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7화: 목판 뒤의 이름
해동 아트갤러리 보존실의 문이 닫히자 마두식은 목판화를 향해 손부터 뻗었다.
"기름때만 닦으면 그림이 살아날 텐데 뭘 이렇게 뜸 들여. 천에 용제 묻혀서 쓱 닦으면 끝 아니오?"
"끝나면 안 됩니다. 닦았다는 기록만 남고 무엇을 닦아 냈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진우는 목판을 작업대 위에 놓지 않았다. 먼저 정상호에게 낙찰 영수증과 백송선 유품 인계 명세서를 보여 주었다.
"보존실을 빌리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촬영과 작업 일지를 남기고 원본은 이 방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정상호는 곤란한 얼굴로 보존실 안쪽 남자를 가리켰다.
"한도경 선생이 오늘만 장비를 봐 주기로 했습니다. 다만 잘못되면 갤러리는 책임을 못 집니다."
얇은 금속테 안경을 쓴 남자가 목판 가까이 다가왔다. 한도경은 작품 대신 진우가 내민 영수증부터 읽었다.
"제가 보증할 수 있는 건 작업 과정뿐입니다. 박수근 작품이라고 결론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면 다른 사람을 부르시죠."
"결론은 증거가 정합니다. 저는 단서를 찾았습니다. 선생님은 그 단서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한도경은 대답 대신 장갑을 끼고 작업대 조명을 낮췄다. 적외선 카메라가 목판의 뒷면을 천천히 훑었다.
모니터에는 검은 얼룩뿐이던 나무결 사이로 희미한 획이 떠올랐다. 뒤집힌 글씨의 끝이 길게 휘어 있었다.
"후대 바니시가 여러 번 발린 것 같군요. 이걸 함부로 녹이면 원래 안료도 같이 들립니다."
진우의 시야에 푸른 글자가 번졌다.
[대상: 목판 기름물감 소품 <아기 보는 소녀>]
[진위 여부: 진품 (정밀도 94.6%)]
[현재 시세: 30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450,000,000원]
[핵심 단서: 후면 변색 바니시 아래 친필 서명과 제작 연도. 백송선 수장인 대조]
숫자는 어제보다 선명했지만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카메라가 잡은 흐린 획 하나가 지금은 그 숫자보다 중요했다.
한도경은 목판 옆면에 작은 자를 댔다. 그는 나무결의 방향을 확인한 뒤 고배율 현미경 화면을 진우 쪽으로 돌렸다.
"이건 합판이 아니라 한 장 목판입니다. 표면 안료는 거칠게 올라갔지만 바니시보다 먼저 갈라졌어요. 선후관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안료 조각을 뜯지 않고 형광 반응도 봐야 합니다."
"필요한 촬영은 전부 하십시오. 다만 시료 채취는 안 됩니다."
"좋습니다. 그 조건이면 비파괴 검사로 여기까지는 말할 수 있겠네요. 후대에 무언가를 덮은 건 맞는지부터 보죠."
진우는 작업대 옆에 휴대폰을 세워 시간 표시가 보이게 했다. 시작 시각과 참석자 이름, 낙찰 번호를 메모했다. 목판이 진품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언제 누가 어떤 상태에서 확인했는지를 남기는 편이 먼저였다.
한도경은 목판 가장자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아주 작은 용해도 시험지를 댔다. 면봉 끝이 누렇게 물들었다.
"기름이 아닙니다. 후대에 덧입힌 합성수지 계열 바니시예요. 그을음을 가리려고 발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거할 수 있습니까?"
"제거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한 번에 벗기면 작품을 망칩니다."
마두식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진우가 고개를 젓자 뒤로 물러났다.
"사장님은 이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주세요. 면봉 번호가 보이게요. 나중에 누가 손댔다고 말해도 작업 순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이 그림값을 올려 주나?"
"아니요. 거짓말로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작업은 생각보다 느렸다. 한도경은 현미경 사진을 찍고 면봉 하나를 쓸 때마다 번호를 붙였다. 형광 조명 아래 바니시 층은 푸른 막처럼 따로 빛났다. 원래 안료층은 그 아래에서 거칠고 어두운 질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니시가 녹아 나온 자리에 나무결과 검은 글씨가 조금씩 드러났다. 첫 번째 획은 '朴'의 왼쪽 부분이었다. 마두식이 숨을 삼키며 몸을 기울였지만 한도경이 손을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숨결만으로도 표면 습도가 달라집니다."
그때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작업을 멈추시오. 그 목판은 백만 원이 아니라 오백만 원을 드리겠소."
검은 모자 남자의 목소리였다.
"작품이 진품인지도 모르는 분이 가격부터 올리시는군요."
"당신은 모르는 게 많습니다. 전화 끊고 뒤를 보시오."
유리창 밖 골목에는 검은 승합차가 서 있었다. 마두식이 커튼을 치려 했지만 진우가 막았다.
"숨기면 작업을 멈춘 티가 납니다. 대신 기록을 남기죠."
진우는 정상호에게 전화 시각과 차량 번호가 보이는 창밖 사진을 보안카메라 기록과 함께 저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작업 일지의 중간 사진은 오현정에게도 전송했다. 작품의 상세 단서는 빼고 보존실에서 외부 압박이 있었다는 사실과 시간만 남겼다.
"자료관 직원에게까지 보낼 필요가 있습니까?" 정상호가 물었다.
"이 방에 있는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밖에 남은 기록 하나가 더 낫습니다."
한도경은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작업실에서 통화하실 거면 나가 주십시오. 손이 흔들리면 제일 먼저 이 그림이 다칩니다."
진우는 짧게 사과하고 문가로 물러났다.
두 시간 뒤 마지막 바니시 층이 얇게 걷혔다. 모니터 속 글씨는 더 이상 획 하나가 아니었다.
朴壽根 1954.
서명 아래에는 작은 붉은 원형 인장이 있었다. 한도경이 촬영 화면을 확대했다.
"이쪽은 백송선의 수장인과 비교해 볼 수 있겠군요. 명세서에 찍힌 인영을 스캔해도 되겠습니까?"
"원본은 이 방에서만 다뤄 주십시오."
"그 정도 원칙은 저도 압니다."
명세서의 붉은 인영과 목판의 인장이 화면 위에서 나란히 놓였다. 획의 끊긴 자리와 테두리의 작은 흠집까지 맞아떨어졌다.
한도경은 목판의 목질 사진과 안료의 형광 반응 표를 작업 일지에 붙였다.
"목판의 수종은 당시 흔히 쓰인 소나무 계열이고 안료층의 노화도 바니시보다 앞섭니다. 서명과 인장이 후대에 새로 쓰인 흔적도 없어요. 다만 최종 감정에는 작가 연구자와 비교 작품이 더 필요합니다."
마두식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진짜네. 이걸 누가 썩은 나무판이라고 했어."
"아직 '박수근 진품'이라는 한 줄로 끝낼 단계는 아닙니다."
진우는 화면 속 1954를 바라봤다. 잠재 안목이 가리킨 방향은 맞았다. 그러나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그 푸른 글자가 아니라 면봉 번호와 촬영 시각, 지워진 바니시 아래에서 나온 한 줄의 서명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발견이 아니라 확인까지만 공개하겠습니다."
정상호가 보존실 문턱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산 근현대미술 소식지 편집장이 내일 내려온답니다. 경매장에서 건진 작품이 보존 처리 중이라는 말이 돌았나 봐요."
"누가 말했습니까?"
"내가 말한 건 아닙니다."
진우는 창밖 승합차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누군가는 목판의 가치를 몰라도 진우가 붙잡은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음 날 편집장 이세라는 촬영 원본보다 먼저 제목을 물었다.
"'무명 감정사의 박수근 발견' 어떻습니까? 독자들이 좋아할 거예요."
"그 제목은 쓰지 마십시오. 확정 감정 전이고 저는 감정원이 아닙니다."
"그럼 뭘 쓰죠?"
"'백송선 유품 목판 소품에서 확인된 서명과 제작 연도'. 낙찰 영수증과 보존 작업 기록을 함께 싣고 한도경 선생의 이름도 넣어 주세요."
"그렇게 쓰면 화제성이 약한데요."
"화제보다 나중에 틀리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자료 외에 다른 종이 상자나 드로잉 이야기는 묻지 마십시오. 공개할 생각 없습니다."
이세라는 한참 진우를 보다가 노트북을 덮었다.
"요즘은 다들 이름부터 내걸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대신 검증 과정을 사진으로 보여 주죠."
기사에는 서명과 수장인의 적외선 촬영 전후 사진, 바니시 층의 현미경 사진, 낙찰 영수증의 출품 번호가 실렸다. 한도경의 코멘트도 짧게 붙었다. 후대 처리층 아래의 정보를 분리해 확인한 것이며 최종 판단에는 추가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오후 소식지 웹페이지의 알림이 잇달아 울렸다. 기사 끝에는 진우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진우. 작품 소유자 겸 조사 의뢰인.
누명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기록에 남았다. 진우는 화면을 오래 보지 않고 기사 캡처와 작업 일지를 별도 저장했다.
마두식은 조회 수를 새로고침하다가 웃었다.
"인사동 쪽 딜러들도 퍼 갔소. 이제 누구든 네 이름을 한 번은 보겠는데?"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작품을 샀다는 사실만 알려졌지, 제가 무엇을 더 찾는지는 알려져선 안 됩니다."
진우는 이세라에게도 기사에 나온 자료 외의 문의는 모두 한도경에게 돌려 달라고 요청했다. 한도경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작업 일지 사본을 봉투에 넣었다.
"이름은 빼도 되는데 왜 내 이름까지 싣게 했습니까?"
"저 혼자 찾아냈다는 기사보다 선생님이 검증했다는 기록이 오래 갑니다."
한도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음에 또 근거 없는 확신을 들고 오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때도 근거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마두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대구에서 전화 왔소. 윤창호 수장가 상속 정리를 맡았다는 법무사라는데."
진우가 전화를 받자 낯선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식지 기사를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백송선 유품 명세서에 나온 종이 상자 2호를 찾으시는 겁니까? 윤 선생 장부에는 1998년 서울 경매 위탁으로 적혀 있습니다."
"수령인이 누굽니까?"
"전체 이름은 지워졌습니다. 다만 윤 선생이 남긴 봉투에 메모가 하나 있어요. '박태…에게 직접'."
진우의 손이 굳었다.
박태준일 수 있다.
하지만 이름 세 글자만으로 사람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봉투와 장부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제가 대구로 가기 전에 사진도 보내지 마세요. 보관 장소와 열람 가능한 시간을 문자로 남겨 주시면 됩니다."
전화를 끊은 진우는 부산역 행 택시를 불렀다. 이번에는 대구로 가는 열차표를 예매했다.
목판 뒤에서 드러난 이름은 한 사람의 작품을 살렸다.
이제 종이 상자에 남은 반쪽 이름은 진우를 다시 자신을 밀어낸 사람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