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4화: 가짜의 품격
오전 열 시, 인사동 갤러리 아르케의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진우는 안내 데스크 위에 화랑 개업 신고증과 사업자등록증, 갤러리 루체와의 전속 자문 협약서를 정돈했다. 법적으로 아르케는 빈틈없는 독립 화랑이었다.
소파의 마두식이 믹스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종로삼가지점 창구 전표 말이오. 2019년 이후 내역은 전산에 남아 있지만 영장 없이는 열람을 안 해 줍디다. 당시 창구 자필 서명 조각이라도 떼어낼 수 있는지 다리를 놓는 중이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진우가 서류를 덮었다.
“상대는 감정원에서 십 년 넘게 잔뼈가 굵은 자입니다. 꼬리가 밟혔다고 느끼면 곧바로 흔적을 지울 겁니다. 완벽한 물증을 쥘 때까지는 모르는 척 판을 깔아둬야 합니다.”
맞은편의 강예림이 거들었다.
“박태준 연구원이 정식 감사 결재를 받아 올 리도 없어요. 감정원 완장을 차고 겁을 주러 오는 위력 행사일 뿐입니다.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려는 수작이에요.”
“사설 갤러리는 감정원의 하위 기관이 아닙니다.”
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영장 없는 자들에게 내줄 장부는 없습니다.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 조잡한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만입니다.”
그 순간 갤러리 앞 도로에 짙은 감색 세단 한 대가 급정거했다.
문이 열리고 포마드 머리에 안경을 쓴 박태준이 감정원 조사원 둘을 거느린 채 내렸다.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함께 갤러리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박태준은 로비를 둘러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맞춤 정장 포켓의 금색 만년필과 소매 끝에서 번쩍이는 은빛 손목시계가 도드라졌다.
“이야, 감정원에서 쫓겨난 조수가 제법 그럴싸한 가게를 차렸군. 서진우 연구원, 아니 이제 연구원도 아니지. 서진우 씨.”
박태준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배어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젊은 조사원 둘은 클립보드를 든 채 주변을 살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박태준 선임님. 예약도 없이 찾아오시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예의?”
박태준이 코웃음 치며 감정원 직인이 찍힌 공문을 카운터에 내던졌다.
“사기꾼에게 차릴 예의는 없어.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자가 무자격 감정 간판을 걸고 신진 작가를 속여 작품을 후려친다는 투서가 접수됐다. 현장 실사를 나왔으니 즉시 수장고를 열고 고객 명단과 장부를 내놔.”
소파의 마두식이 벌떡 일어섰다.
“이 양반이 어디서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 완장질이오? 당신들이 검찰이야, 경찰이야?”
진우가 손을 들어 마두식을 진정시켰다. 공문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 끝으로 밀어냈다.
“공부를 다시 하셔야겠습니다. 감정원은 비영리 사단법인일 뿐 사법경찰이 아닙니다. 사설 화랑의 수장고와 장부는 법의 보호를 받는 사유재산입니다. 압수수색 영장이라도 받아오셨습니까?”
박태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감정원에는 강제 수색 권한이 전혀 없었다.
강예림이 다가서며 덧붙였다.
“루체 법무팀에서도 기록 중입니다. 법적 근거 없는 침입이 계속된다면 즉시 퇴거 불응과 업무방해로 고소하겠습니다.”
강예림을 본 박태준의 동공이 흔들렸으나 이내 턱을 치켜들었다.
“강 관장님, 이런 파문당한 놈에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 감정원에서 데이터를 빼돌리다 쫓겨난 자입니다. 부친 병원비 때문에 빚더미에 앉은 놈이 무슨 대표 행세를 합니까?”
가족과 병원비를 들먹이는 얼굴 위로 진우를 모함하던 그날의 웃음이 겹쳐졌다.
진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가 쫓겨난 건 조작된 보고서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재선에 누가 있었는지는 조만간 법정에서 밝혀질 겁니다.”
“하! 법정? 네까짓 게?”
실사가 막히자 박태준은 낯빛을 붉히며 손가락질을 했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네가 발버둥 쳐봐야 매장된 쓰레기일 뿐이야. 네까짓 게 진짜 미술의 품격을 알기나 해? 가치를 알아보는 건 공인 감정사의 안목과 자본이다!”
박태준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왼쪽 손목에서 은빛 광채를 뿜는 시계가 번쩍였다. 스위스 하이엔드 브랜드 바텍 필립의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였다.
“이게 뭔지나 알아? 제네바 본사 한정판 바텍 필립 컴플리케이션이다. 억대를 호가하는 명품이지. 네가 평생 만져나 볼 수 있는 줄 알아?”
박태준은 이어 조사원의 손에서 비단 보자기 상자를 낚아챘다. 상자를 열자 족자 형태의 산수화 소품이 나타났다.
“내가 지난달 원로 수장가에게 직접 검증하고 삼천만 원에 소장한 단원 김홍도의 친필 소품 <송하한담도>다. 유려한 필선과 낙관의 깊이를 봐라. 이런 걸 볼 줄 알아야 진짜 감정사란 말이다!”
진우는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눈동자 안쪽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며 투명한 인터페이스가 펼쳐졌다.
[대상: 바텍 필립 컴플리케이션 크로노그래프 가품]
[진위 여부: 정교한 복제 위작 (정밀도 99.1%)]
[현재 시세: 35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0원]
[핵심 단서: 다이얼 6시 방향 문페이즈 별 모양 인쇄 번짐, 밸런스 휠 진동수 21,600vph(정품은 28,800vph), 베젤 재질은 크롬 도금 스테인리스]
[대상: 소품 산수화 <송하한담도> (단원 김홍도 위명)]
[진위 여부: 근대 방작 위작 (정밀도 98.7%)]
[현재 시세: 5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0원]
[핵심 단서: 차염소산염 표백 후 인공 열화 처리된 닥종이, 낙관의 붉은 인주에서 1980년대 이후 개발된 합성 아조(Azo) 유기안료 검출]
글자를 읽어 내린 진우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번졌다.
현재 시세 삼십오만 원짜리 짝퉁 시계, 그리고 오만 원짜리 인공 변색 위작 산수화. 이것이 최고 권위를 자처하던 자가 들고 온 품격의 실체였다.
진우가 안주머니에서 루페와 자외선 램프를 꺼냈다.
“선배님, 품격이라 하셨습니까?”
진우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섰다.
“선배님이 차고 계신 그 억대 시계부터 확인해 드리죠.”
박태준이 팔을 뒤로 뺐다.
“뭐, 뭐야? 네가 시계에 대해 뭘 안다고 손을 대?”
“가만히 계십시오. 바텍 필립 정품 케이스는 18K 화이트골드로만 제작됩니다. 귀금속인 금은 자석에 반응하지 않아야 정상이지요.”
진우는 메모판의 작은 네오디뮴 자석 핀을 떼어내 박태준의 손목시계 베젤 옆으로 가져갔다.
착!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자석이 베젤 모서리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박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이건 내부 부품 때문이야!”
“베젤 전체가 스테인리스 스틸에 크롬 도금을 입힌 하우징이기 때문입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루페로 6시 방향 문페이즈를 보십시오. 바텍 필립의 별은 장인이 금판 위에 에나멜을 수작업으로 구워냅니다. 하지만 선배님 시계는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 별 모서리가 뭉개져 있습니다. 게다가 정품 캘리버의 밸런스 휠은 시간당 이만 팔천팔백 번 진동해 초침이 물 흐르듯 미끄러져야 합니다. 그런데 선배님의 초침은 뚝, 뚝 끊기며 시간당 이만 천육백 번으로 움직이는 중국산 복제 무브먼트의 박자군요.”
진우가 자석을 떼어냈다.
“동대문 골목에서 삼십오만 원이면 구하는 전형적인 짝퉁 시계입니다.”
뒤에 서 있던 젊은 조사원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박태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우는 시선을 테이블 위의 족자로 돌렸다.
“삼천만 원을 주고 샀다는 단원의 명작도 보시죠.”
진우는 딸깍 소리와 함께 365나노미터 자외선 램프를 켰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족자의 누런 한지와 붉은 낙관 위로 쏟아졌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200년 된 고서화라면 자외선을 흡수해야 할 종이 표면이 섬뜩할 정도로 밝은 청백색 형광을 뿜어냈다.
“어떻습니까?”
진우가 루페를 들이대며 짚었다.
“조선 후기 닥종이가 자외선 아래에서 형광 반응을 일으킵니까? 낡아 보이게 하려고 락스의 주성분인 차염소산염으로 탈색하고 열풍기로 인공 열화 처리한 종이의 흔적입니다.”
진우는 자외선 불빛을 오른쪽 아래 낙관으로 옮겼다. 낙관은 붉은빛 대신 기괴한 형광 연두색으로 발광했다.
“단원 김홍도 시절에는 천연 광물인 진사(辰砂)를 갈아 인주를 만들었습니다. 진사 인주는 자외선 아래에서 묵직한 검붉은색으로 가라앉아야 합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낙관은 형광 연두색으로 번쩍이고 있죠. 1980년대 이후 개발된 합성 아조 염료가 섞인 현대식 도장 인주라는 증거입니다.”
진우가 램프를 끄며 차갑게 선언했다.
“가짜 종이에 현대식 화학 인주를 찍은 삼류 모작. 현재 시세 오만 원도 아까운 물건입니다.”
적막이 내려앉은 로비에 마두식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으하하하하!”
마두식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공인 감정원 선임연구원이 손목에는 삼십오만 원짜리 짝퉁을 차고 오만 원짜리 장난감 그림을 삼천만 원 주고 샀다고 자랑질을 하러 오셨네! 이보쇼 박 선임, 인사동 노점상들도 그런 물건은 부끄러워서 안 올려놓소!”
두 조사원은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박태준은 온몸을 떨며 족자를 허겁지겁 말아 쥐었다.
“너…… 감히 누구를 모함해! 협회의 이름으로 너를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다!”
진우가 다가섰다. 그리고 박태준의 귓가에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대구 서문동 수장고 2호 상자.”
박태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었다.
“종로삼가지점에서 매달 꼬박꼬박 쏜 보관료 삼만 원. 그리고 윤창호 봉투 안쪽에 붙어 있던 선배님 이름의 메모.”
진우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음은 선배님 차례입니다.”
박태준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종로삼가지점과 대구 수장고의 비밀을 진우가 쥐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박태준은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했다. 가짜 족자를 품에 안고 손목을 옷소매로 가리며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가자! 빨리 차에 타!”
박태준은 감색 세단에 몸을 던졌다. 차창 너머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두고 봐라! 이번 한성옥션 경매에서 윤성철 이사장님이 진품 보증하신 백자 달항아리가 최고가를 찍는 순간, 네놈 같은 사기꾼은 영원히 끝장이다!”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는 연기를 내뿜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갤러리 안에는 다시 고요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마두식이 눈물을 훔치며 껄껄 웃었다.
“아이고 배야, 살다 살다 저렇게 도망치는 꼴은 처음 보네. 진우 씨, 아까 시계에 자석 달라붙을 때는 내 속이 다 뻥 뚫리더이다!”
강예림 역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준은 이제 감정원 안에서도 입지가 좁아질 거예요. 함께 온 조사원들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갈 테니까요. 하지만 마지막에 던진 말이 마음에 걸리네요.”
“한성옥션 경매 말씀이십니까?”
강예림이 가방에서 두툼한 고급 도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음 주에 열리는 한성옥션 메이저 정기 경매 특별 도록이에요. 표지를 보세요.”
도록 표지 전면에는 우아하고 풍만한 조선 후기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실려 있었다.
추정가 백억 원.
그 아래에는 한국미술감정협회 이사장 윤성철의 친필 서명이 박힌 진품 보증서가 인쇄되어 있었다.
“윤성철 이사장이 이름을 걸고 보증한 금세기 최고의 달항아리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어요. 이번 경매를 통해 감정 협회의 독점적 권위를 완성하려는 속셈입니다.”
진우는 조용히 도록 표지를 어루만졌다.
박태준의 배후이자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거대한 벽, 윤성철.
진우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감정표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언제나 인간의 탐욕이지요.”
진우의 시선이 달항아리의 하얀 곡면에 가닿았다. 다음 전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