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3화: 스무 폭의 시간
아침 햇살이 인사동 갤러리 아르케의 통유리창을 비추고 있었다.
진우는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정리했다. 대구 서문동 수장고의 2호 상자 열람 확인서와 봉인 도장 사진, 그리고 청우문화보존회의 등기 사항 증명서였다.
마두식이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그 보존회, 예상대로 바지사장이었소. 법인 주소지는 종로 세무사 사무실 구석의 우편함 하나뿐이고 대표자로 적힌 노인은 삼 년 전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자요.”
“입금 계좌는 어떻습니까.”
“매달 대구 수장고로 보관료 삼만 원씩 쏜 은행 지점이 한국미술감정원 본원에서 도보 삼 분 거리인 종로삼가지점이오.”
마두식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박태준 그자가 제 손으로 쏜 게 뻔하지 않소? 당장 감정원 감사실에 찔러 넣어야지, 왜 보고만 있소?”
“증거가 불완전합니다.”
진우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점이 가깝다는 정황만으로는 박태준의 직접 지시를 입증할 수 없습니다. 입금자의 창구 전표나 폐쇄회로 화면, 계좌 원장을 손에 쥐어야 합니다. 서두르면 상대는 또 꼬리를 자르고 숨을 겁니다.”
유리문 벨 소리와 함께 강예림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가죽 파일철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서 대표님, 루체 법무팀의 신진 작가 표준 전속 계약서 양식입니다. 말씀하신 독점 매입 조항과 작가 보호 특약을 반영해 두었어요.”
진우가 서류를 확인하자 강예림이 말을 이었다.
“졸업 전시회에서 본 노유진 작가를 만나러 가시는 거죠? 그 친구는 학교 안팎에서 고집불통으로 찍혀 있습니다. 교수들의 추천서도 거부하고 상업 딜러들의 제안도 전부 내쳤다고 들었어요.”
“작품을 팔지 않겠다는 작가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시간을 헐값에 넘기기 싫었던 거겠죠.”
“갤러리 아르케의 첫 전속 작가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신인의 연작을 통째로 안고 시작하는 건 갤러리 입장에서도 상당한 모험이에요.”
“위험이 없으면 가치도 없습니다.”
진우는 장갑과 루페, 고해상도 카메라를 챙겼다.
“그 작가가 4년 동안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 오늘 제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서울 신길동의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은 재개발을 앞두고 붉은 래커 칠이 어지러웠다.
진우는 금이 간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밴 복도 끝에 철제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패 대신 녹슨 못에 걸린 나무 조각에는 작업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진우가 문을 두드리자 잿빛 작업복 차림의 노유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톱 밑에는 짙은 프러시안 블루와 번트 시엔나 안료가 까맣게 배어 있었다.
“정말 오셨네요.”
“어제 약속드렸잖습니까. 작업실과 기록을 보러 왔습니다.”
열 평 남짓한 공간 벽면마다 캔버스들이 빈틈없이 포개져 있었고 바닥에는 물감 튜브가 널려 있었다. 철제 선반 위에는 두툼한 스케치북과 스프링 노트 세 권이 얹혀 있었다.
노유진이 차가운 보리차를 내밀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볼품없는 곳이에요. 교수님들은 여길 쓰레기장이라고 부르더군요. 팔릴 만한 그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림은 벽에 걸려 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진우는 면장갑을 끼고 캔버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제 전시장 구석의 <비가 오기 전의 계단>을 포함해 스무 점이라고 하셨죠. 순서대로 늘어놓아도 되겠습니까?”
노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며 캔버스 스무 점을 바닥과 벽을 따라 번호 순으로 세웠다.
화면 속에는 모두 같은 장소가 그려져 있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의 돌계단, 뙤약볕 아래 잡초가 자란 계단, 포클레인이 모퉁이를 부수고 간 자리, 빗물 웅덩이가 고인 밤의 풍경까지. 4년간 한 동네가 사라져 가는 시간을 계단이라는 축 위에 새긴 연대기였다.
캔버스 세 점은 실제로 천이 찢겨 나갔다가 뒷면에서 굵은 무명실로 촘촘하게 꿰매져 있었다. 상처를 꿰맨 자국 위로 안료가 다시 두껍게 덮여 독특한 질감을 뿜어냈다.
진우가 숨을 고르고 스무 점의 화면 위로 시선을 모았다. 푸른빛 인터페이스가 시야를 가득 채우며 차가운 텍스트를 쏟아냈다.
[대상: 노유진 회화 연작 <시간의 계단> 전 20점]
[진위 여부: 전 점 작가 친필 진품 (정밀도 92.4%)]
[현재 시세: 점당 300,000원 ~ 500,000원 (일괄 합산 약 8,00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일괄 1,200,000,000원 (조건: 20점 분할 금지, 단일 기획전 개최 및 제작 전 과정 도록 레조네 수록 시)]
[핵심 단서: 2020년 3월부터 2024년 2월까지 특정 재개발 구역 돌계단의 소멸 과정을 20개 시점으로 기록한 단일 서사 연작. 찢어진 캔버스를 꿰맨 3점의 무명실 인장과 작업노트 3권의 기상청 일자별 날씨·안료 배합 기록이 물리적 불가분성을 증명함]
일괄 십이억 원.
푸른 글자를 응시하는 진우의 심장이 낮게 요동쳤다.
한 점씩 쪼개어 시장에 나가면 이름 없는 미대생의 거친 습작으로 취급받아 점당 삼십만 원에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스무 점이 하나의 서사로 묶이고 4년의 기록이 뒷받침되는 순간 이것은 현대 도시의 상실을 증언하는 독보적인 마스터피스가 된다.
진우는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철제 선반으로 다가가 스프링 노트를 집어 들었다.
“노트를 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별것도 없어요.”
진우는 첫 번째 노트를 펼쳤다. 2020년 3월 14일 날짜 옆에 연필로 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계단이 헐렸다. 할머니는 이사했고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울트라마린에 티타늄 화이트를 섞었으나 저 차가운 시멘트의 냄새를 낼 수가 없다.
페이지마다 그날의 강수량과 기온, 사용한 오일과 안료의 비율, 캔버스를 꿰매며 흘린 눈물의 얼룩이 박혀 있었다.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교수들이 왜 이 그림을 싫어했는지 압니까?”
노유진이 흠칫하며 진우를 쳐다보았다.
“너무 어둡고 팔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밝은 단색화나 팝아트 스타일로 바꾸라고 했어요. 말을 안 들으니까 졸업 작품 심사에서 최하점을 주더군요.”
“그들이 틀렸습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그림들은 예쁘게 포장된 장식품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난 4년 동안 사라져 버린 한 세계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겁니다.”
노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우는 캔버스 7번의 뒷면을 가리켰다.
“7번 캔버스의 하단이 찢겨 나갔을 때 교수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버리고 새로 그리라고 했습니다. 규격도 안 맞고 상품성이 떨어진다고요.”
“하지만 당신은 버리지 않고 이불 깁는 무명실로 세 번 겹쳐 꿰맸습니다. 그리고 그 꿰맨 자리 위에 다시 잿빛 물감을 올렸죠. 그 상처 자체가 계단이 겪은 파괴의 역사였으니까요.”
노유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우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갤러리 아르케는 이 스무 점을 모두 사들이겠습니다.”
노유진은 굳은 얼굴로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얼마에요? 몇백만 원 던져주고 가져가서 어디 카페에 한두 점씩 헐값에 넘기려는 거라면 사양하겠어요.”
“단 한 점도 낱개로 팔지 않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이 스무 점은 단 하나의 연작입니다. 단 한 폭이라도 흩어지면 작품의 생명은 끝납니다. 아르케는 이 스무 점을 일괄 매입해 하나의 독립된 컬렉션으로 보존할 겁니다.”
그는 계약서의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선지급 창작 지원금으로 삼천만 원을 즉시 지급합니다. 그리고 이 스무 점이 향후 기획전을 거쳐 판매될 경우 발생하는 순수익의 오십 퍼센트를 작가에게 정산합니다.”
“삼……천만 원이요?”
노유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밀린 방세와 물감값 빚을 모두 갚고도 몇 년간 온전히 그림에만 매달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무명 미대 졸업생에게 제시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진우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작업노트 세 권과 잘라냈던 캔버스 조각 전부를 아르케의 검증 자료실에 영구 기탁해야 합니다. 저는 그림뿐 아니라 이 그림이 탄생한 4년의 모든 고통과 기록을 함께 사겠습니다. 그것들이 없으면 이 그림의 진짜 가치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쥐었다. 종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제 그림을…… 진짜라고 말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가짜를 진짜로 만들 수는 없지만 진짜를 알아보고 지켜내는 건 제 일입니다.”
진우는 펜을 건넸다.
노유진은 거칠게 눈물을 훔친 뒤 계약서 마지막 장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아르케의 특수 무진동 운송 차량이 신길동 골목에 도착했다.
전문 운송 요원들이 캔버스 스무 점을 완충재로 감싸고 작업노트 세 권을 방습 상자에 봉인하는 동안 진우는 현장을 꼼꼼히 기록했다.
작업실 정리를 마친 노유진이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진우 앞에 섰다.
“내일부터는 뭘 하면 되나요?”
“밀린 잠을 자고 따뜻한 밥을 챙겨 드세요. 다음 주부터 아르케 수장고에서 도록 레조네 작업을 위한 1차 구술 녹취를 시작할 겁니다.”
노유진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제 전시장 구석에서 떨고 있던 나약한 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밤 아홉 시, 진우는 인사동 갤러리 아르케 수장고에 도착했다.
수장고 안쪽 전시대 위에 노유진의 1번 캔버스 <비가 오기 전의 계단>이 온화한 조명을 받으며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진우가 작업 일지에 노유진 연작 20점 인수 완료라고 적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강예림이었다.
“서 대표님, 계약은 잘 끝났습니까?”
“방금 수장고에 스무 점 모두 입고했습니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긴장하셔야 할 것 같아요. 방금 감정원 쪽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강예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박태준 연구원이 서 대표님이 신진 작가들을 접촉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아르케의 뒷조사를 시작했어요. 협회 등록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사람이 무자격 불법 감정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내일 당장 감정원 차원의 현장 실사를 들이닥치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진우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올 것이 왔다.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업계에서 매장했던 장본인이 마침내 갤러리 아르케의 문턱까지 직접 발을 들이밀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수장고 벽면에 걸린 캔버스를 응시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박태준은 협회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어요.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권력은 쥔 자의 오만일 뿐 진실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내일 그자가 무엇을 들고 오든 감정표가 거짓말을 하는지 제 눈이 거짓말을 하는지 똑똑히 가려주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우는 조용히 수장고의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캔버스 너머의 진실은 푸른빛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