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0화: 교체된 캔버스와 새 열쇠
수장관리실 모니터에 뜬 붉은 알림 창은 깜빡임을 멈추지 않았다.
방문자 박태준.
수동 수정이라는 네 글자 아래로 수정 단말기의 식별 번호가 길게 늘어섰다.
오성훈 팀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마우스를 쥐고 창을 닫으려 손가락을 떨었다.
진우는 그보다 반 걸음 먼저 손을 뻗어 모니터 옆의 전원 스위치를 가렸다.
"손대지 마십시오."
"이건 단순한 시스템 점검입니다. 외부 딜러 등록 과정에서 전산 오류가 난 겁니다."
"전산 오류가 관리자 권한을 가진 내부 단말기에서 직접 수정으로 찍힙니까."
진우가 가리킨 단말기 번호는 바로 오성훈이 앉아 있던 책상의 본체 번호와 끝자리 세 개가 일치했다.
서도경이 얇은 금속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화면을 가리켰다.
"외부에서 카드를 긁고 들어온 기록이 아닙니다. 이 방에 있는 컴퓨터로 로그인해서 몇 분 전에 수동으로 덧입힌 로그예요. 누군가 박태준이라는 이름을 일부러 띄워 시선을 돌리려 했거나 반대로 흔적을 덮으려 한 겁니다."
마두식이 문 앞을 등지고 서서 팔짱을 꼈다.
"어쩐지 아까부터 구두 뒤축 소리가 부산하더니 자기 손으로 로그를 치고 있었구먼."
오성훈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서류철을 가슴에 바짝 끌어안았다.
"강 실장님. 외부인들 앞에서 수장고 내부 전산망을 열어두는 건 사규 위반입니다. L-5 정물화는 매입 계약 최종 승인 전 단계입니다. 원작자의 위탁 대리인이 오늘 밤 회수를 요구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격리 수장고로 옮겨야 합니다."
"위탁 대리인이 누구입니까."
강예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가라앉았다. 그녀는 오성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루체가 이 작품을 얼마에 사들이기로 계약했죠."
"십이억 원입니다. 이사회 비공개 승인 건이고 계약금 삼억 원은 이미 에스크로 계좌에 묶여 있습니다. 오늘 자정이 지나면 자동 결제로 넘어갑니다."
강예림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수장관리팀장이 서둘러 작품을 빼돌리려 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 자정이 지나 계약이 성립되면 가짜든 진짜든 루체가 모든 대금을 치르고 떠안아야 했다.
진우는 차분하게 검사실 문을 열었다.
"작품부터 확인하죠. 자정이 지나기 전에 무엇이 십이억 원이고 무엇이 영 원인지 확정해야 합니다."
검사실의 수은등이 다시 켜졌다.
진우는 흰 면장갑을 고쳐 꼈다. 그의 눈앞에 떠 있는 푸른빛 인터페이스는 여전히 차가운 문장을 띄우고 있었다.
[대상: 무제 정물화]
[진위 여부: 판정 보류]
[현재 시세: 산정 불가]
[숨겨진 잠재 가치: 조건부 0원 또는 1,200,000,000원]
[판정 단서: 표면 노화와 지지체 시간이 불일치. 하부 지지층에 적층 출력 흔적 가능성]
서도경이 고배율 확대경과 특수 UV 램프를 들고 다가왔다.
"진우 씨.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 못 자국과 오른쪽 아래 찢김 위치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진우는 오성훈이 제출했던 반입 당시 원본 사진을 태블릿 화면에 띄웠다.
"사진 속 캔버스 모서리를 보십시오. 1950년대 유럽산 리넨 천 특유의 굵고 불규칙한 삼베 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 프레임 고정 부위에는 녹슨 쇠못 자국 세 개가 삼각형 형태로 찍혀 있죠."
서도경이 자외선 램프를 현물 캔버스의 뒷면에 비췄다.
푸른 광선 아래에서 캔버스의 섬유 조직이 형광 백색으로 강하게 발광했다.
"현대식 합성섬유 혼방입니다. 1950년대 캔버스 천은 이런 파장의 자외선 아래에서 형광을 내뿜지 않아요. 표백제를 먹인 나일론 혼방 리넨입니다."
마두식이 혀를 찼다.
"틀은 옛날 나무인데 천은 요즘 동대문에서 끊어 온 천이라는 소리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진우가 루페를 캔버스 표면의 짙은 암갈색 배경에 밀착시켰다.
"바니시 아래의 물감 층을 보십시오. 붓으로 갠 유화 안료의 자연스러운 융기가 아닙니다. 가로 0.05밀리미터 간격으로 미세한 수지 방울이 분사되어 쌓인 평행선이 보입니다."
서도경이 현미경 카메라를 접사 모드로 전환했다. 모니터에 물감 층의 단면이 거대하게 확대되었다.
화면 위에는 마치 등고선처럼 일정한 높이로 겹쳐진 폴리머 적층선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고해상도 3D 스캔 데이터를 기반으로 질감을 인쇄한 뒤 그 위에 인위적인 유화 바니시와 크랙 유도제를 바른 복제품입니다. 원본의 찢김과 흠집까지 정밀하게 3D 데이터로 복제해서 찍어냈지만 못 자국과 섬유 성분까지는 완벽히 일치시키지 못했군요."
진우의 눈동자에 맺힌 푸른 숫자가 마침내 한쪽으로 굳어졌다.
[대상: 무제 정물화 (3D 적층 정밀 복제 위작)]
[진위 여부: 위작 (정밀도 99.4%)]
[현재 시세: 0원]
[숨겨진 잠재 가치: 0원]
[판정 단서: 현대식 복합 수지 및 자외선 반응 리넨 지지체. 3D 프린팅 적층 노즐선 확인]
조건부 십이억 원이라는 숫자가 사라지고 완벽한 영 원이 화면을 채웠다.
진우는 루페를 내려놓았다.
"반입 당시에 들어왔던 진짜 캔버스는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려졌습니다. 루체에 남겨진 이 물건은 십이억 원의 계약금을 가로채기 위해 걸어둔 정교한 껍데기입니다."
검사실 안이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였다.
오성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을 듯 휘청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현지 감정서와 도록 사본까지 다 첨부된 물건이었습니다."
"그 감정서는 진짜 원본에 붙어 있던 서류였겠죠. 그 서류를 복제 위작에 덧붙여 루체에 팔아넘기고 진짜 원본은 자유항이나 다른 암시장으로 빼돌리는 수법입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그 계약을 자정 전에 서둘러 완료시키려던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강예림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매입 계약서 원안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 망설임은 없었다. 십이억 원짜리 결재 문서가 두 조각으로 찢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성훈 팀장."
강예림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본사 법무팀과 감사팀을 지금 호출했습니다. 당신의 사원증과 수장고 마스터키는 즉시 회수합니다."
"강 실장님. 저는 위탁자가 시키는 대로 보관 절차를 밟았을 뿐입니다. 박태준 선임연구원이 추천한 안전한 위탁선이라고 해서……."
오성훈이 무심결에 내뱉은 이름에 진우의 시선이 번쩍였다.
"박태준이 직접 추천했습니까."
오성훈은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강예림이 서랍에서 빼낸 별도 봉투와 위탁자 서류 사본을 가리켰다.
"위탁 법인의 대표 주소지가 페이퍼컴퍼니로 등록되어 있더군요. 그 법인의 등기 이사 명단에 박태준의 자문 회사가 올라와 있습니다. 감사팀이 조사하면 모든 거래 내역과 자금 흐름이 드러날 겁니다."
보안 요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오성훈의 양팔을 붙잡았다.
오성훈이 끌려 나가자 검사실에는 진우와 강예림, 마두식, 서도경 네 사람만이 남았다.
강예림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충격과 함께 짙은 안도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서진우 씨가 아니었다면 오늘 밤 루체는 십이억 원의 현금을 날리고 위작 유통 갤러리라는 치명적인 오명을 뒤집어쓸 뻔했습니다."
"위작 카르텔은 상대의 신뢰와 권위를 역이용합니다. 박태준은 루체의 자금력을 이용해 위작을 털어내고 원본을 세탁하려 한 겁니다."
진우는 대구의 윤창호 봉투 도장이 찍힌 사진 사본을 가리켰다.
"이 사진 뒤에 찍힌 윤창호 수장품 정리 2호 도장과 P.T. 이니셜 메모는 대구에 있는 원본 자료와 연결됩니다. 루체에 남아 있는 이 서류들을 공식 증거물로 봉인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팀 자료와 함께 법적 봉인을 걸어두고 서진우 씨가 필요할 때 언제든 대조할 수 있도록 열람권을 보장하죠."
서도경이 작업 일지와 촬영 데이터가 담긴 외장하드를 케이스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미경 단면 사진과 UV 발광 데이터도 전부 백업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완벽하니 법적으로 반박할 여지는 없습니다."
강예림은 진우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진우 씨에게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제안을 다시 드리고 싶군요."
"제안이라면……."
"여기서 나가지요. 보여드릴 곳이 있습니다."
강예림의 차는 강남을 빠져나와 종로 인사동으로 향했다.
밤 아홉 시의 인사동 거리는 갤러리와 골동품점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며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차는 인사동 쌈지길 인근 메인 거리 한복판의 4층 석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강예림이 차에서 내려 건물의 1층 통유리 문 앞으로 진우 일행을 안내했다.
"여깁니다."
그녀가 가방에서 은색 열쇠를 꺼내 잠금장치를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고 넓은 실내 공간이 드러났다.
천장에는 최신식 전시용 레일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고 바닥은 고급스러운 연회색 에폭시로 마감되어 있었다. 안쪽에는 항온항습 장치가 갖춰진 소형 수장고와 방화 금고실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마두식이 입을 떡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고 세상에. 인사동 메인 길목 일층에 이런 알짜 공실이 있었단 말이오? 여기 권리금만 해도 억 단위가 넘어갈 텐데."
"제 개인 법인 소유 건물입니다. 이전 갤러리가 확장 이전하면서 아껴두었던 자리예요."
강예림이 진우를 돌아보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임대차 계약서였다.
"보증금 오천만 원에 월 임대료는 관리비 포함 백만 원입니다. 주변 시세의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조건이죠."
진우는 계약서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
"파격적인 조건이군요. 하지만 저는 루체의 산하 지점이나 종속된 감정사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진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강예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체 명의가 아니라 서진우 씨 개인 명의의 독립 갤러리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운영, 전시, 감정 자문 전권을 서진우 씨가 가집니다. 루체는 정기적인 미술품 가치 평가 자문 계약을 맺고 그 자문료로 월세를 상계 처리하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시는 겁니까."
"오늘 증명해 주셨잖아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타협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요."
강예림의 눈빛은 맑고 확고했다.
"위작 카르텔과 싸우려면 서진우 씨만의 독립된 진지가 필요합니다. 이곳을 당신의 무대로 만들어 보세요."
진우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계약서 특약 사항에 한 줄을 덧붙였다.
[감정 및 자문 결과에 대해 일체의 외부 압력이나 상업적 수정을 가할 수 없으며 감정서의 최종 승인권은 대표 서진우에게 있다.]
강예림이 그 조항을 읽고 흔쾌히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완벽하네요."
은색 열쇠가 진우의 손바닥 위에 쥐어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속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강예림과 서도경이 떠난 뒤 1층 공간에는 진우와 마두식 두 사람만이 남았다.
마두식은 통유리창에 기대어 밤거리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진우야. 인사동 벼룩시장 흙바닥에서 십오만 원짜리 궤짝 뒤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번듯한 일층 갤러리 주인이 됐구나."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진우는 천장의 레일 조명을 켰다. 따뜻한 백색 조명이 텅 빈 벽면을 환하게 비췄다.
"이곳에 어떤 작품들을 채울 생각이지?"
"진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숨겨진 명작들, 그리고 거짓과 위작에 짓밟힌 진실들을 채울 겁니다."
진우의 시야에 텅 빈 공간의 벽면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득 차올랐다.
마두식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대구 법무사한테 연락 왔다. 내일 오전 열 시에 윤창호 수장가의 봉투 원본과 2호 상자 관련 장부를 직접 보여주겠단다."
"좋습니다. 첫차로 내려가죠."
진우는 유리창 너머로 어둠에 잠긴 인사동 골목을 바라보았다.
누명을 쓰고 쫓겨났던 감정사 서진우는 이제 없었다.
자신만의 절대적인 눈과 과학적 증거로 미술계의 거대한 카르텔을 뒤흔들 새로운 이름.
"갤러리 아르케."
진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이 텅 빈 전시장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