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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공개 초대장
대구에서 걸려 온 전화는 열차 시간표보다 먼저 진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법무사의 목소리는 낮았다. 사무실 문을 닫고 말하는 사람 특유의 눌린 숨이 수화기 너머에 섞여 있었다.
"서진우 선생님. 봉투는 있습니다. 메모도 있습니다. 다만 원본 사진은 지금 보내기 어렵습니다."
"사진은 보내지 마십시오. 보관 장소와 확인 시각만 문자로 남겨 주십시오."
마두식이 옆에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방금 전까지 대구행 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빨리 움직이는 쪽이 항상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이는 사람보다 쉽게 사라졌다.
"메모 내용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박태준에게 직접.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은 선명하고 이름 끝 글자는 눌려 번졌습니다. 봉투 안에는 1998년 서울 경매 위탁 확인서 사본이 들어 있었습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박태준.
그 이름은 오래전 자신을 밀어낸 사람의 이름과 너무 가까웠다. 그러나 가까운 것과 같은 것은 달랐다. 진우는 그 차이를 붙잡았다.
"그 봉투를 만진 사람 이름을 지금부터 적어 두십시오. 봉투 위치를 옮긴다면 시간과 이유도 같이 남겨 주시고요."
"이 정도 일입니까."
"그 정도 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중에 큰일이라고 말하면 이미 늦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마두식이 턱을 문질렀다.
"대구로 바로 안 가?"
"갑니다. 다만 원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기록부터 세워야 합니다."
"아이고. 종이 한 장 보러 가는 길도 재판장 들어가는 기분이네."
진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이세라가 보낸 메시지가 이어서 떠 있었다. 보존 기사 반응이 생각보다 빨랐다. 댓글에는 무명 감정사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말과 사기라는 말이 같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 낯선 번호가 있었다.
문자는 짧았다.
갤러리 루체 강예림입니다. 박수근 목판 건으로 비공개 상담을 요청드립니다. 시간은 선생님 조건에 맞추겠습니다.
마두식이 화면을 흘끗 보더니 휘파람을 삼켰다.
"루체면 돈 냄새가 아니라 돈 창고 냄새가 나는 데요."
진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이름값이 높은 곳일수록 이름을 빌려 쓰는 법도 빨랐다. 그는 대구 봉투의 보관 확인 문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삼 분 뒤 법무사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보관 장소와 시각과 담당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제야 진우는 강예림에게 답했다.
오늘 한 시간. 상담 내용은 기록합니다. 비공개 조건은 사전에 서면으로 확인합니다.
답장은 거의 곧바로 왔다.
좋습니다. 기록권은 선생님에게 두겠습니다.
진우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너무 쉽게 내주는 조건은 보통 더 큰 조건을 숨긴다.
갤러리 루체의 비공개 응접실은 전시장보다 조용했다. 벽에는 작품이 없었다. 대신 얇은 회색 패브릭 패널과 낮은 테이블만 있었다. 작품을 보러 온 사람보다 계약서를 쓰러 온 사람이 편해할 방이었다.
강예림은 문 앞에서 진우를 맞았다. 검은 재킷과 낮은 굽의 구두가 걸음마다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사에서 본 것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시네요."
"기사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만 빠집니다."
강예림이 웃었다. 웃음은 얕았지만 시선은 곧장 들어왔다.
"그래서 모셨습니다. 루체에는 공개하지 못하는 수장품이 있습니다. 제 이름으로도 마음대로 열 수 없는 방입니다."
"그 방을 열 권한이 없는 분이 저를 부른 겁니까."
"열 권한은 있습니다. 믿을 권한이 없을 뿐입니다."
진우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마두식은 방 한쪽에 선 채 조명을 살폈다. 천장의 작은 카메라 위치를 세는 눈치였다.
강예림이 테이블 위에 얇은 계약서를 놓았다. 비공개 감정 컨설팅. 일회성 자문료. 결과물 외부 공개 금지. 루체 명의 보도자료 사용 가능.
진우는 마지막 줄에서 손을 멈췄다.
"제 이름을 보도자료에 쓰는 조건이면 상담하지 않겠습니다."
"이름값이 필요 없는 분처럼 말씀하시네요."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 데나 쓰지 않습니다."
강예림의 손가락이 계약서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불쾌함보다 흥미에 가까운 리듬이었다.
"서진우 씨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군요."
"돈도 원합니다. 병원에서 이름값으로 계산해 주지는 않으니까요."
마두식이 작게 헛기침했다. 강예림은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럼 더 정확하네요. 돈이 필요한 사람이 돈 때문에만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험이라면 끝났습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강예림은 계약서 한 장을 빼고 새 종이를 올렸다. 홍보 사용 불가. 원본 이미지와 촬영 기록의 사본 제공. 의심 작품 거래 보류. 외부 보존과학자 동석 허용.
진우가 처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누가 섞었습니까."
"모릅니다."
"무엇이 섞였습니까."
"진품과 위작. 그리고 진품인데 진품으로 팔면 안 되는 것들."
강예림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낮아졌다. 시장 안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은 가짜가 아니었다. 진짜인데 주인이 틀린 물건이었다.
"백화윤 이사장 쪽입니까."
강예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진우 씨가 공개한 건 박수근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오래된 물건이 어디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묻는 방식이었죠. 저는 그 방식이 필요합니다."
"루체가 필요합니까. 강예림 씨가 필요합니까."
"둘 다입니다. 하지만 목적은 다릅니다."
진우는 계약서를 읽었다. 문장은 깨끗했다. 깨끗한 문장일수록 빠진 곳이 더 잘 보였다.
"감정 결과가 루체에 불리해도 거래를 멈춘다는 조항이 없습니다."
강예림이 펜을 들었다.
"넣겠습니다."
"제 판단은 최종 감정이 아닙니다. 보존과학 검증과 출처 확인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넣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자료를 숨기고 작품만 보여 주면 계약은 끝입니다."
강예림이 잠깐 멈췄다.
"그 조항까지 넣으면 저도 위험해집니다."
"그 조항이 없으면 제가 위험해집니다."
둘 사이에 말이 끊겼다. 응접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싼 건물들은 사람의 움직임까지 흡수했다.
강예림은 마침내 펜 끝을 종이에 댔다.
"좋습니다."
서도경은 삼십 분 뒤 도착했다. 그는 갤러리 루체 간판을 올려다본 뒤 진우에게 먼저 묻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부터 읽었다.
"의뢰자가 보존과학자 동석을 허용하고 거래 보류 조항까지 넣었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나쁘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겠죠."
"그렇죠."
강예림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그녀는 서도경에게 악수보다 먼저 일회용 장갑과 열람실 동선표를 건넸다.
"오늘은 계약 전 확인입니다. 다섯 점을 보실 겁니다. 모두 서양화이고 루체 공개 목록에는 없습니다."
"서양화요?"
마두식이 낮게 물었다.
"박수근에서 갑자기 서양화라니 판이 바뀌었네."
강예림은 문을 열며 대답했다.
"판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한국 그림은 들키기 쉬워졌고 서양화는 아직 가격표가 더 조용할 뿐이죠."
열람실 안은 차가웠다. 이동식 벽 다섯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천장 조명은 작품마다 다르게 맞춰져 있었다. 작품 앞에는 작가명도 가격도 없었다. 번호만 있었다.
진우는 첫 작품 앞에서 멈췄다. 회색 하늘 아래 항구가 그려진 작은 유화였다. 오래된 나무틀은 자연스럽게 닳아 있었다.
그는 일부러 오래 보지 않았다. 능력이 먼저 말하기 전에 눈이 먼저 볼 시간을 주었다. 색층의 갈라짐과 가장자리 먼지와 뒤틀린 캔버스의 장력을 확인했다.
두 번째 작품은 정물화였다. 세 번째는 초상화였다. 네 번째는 추상화에 가까웠다.
다섯 번째 앞에서 진우의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푸른 식탁 위에 놓인 흰 과일 접시. 화면은 낡았고 바니시는 누렇게 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가장 얌전한 그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진우가 루페를 들자 푸른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대상: 무제 정물화]
[진위 여부: 판정 보류]
[현재 시세: 산정 불가]
[숨겨진 잠재 가치: 조건부 0원 또는 1200000000원]
[판정 단서: 표면 노화와 지지체 시간이 불일치. 하부 지지층에 적층 출력 흔적 가능성]
진우는 숨을 들이마셨다.
진품도 위작도 아닌 표시였다. 가격도 하나가 아니었다. 조건부 0원이라는 숫자는 시장에서 죽은 물건을 뜻했다. 12억이라는 숫자는 누군가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값이었다.
서도경이 진우의 표정을 보고 다가왔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조명을 끄지 마십시오. 작품은 아무도 만지지 마시고요."
강예림의 눈빛이 굳었다.
"다섯 점 중 하나라도 위험합니까."
"위험한 건 작품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마두식이 낮게 욕을 삼켰다.
진우는 다섯 번째 작품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낡은 화면 아래에 너무 규칙적인 층이 숨어 있었다. 붓질이 아니라 쌓아 올린 자국. 오래된 척하는 표면 밑에서 새 물건의 뼈대가 얇게 빛났다.
강예림이 천천히 말했다.
"이 테스트에서 틀리면 계약은 없습니다."
진우는 루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럼 더 좋습니다. 맞히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뜻이죠."
"검증하겠습니다. 맞히는 사람은 이름을 팔고 검증하는 사람은 기록을 남깁니다."
열람실의 냉기가 손끝까지 내려왔다. 대구의 봉투와 루체의 다섯 번째 그림이 서로 다른 길에서 같은 문으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는 처음으로 강예림을 똑바로 보았다.
"이 그림을 루체에 들인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주십시오."
강예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 위로 열람실 밖 복도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