화가 소연을 돌아봤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폐광 쪽에는 가지 말랬어요. 말하면 제가 몰래 갔다고 할 것 같았고요.”
“입구까지 간 적이 있소?”
“멀리서 본 것뿐이에요. 수레에는 덮개가 있었어요. 광석을 싣는 수레처럼 보이지 않았고요.”
소연은 물길 위쪽을 가리켰다.
“수레가 지나간 뒤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났어요. 한 번은 뒤에서 붉은 끈 같은 게 흔들렸고요.”
도겸의 손끝이 잠시 멎었다. 연화가 그를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제가 말하면 안 됐어요?”
“말해야 했소.”
도겸은 소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음부터는 숨기지 마시오. 잘못을 묻는 게 아니라 마을이 알아야 할 것을 묻는 거요.”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같이 확인해도 돼요?”
“폐광까지는 안 되오. 밭과 물길을 보는 일은 같이 할 수 있소.”
소연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럼 오늘 일은 계속해요.”
오후가 되자 산 위에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새 고랑의 흙이 무너지고 씨앗 몇 알이 물살에 떠올랐다. 소연이 광주리를 들어 올렸다.
“씨앗부터 옮겨요!”
“아래로 내려가시오.”
“제가 표식을 세워야 해요.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면 안 돼요.”
연화가 삽을 들고 도랑으로 들어왔다.
“도겸 씨는 위쪽 돌을 막고 소연이는 아래에 흰 천을 세워요. 저는 약초밭을 지킬게요.”
소연은 물가에서 한 걸음 떨어진 말뚝에 흰 천을 묶었다. 천은 아래쪽 길에서도 보일 만큼 크게 펄럭였다.
도겸은 무너진 고랑에 돌을 던져 물을 옆으로 돌렸다. 첫 돌은 떠내려갔고 두 번째 돌은 흙에 박혔다.
그는 산비탈 위쪽으로 몸을 낮췄다. 돌과 돌 사이를 빠르게 옮겨 가 큰 돌 하나를 옆으로 밀었다.
돌 밑에 고인 물이 터지며 새 물길이 생겼다. 물은 밭이 아니라 산 뒤쪽 마른 골로 흘렀다.
“그쪽은 막으면 안 돼요!”
연화가 소리쳤다.
“알고 있소.”
도겸은 물을 막지 않고 돌 세 개로 속도만 늦췄다. 연화는 아래에서 새 홈을 넓혔다.
소연은 떠내려온 씨앗을 손으로 주워 마른 풀 위에 줄을 맞춰 놓았다.
“몇 개나 건졌어요?”
“열한 개요.”
도겸은 젖은 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물에 오래 있었던 건 따로 두시오. 말리면 살릴 수 있는 것도 있소.”
소연은 씨앗 옆에 작은 돌을 하나씩 놓았다.
“조 열한 알. 물에 닿은 시간은 짧음.”
“나무판에 적어 두시오.”
“창고 기록에요?”
“밭 기록에도 필요하오.”
소연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
“그럼 제가 밭 기록을 맡아도 돼요?”
“오늘처럼 정확히 적는다면.”
“오늘처럼이 아니라 매일 할 수 있어요.”
도겸은 산 위를 바라봤다. 물은 잦아들었지만 깊은 곳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짧고 둔한 소리였다.
소연의 얼굴이 굳었다.
“수레가 움직일 때도 저 소리가 났어요.”
“소리를 들은 곳을 가리켜 보시오.”
소연은 폐광 입구보다 높은 능선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입구에서 수레가 사라지는 길이 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내일은 산 위쪽 물길부터 보겠소.”
“저도 가요. 물길 아래에서 기록할게요.”
“아침에 촌장에게 허락을 받으시오.”
“허락을 못 받으면요?”
“그때 다시 생각하겠소.”
연화가 흙 묻은 삽을 어깨에 걸쳤다.
“그럼 오늘은 세 사람이 일을 망치지 않았네요.”
소연은 고랑을 돌아봤다. 흙 아래에는 씨앗이 묻혀 있었고 흰 천은 물길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도겸은 산비탈을 올려다봤다. 물은 다시 가늘어졌지만 완전히 멎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흐른 물이라면 끊겼다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솟을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위에서 물길을 건드리고 있었다.
도겸은 마른 풀 위의 씨앗 광주리를 소연에게 건넸다.
“이건 창고로 돌려놓지 말고 마른 곳에 두시오.”
“제가 보관할게요.”
“그리고 오늘 본 수레 자국을 기억나는 대로 적으시오.”
소연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해가 서쪽 능선 뒤로 내려갈 무렵 도겸은 산길을 올려다봤다. 다음 날 새벽에는 아래에서 물을 막는 대신 위로 올라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