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살수의 귀농 일기

4화: 울타리에 걸린 밤손님
억새 매듭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도겸은 초가의 그림자에 몸을 붙였다. 바람은 동쪽에서 불고 있었다. 그런데 울타리 북쪽의 억새는 서쪽으로 눕지 않고 안쪽으로 휘었다.
누군가 울타리 너머에서 손을 댄 것이다.
도겸은 숨을 낮추고 밭의 모양을 살폈다. 셋째 단으로 올라오는 길은 둘이었다. 하나는 돌둑 옆의 마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연화와 함께 만든 임시 물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젖은 흙이 아주 작게 눌리는 소리가 났다.
도겸은 손도끼를 집지 않았다. 상대가 칼을 썼다면 밭을 먼저 살펴야 했다. 서쪽 물길은 낮에 막았고 동쪽 물은 약초 옆으로 돌려 두었다.
검은 소매가 울타리 위로 올라왔다.
침입자는 몸을 낮춘 채 말뚝 사이를 통과했다. 도겸은 발가락으로 작은 자갈 하나를 밀었다. 자갈은 동쪽으로 굴러갔다.
침입자의 고개가 자갈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 짧은 사이에 뒷발이 임시 물길을 밟았다.
푹.
물에 젖은 흙이 무너지며 발목이 빠졌다. 침입자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틀었지만 그 순간 울타리 아래에 묶어 둔 억새 다발이 발목을 감았다. 낮에 연화가 버린 마른 줄기를 도겸이 물길 표식으로 걸쳐 둔 것이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시오.”
침입자는 대답 대신 칼을 뽑았다. 짧은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도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칼끝이 억새 줄기를 끊었지만 자객의 발은 더 깊이 빠졌다.
상대가 욕설을 삼켰다.
도겸은 그 목소리가 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숨이 가쁘고 말끝이 흔들렸다. 이자는 칼을 먼저 믿고 있었다.
“회토 더미를 찾으러 왔소?”
칼끝이 조금 올라갔다.
“농부가 밤손님에게 물을 게 많군.”
“내 밭에 들어온 사람이오. 물어볼 권리는 있소.”
침입자의 시선이 회토 더미 쪽으로 스쳤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도겸은 놓치지 않았다. 상대는 사람보다 더미를 먼저 보고 있었다.
자객은 몸을 낮추고 발목의 줄기를 끊으려 했다. 도겸은 칼이 닿기 전에 옆의 말뚝을 발끝으로 차서 흙을 무너뜨렸다. 자객의 발이 다시 빠졌다.
그는 앞으로 쓰러지는 대신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도겸은 상체를 젖혀 칼끝을 피하고 손목을 잡았다. 힘을 주면 뼈가 부러질 자리였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맥을 눌러 칼의 방향만 꺾었다.
칼이 자객의 손에서 빠졌다.
자객은 곧장 머리를 들이받았다. 도겸은 어깨를 비켜 주고 등 뒤에 손을 대서 넘어지는 속도를 줄였다.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으면 왜 칼을 들고 왔지?”
“죽이지 않을 생각인 사람이 칼을 빼앗아?”
“밭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사람이오.”
자객은 도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을 꼬았다. 그러나 물길 위의 흙은 이미 질척해져 있었다. 도겸은 무영보의 첫 걸음으로 고랑 가장자리만 디뎌 자객의 옆으로 미끄러지듯 돌아갔다.
자객은 도겸의 위치를 놓쳤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도겸의 손가락이 어깨 아래와 팔꿈치 사이를 눌렀다. 무흔수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기술이었지만 힘을 절반만 쓰면 팔의 감각을 잠시 끊는 데 그쳤다.
자객의 팔이 힘없이 내려갔다.
“놔.”
“회토에 뭘 묻었소?”
“아무것도.”
“그럼 왜 더미부터 찾았소?”
자객은 이를 악물었다. 검은 두건 아래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겸은 그 눈을 보며 확신했다. 이자는 명령을 받고 왔지만 명령의 내용 전체를 알지는 못한다. 누군가 찾으라는 것만 전달받은 사람의 눈이었다.
“부서진 조각을 내놓아.”
“무슨 조각이오?”
“그걸 모르는 척하는군.”
자객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겸은 품 안쪽에 감춘 흑철 조각을 떠올렸다. 자객이 말한 조각이 같은 물건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누가 보냈소?”
“말하면 죽는다.”
“말하지 않아도 여기서 다칠 수 있소.”
자객은 그 말에서 살기를 읽은 듯 굳어 버렸다. 도겸은 곧바로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
멀리서 돌이 굴러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객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도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사람이 오고 있소.”
“네 동료요?”
“아니.”
도겸은 산길 쪽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올라올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걸음이 가볍고 일정했다. 연화였다.
도겸은 자객의 팔을 놓고 칼 손잡이를 억새로 허리띠에 묶었다.
“이제 소리 내지 마시오.”
“날 넘길 건가?”
“누구에게?”
자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겸은 밭 가장자리로 자객을 끌고 갔다. 젖은 흙에 남은 발자국은 지우지 않았다. 침범의 증거였다.
회토 더미 앞에 이르자 자객은 묶인 손으로 낙엽을 헤치려 했다. 도겸이 손등을 눌렀다.
“찾는 게 이것이오?”
“이미 가져갔군.”
“가져갔다고 한 적 없소.”
“그럼 빈 더미를 왜 뒤지나?”
자객의 발끝이 낙엽을 건드렸다. 그 아래에서 작은 금속음이 났다. 도겸은 내려다봤지만 자객의 몸에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때 산길 아래에서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도겸 씨? 거기 있어요?”
자객의 몸이 굳었다. 도겸은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다른 손으로 울타리 바깥을 가리켰다. 눈빛만으로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연화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대답이 없으면 올라갑니다.”
도겸은 자객을 초가 뒤편의 낮은 돌더미로 밀어 넣었다. 동쪽 물길이 지나지 않는 곳이었다.
“연화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시오.”
“그 여자가 네 편인가?”
“내 밭을 고쳐 주는 사람이오.”
“그럼 더 위험하군.”
“그 사람을 건드리면 이번에는 보내지 않겠소.”
도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객은 입을 다물었다.
연화가 울타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겸은 자객이 숨은 쪽을 등지고 섰다.
“밤중에 뭐 해요?”
“울타리가 무너졌소.”
연화는 바로 믿지 않았다. 젖은 흙과 끊어진 억새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멧돼지예요?”
“발자국은 사람 것이오.”
연화가 허리를 굽히려 하자 도겸이 먼저 그 앞을 막았다.
“다친 사람은 없소. 내일 밝을 때 보시오.”
“다친 사람이 없는데 왜 손에 피가 묻었죠?”
도겸은 손등을 내려다봤다. 자객의 입술이 터지며 묻은 피였다. 그는 흙을 한 줌 쥐어 손을 덮었다.
“말뚝을 뽑다가 긁혔소.”
연화의 눈이 손에서 초가 뒤편으로 옮겨 갔다. 도겸은 그녀가 더 묻기 전에 물길을 가리켰다.
“서쪽 물이 다시 넘쳤소. 여기부터 손봐야 하오.”
연화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까지 혼자 건드리지 마세요. 젖은 둑은 더 무너집니다.”
“알겠소.”
“정말 사람 발자국이면 마을 어른에게 알려야 해요.”
“밝으면 생각해 보겠소.”
연화는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섰지만 몇 걸음 내려간 뒤에도 뒤를 돌아봤다. 도겸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연화의 발소리가 끊기자 자객이 돌더미에서 빠져나왔다.
“왜 살려 주지?”
“아직 죽을 이유가 없소.”
“나는 너를 죽이려 했다.”
“칼을 뽑았지만 사람을 베지는 않았소.”
“다음에는 벨 거다.”
도겸은 묶어 둔 손잡이를 풀었다. 칼을 자객의 가슴 쪽으로 던지자 자객은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서쪽 비탈로 내려가시오. 동쪽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이 보게 될 거요.”
“농부가 길까지 알려 주는군.”
“밭에서 피가 나면 흙을 갈아엎어야 하오. 귀찮은 일이지.”
자객은 칼 손잡이에 감긴 억새와 붉은 실을 바라봤다.
“그 실은?”
“다음에 오면 네가 왔다는 걸 알기 위한 표식이오.”
“협박인가?”
“밭 관리요.”
자객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두 걸음 옮기던 그는 멈춰 섰다.
“검은 물이 흐르는 곳을 찾는 자들이 있다.”
“그 말을 왜 해 주는 거요?”
“오늘 빚진 걸 갚는 거다.”
자객은 더 묻지 않고 울타리 밖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발자국을 남기며 서쪽으로 내려가는 모습은 서툴렀지만 경고는 가볍지 않았다.
도겸은 회토 더미 앞으로 돌아왔다. 낙엽 사이에 붉은 실이 끊겨 있었다. 자객의 옷에서 떨어진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천에는 희미한 쇠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발끝으로 낙엽을 밀자 조금 전 들었던 금속음이 다시 났다. 작은 물건 하나가 흙 속으로 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도겸은 손가락으로 꺼내려다 멈췄다. 아직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주변 흙을 그대로 덮었다.
새벽빛이 산등성이를 넘을 때 연화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삽과 굵은 새끼줄을 들고 있었다.
“밤새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손댔네요.”
“넘어진 말뚝만 세웠소.”
“그리고 사람 발자국은 그대로 뒀고요.”
연화는 쪼그려 앉아 발끝이 서쪽을 향한 발자국을 확인했다.
“이건 멧돼지가 아니에요. 한 사람이네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기를 들고 왔어요?”
“모르겠소.”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하기 싫은 얼굴인데요.”
연화는 더 캐묻지 않고 무너진 물길로 갔다. 서쪽 물이 동쪽 약초밭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진흙을 걷고 작은 배수 홈을 냈다.
“서쪽 물을 완전히 막으면 안 돼요. 위쪽 바위에 물이 고이면 밤새 둑을 밀어 버립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빼야 하오.”
“알고 있으면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도겸은 부러진 말뚝을 뽑고 새 것을 박았다. 연화는 새끼줄을 팽팽하게 당겨 울타리 간격을 재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일이 끝날 무렵 연화가 회토 더미 가장자리에 손을 댔다. 단단한 것이 손톱에 걸렸다.
“여기에도 돌이 섞였네요.”
“내일 낮에 다시 보시오. 손을 베일 수 있소.”
연화는 흙 속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거두었다.
“밤손님이 또 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울타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 거요.”
“사람을 막으려면 밭보다 높은 울타리가 필요해요.”
“사람을 막는 건 울타리만으로 안 되오.”
도겸은 서쪽 비탈을 바라봤다. 검은 물길은 새로 낸 홈을 따라 밭 바깥으로 흘렀다. 물은 조용했지만 누군가 그 흐름을 알고 있었다.
연화는 그 시선을 따라가며 낮게 말했다.
“저 물 때문에 온 거라면 다시 올 거예요.”
“그럴 거요.”
“그런데도 마을에 알리지 않을 건가요?”
도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겁을 먹고 서쪽 폐광으로 가는 길을 막으면 누군가는 검은 물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아직 모르는 것을 소문으로 키우는 일은 밭에 독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확인할 게 있소.”
“혼자 확인하지 마세요.”
연화는 새끼줄 끝을 도겸에게 건넸다.
“물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나예요. 당신은 돌을 옮기고 울타리를 세우는 사람이면 되고요.”
도겸은 줄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 닿은 삼베가 거칠었다. 밤의 칼날보다 훨씬 약한 재료였지만 둘이 잡고 당기자 울타리가 반듯하게 섰다.
회토 더미 가장자리의 흙이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도겸은 그쪽을 보았지만 연화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건의 모양도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밤손님은 떠났다.
그러나 그가 찾던 흔적은 밭에 남아 있었다. 도겸은 새 울타리의 매듭을 단단히 조이며 손끝에 남은 흙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지워지지 않게 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