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9화: 봉인되지 않은 반입대장
열람실 밖에서 멈춘 구두 소리는 한동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는 다섯 번째 정물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들었다. 아무도 작품 쪽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강예림이 문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기 전 마두식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문 옆에 카드 리더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쪽에서 열면 기록이 남는 방식이 아니네요."
"그럼 누가 서 있든 기록을 남기고 들어오게 하죠."
강예림이 문을 열었다.
회색 셔츠 위에 검은 조끼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열람실 안을 훑어본 뒤 작품 번호부터 확인했다.
"아직 손대지 않았습니까."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이 작품은 지금부터 별도 보관실로 옮깁니다."
남자는 루체 수장관리팀장 오성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손에는 작품 이동용 봉인 테이프와 얇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진우는 봉인 테이프보다 오성훈의 엄지손가락을 보았다. 서류철 모서리에 묻은 흰 가루가 작품의 프레임 가장자리에서 보았던 가루와 비슷했다.
"이동 사유가 뭡니까."
"계약 전 열람 승인 기록이 없습니다. 비공개 수장품은 외부인이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죠."
강예림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승인했습니다."
"구두 승인만으로는 수장고 기록이 바뀌지 않습니다."
오성훈은 서류철을 열지 않았다. 대신 작품 앞 바닥에 놓인 이동용 받침대를 펼쳤다.
마두식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받침대도 지금은 접어 두시죠. 작품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구와 한 약속입니까."
"작품과요."
마두식의 말에 오성훈의 입꼬리가 굳었다. 진우는 그 틈에 휴대전화를 꺼내 열람실 전체와 작품 번호를 촬영했다. 촬영 전 강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오후 네 시 사십이 분. 작품은 다섯 번째 이동식 벽 앞에 있고 이동 흔적은 없습니다. 오성훈 팀장님이 반출을 지시했으며 근거 서류를 아직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감정하러 온 분이 기록관 노릇까지 하십니까."
"감정 전에 필요한 일입니다."
오성훈이 처음으로 진우를 똑바로 보았다. 그 눈에 불쾌감보다 계산이 먼저 지나갔다.
강예림은 작품과 오성훈 사이에 섰다.
"이동은 보류합니다."
"강 실장님. 이 방의 안전 책임은 제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책임을 확인할 수 있게 수장관리실로 가시죠. 반입대장과 출입 로그를 함께 보겠습니다."
"소유권 자료는 외부에 열람할 수 없습니다."
"소유권을 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작품이 언제 들어왔고 누가 검수 보류를 걸었는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오성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가 들고 온 봉인 테이프가 손 안에서 구겨졌다.
"다섯 점 모두입니까."
"다섯 번째 한 점입니다."
강예림이 대답하자 오성훈의 시선이 잠깐 정물화로 돌아갔다. 그 짧은 움직임이 진우의 가슴에 작은 못처럼 박혔다. 작품의 위험보다 작품이 가진 기록을 더 먼저 걱정하는 눈이었다.
수장관리실은 열람실보다 좁고 밝았다. 벽면 모니터에는 작품 번호와 온습도 기록이 줄지어 떠 있었다.
오성훈은 먼저 전산 검색창에 L-5를 입력했다. 화면에 네 줄이 나타났다가 마지막 줄만 회색으로 바뀌었다.
"오류입니까."
서도경이 모니터 가까이 다가갔다.
"삭제된 기록처럼 보이는데요."
"보안 등급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오성훈은 마우스를 돌려 화면을 닫았다.
진우는 모니터 왼쪽 아래에 찍힌 자동 백업 시각을 확인했다. 오늘 오후 세 시 십칠 분. 열람실 문이 열리기 한 시간 전이었다.
"방금 기록이 바뀐 겁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백업 시각이 현재 화면과 맞지 않습니다."
강예림이 손을 내밀었다.
"종이 대장을 보죠."
오성훈은 대답 대신 낮은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푸른 표지의 반입대장이 세 권 들어 있었다. 그는 가장 얇은 한 권을 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진우는 장갑을 끼고 표지의 모서리를 확인했다. 책등에는 L-01부터 L-07까지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다섯 번째 항목만 다른 종이가 덧붙어 있었다.
오성훈이 손으로 그 페이지를 덮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번호와 날짜와 서명만 보겠습니다."
강예림이 말을 잘랐다.
"이름 전체는 촬영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반입 요청자와 첨부 목록은 기록해야 합니다."
오성훈은 강예림과 잠깐 눈을 맞췄다. 그녀의 손가락이 책상 가장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페이지를 펼쳤다.
L-5.
반입일은 여섯 달 전이었다. 상태란에는 검수 보류가 적혀 있었다. 출처란은 비어 있었고 반입 요청자 칸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박태준.
진우의 손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이름 뒤에는 선임연구원이라는 직함이 없었다. 서명 대신 P.T.라는 이니셜과 낯선 번호 네 자리가 적혀 있었다.
첨부 목록에는 1998 서울 경매 위탁 확인서 사본 1부가 남아 있었다.
마두식이 숨을 낮췄다.
"그 사람이 맞나."
"아직 모릅니다."
진우는 대답하면서도 대구 법무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박태준에게 직접. 종이 위 글자와 현재 대장의 이름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닿았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첨부 사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존 문서함에 있습니다."
오성훈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서도경이 페이지의 잉크를 살폈다. 돋보기 아래에서 검수 보류의 마지막 획만 유난히 진했다.
"이 문구는 나중에 덧입힌 것 같습니다."
"오래된 잉크가 진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같은 종이에 다른 압력으로 적힌 건 맞습니다."
강예림은 오성훈에게서 대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의 녹음 화면을 책상 위에 놓았다.
"반입대장 L-5 항목을 열람했고 촬영 범위는 작품 번호와 날짜와 서명과 첨부 목록으로 제한합니다. 이견 있습니까."
오성훈은 한숨처럼 숨을 내뱉었다.
"없습니다."
진우는 그제야 대장의 네 줄을 촬영했다. 이름 전체는 손으로 가렸지만 박태준이라는 글자의 윤곽은 기록 안에 남았다.
보존과학 검증은 수장관리실 옆 작은 검사실에서 진행됐다.
서도경은 작품을 옮기지 않고 이동식 조명을 낮췄다. 사광이 화면을 비추자 흰 접시 아래의 붓질이 길게 드러났다. 표면은 오래된 기름물감처럼 보였지만 균열의 방향이 이상했다.
"균열이 여기서 멈춥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접시 테두리에서 십 센티미터쯤 떨어진 얇은 선이었다. 갈라진 바니시는 선 위에서 끊겼고 그 아래의 색층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는 루페를 들었다. 푸른 글자는 여전히 시야 한쪽에 떠 있었다.
[판정 단서: 표면 노화와 지지체 시간이 불일치. 하부 지지층에 적층 출력 흔적 가능성]
진우는 화면의 가장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캔버스는 오래된 천처럼 처져 있었지만 아래쪽 모서리만 팽팽했다.
"아래쪽 장력을 먼저 보세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덜 늙었습니다."
서도경이 휴대 현미경을 옮겼다. 화면에는 섬유 사이를 메운 투명한 막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수지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후대 보강이라면 이상하지 않아요. 문제는 이 막이 균열 아래까지 깔려 있다는 겁니다."
"적층 출력 흔적입니까."
오성훈이 물었다.
서도경은 바로 고개를 젓지 않았다.
"가능성 중 하나입니다. 출력이라고 부르려면 비교 표본이나 단면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규칙적인 층과 오래된 안료층의 선후가 맞지 않는다고만 하겠습니다."
강예림이 검사실의 카메라를 가리켰다.
"촬영 원본은 모두 받겠습니다."
"계약 전인데도요?"
"계약 전이라서 받는 겁니다."
강예림은 오성훈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동 금지. 조명과 검사 순서 변경 시 사전 동의. 촬영 원본 보존. 외부 보존과학자 검증 결과가 나올 때까지 거래 보류.
오성훈의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필요 없는 작품이었다면 팀장님이 봉인 테이프부터 들고 오지 않았겠죠."
진우는 현재 작품의 오른쪽 아래를 보았다. 반입 사진의 같은 자리에는 얇은 찢김이 있었다. 지금의 캔버스에는 찢김이 없었다. 대신 그 위에 새로 칠한 듯한 어두운 보강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입 당시 사진을 볼 수 있습니까."
오성훈이 입을 다물었다.
강예림이 낮게 말했다.
"보여 주세요. 이 자료도 열람 기록에 포함하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태블릿을 꺼냈다. 사진 속 정물화는 현재 작품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오른쪽 아래의 찢김 위치가 손톱 하나만큼 달랐다. 프레임의 못 자국도 두 개 모자랐다.
서도경이 화면을 확대했다.
"같은 화면을 복제했거나 같은 작품을 손댄 겁니다. 어느 쪽인지 알려면 후면을 더 봐야 합니다."
진우는 사진보다 오성훈의 반응을 보았다. 그는 찢김보다 프레임 못 자국을 보고 있었다.
검사실을 나왔을 때 복도 끝의 카메라가 짧게 깜빡였다.
마두식은 벽에 붙은 봉투함 앞에서 멈췄다. 봉투함의 잠금쇠는 닫혀 있었지만 먼지가 한쪽으로만 밀려 있었다.
"여기 누가 만졌습니다."
오성훈이 돌아섰다.
"수장관리실은 매일 정리합니다."
"정리한 먼지는 왜 봉투함 안쪽에만 없습니까."
마두식은 봉투함 아래 바닥을 가리켰다. 흰 종이 섬유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집지 않고 휴대전화로 위치만 촬영했다.
강예림이 오성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별도 봉투를 주시죠."
"그건 소유권 검토 문서입니다."
"그래서 더 봐야 합니다."
오성훈은 한참 뒤 붉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앞면에는 L-5 / 매도 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 봉합선은 한 번 뜯겼다가 다시 붙인 흔적이 있었다.
진우는 봉투를 열기 전에 기록했다. 봉투의 상태. 인계 시각. 인계자. 강예림은 그 모든 항목을 확인한 뒤에야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짧은 메모 한 장과 서류 사본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메모는 단문이었다.
L-5는 2호 상자 관련 자료 확인 전 이동 금지.
작성자 이름은 없었다. 날짜도 없었다. 다만 메모 아래에 P.T.라는 이니셜이 눌러 찍혀 있었다.
진우는 숨을 고르고 서류 사본을 넘겼다. 첫 장은 1998년 서울 경매 위탁 확인서의 일부였다. 대구 법무사가 말한 봉투와 같은 종류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장은 작품 사진의 확대본이었다.
사진 뒷면에는 작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윤창호 수장품 정리. 2호.
진우의 손가락이 종이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지금 손에 있는 것은 박태준을 단죄할 증거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멈춰 있던 기록이 루체의 수장관리실까지 이어지는 길은 분명해졌다.
강예림이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계약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이 문서를 누가 썼고 누가 지금 바꾸려 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구의 봉투 원본과 이 사본의 종이와 잉크를 대조해야 합니다."
강예림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붉은 봉투를 진우 쪽으로 밀었다.
"그럼 이 방에서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부터 찾죠."
그 순간 수장관리실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출입 로그 한 줄이 새로 갱신되어 있었다.
방문자: 박태준
갱신 기록은 현재 시각이었다. 그러나 출입 카드가 찍힌 시각은 아니었다. 비고란에는 수동 수정이라고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