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2화: 빛이 닿지 않은 전시장
서문동 공동 수장고의 철문은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더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진우는 법무사 서민석에게 받은 열람 확인서를 다시 펼쳤다. 문서 하단에는 윤창호 수장품 2호 상자의 원본 상태를 확인하고 이동 여부를 기록할 권한이 적혀 있었다.
마두식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관리인이 문을 열어 주기로 한 시간이 지났소. 상자가 먼저 나간 건 아니겠지?”
“나갔다면 출입 기록과 CCTV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진우는 공동 수장고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신호음 뒤에 쉰 목소리가 받았다.
“최병호입니다. 법무사님이 연락하셨다는 건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자 안을 여는 건 곤란합니다. 상속인 승인도 없고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상자를 가져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봉인 상태와 보관 기록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이동 예정이라는 안내를 받아서 왔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순간 수장고 뒤편 골목에서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천천히 후진했다.
운전석 불은 꺼져 있었지만 앞유리 너머로 담배 불빛이 움직였다. 마두식이 골목 입구로 돌아섰을 때 차는 이미 건물 모퉁이를 빠져나간 뒤였다.
철문이 열리고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가슴의 명찰에는 최병호라고 적혀 있었다.
“낮에도 어떤 남자가 와서 2호 상자 위치를 물었습니다. 상속인도 위임장도 없어서 돌려보냈는데 밤에 또 왔네요.”
최병호는 열람 확인서를 오래 바라보았다. 진우는 수장고 입구와 벽시계부터 촬영했다.
“개봉 전후 상태를 기록하고 필요하면 내용물의 존재 여부만 확인하겠습니다. 촬영 범위와 시각도 문서에 남기죠.”
“안에 그림이 있다면요?”
“그림인지 아닌지도 아직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물건을 함부로 부르지 않겠습니다.”
최병호는 마침내 문을 더 열었다.
벽면 끝의 빈 칸 앞에 나무 상자 하나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상자 전면에는 붉은 도장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왼쪽 도장은 윤창호 수장품 정리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오른쪽 도장은 둥근 테두리 안에 물결 세 줄과 작은 글자 네 자리가 눌려 있었다.
진우가 상자에 의식을 집중하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대상: 윤창호 수장품 2호 상자]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2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50,000,000원]
[핵심 단서: 두 번째 봉인 도장은 청우상회 계열 보관 표식. 2011년 이후 납부 기록과 내부 서류 봉투의 인수번호 대조 필요]
오천만 원은 상자 자체의 가격이 아니었다. 안에 남은 기록이 누구를 가리킬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저 도장은 처음부터 있었습니까?”
“제가 여기 온 뒤에는 늘 두 개였습니다. 윤 선생님이 맡길 때부터였는지는 모르죠.”
최병호가 장부를 가져왔다. 2011년 9월 2일 상자 재입고란에는 수령인 대신 보관 의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보관료 납부인 칸에는 처음 몇 차례 P.T. 컨설팅이 적혔고 2014년 이후에는 청우문화보존회라는 이름이 반복됐다.
“청우문화보존회가 상자를 맡긴 곳입니까?”
“저희는 돈을 받은 사람만 기록합니다. 실제 주인은 모릅니다.”
장부 아래의 납부 내역에는 매달 다른 입금자와 같은 법인 계좌가 남아 있었다. 입금 메모는 대부분 보존 2호였다.
박태준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과 연결이 없다는 것은 달랐다.
“상자 안을 확인하겠습니다.”
봉인지를 자르기 전 진우는 상자의 높이와 무게를 기록했다. 최병호가 지켜보는 가운데 왼쪽 봉인지를 해제하자 나무 뚜껑이 끈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는 그림이 없었다. 완충지 아래에 폭이 좁은 회색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는 비어 있었지만 안쪽에 종이 가루가 남아 있었고 앞면에는 2-11-03이라는 인수번호가 연필로 적혀 있었다.
진우는 봉투를 꺼내지 않고 안쪽 상태만 촬영했다. 누군가 봉투를 넣고 뺀 적은 분명했지만 언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최병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에 어떤 남자가 와서 봉투만 확인한 적은 있습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요.”
“확실합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기록을 보며 들은 이름일 수도 있어요.”
“그 불확실성까지 적겠습니다.”
진우는 단정하지 않고 그대로 녹음에 남겼다. 개봉 전후 상태를 확인받은 뒤 열람 확인서에 최병호의 서명을 받았다.
수장고를 나서기 전 두 번째 도장의 모양을 확대 촬영했다. 도장을 만든 사람도 청우문화보존회의 실소유자도 아직 모른다. 그래도 다음 추적 대상은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법인과 계좌로 늘어났다.
마두식이 철문을 닫으며 말했다.
“박태준을 잡을 증거는 아니구먼.”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표정이 왜 그리 무섭소?”
“이름을 찾는 것보다 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가 먼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진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예림의 문자였다.
내일 오후 시간 있습니까? 루체가 후원하는 대학 졸업 전시회입니다. 작품을 보러 와 주세요.
진우가 이유를 묻자 곧 답이 왔다.
돈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전시예요. 작품보다 먼저 작가를 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날 오후 전시장은 꽃다발과 명함을 든 사람들로 붐볐다.
입구 벽의 배치도에는 교수들이 추천한 대형 회화가 중앙 홀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명이 가장 먼저 닿는 곳마다 관람객이 몰렸다.
강예림은 진우에게 도록을 건넸다.
“이름 있는 학생들부터 보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이 놓친 곳을 봐 주세요.”
진우는 도록을 덮고 전시장 끝으로 걸었다. 관람객의 발길이 끊긴 벽면 옆에 캔버스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작품명은 비가 오기 전의 계단이었다. 설명문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기억은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다른 색으로 만든다.
진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대상: 비가 오기 전의 계단]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5,00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500,000,000원]
[핵심 단서: 서로 다른 시기의 덧칠 아래 동일한 계단 구조. 작가 작업노트와 폐기 전시 포스터의 날짜 대조]
[정밀도: 88.1%]
진우는 숫자보다 화면을 먼저 보았다. 회색 계단은 한 번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가장 아래쪽에는 젖은 콘크리트의 푸른빛이 남아 있었고 그 위로 노란 조명이 덧입혀졌다. 오른쪽 난간은 세 번 지워졌지만 같은 위치에 되살아나 있었다.
“저 학생 작품은 철거 대상입니다.”
등 뒤에서 전시 담당 교수가 말했다.
“완성도가 낮다는 뜻입니까?”
“졸업 전시에는 관람객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합니다. 노유진 학생은 설명도 거부했고 제출 기한도 넘겼어요. 오늘 밤 철거할 겁니다.”
강예림이 작품과 교수를 번갈아 보았다.
“철거 전에 작가에게 확인해야 하지 않습니까?”
“재료비를 학교가 부담했습니다. 소유권은 학교에 있어요.”
진우는 캔버스 뒤로 돌아갔다. 액자에 가려진 하단에는 두 개의 날짜가 남아 있었다. 2021년 3월 2일과 2023년 11월 18일. 다른 천 조각을 덧댄 뒤에도 화면을 계속 이어 그린 흔적이었다.
작품은 미완성이 아니었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그린 층이 하나의 화면 안에 겹쳐진 것이다.
“작가를 만나고 싶습니다.”
“작업실에 있을 겁니다. 만나도 설득하지 못해요.”
교수가 돌아서자 전시장 구석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잠을 못 잔 듯한 눈이 보였다.
“저를 찾으셨나요?”
“노유진 씨입니까?”
“네. 오늘 철거할 그림의 작가예요.”
노유진은 작품 앞에 서서도 화면을 보지 않았다. 설명문에 붙은 테이프 끝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림을 치우라고 하셨으니 가져가겠습니다. 더 이상 여기 두고 싶지 않아요.”
“왜 그리셨습니까?”
“설명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꼭 묻는 질문이네요.”
“설명을 듣고 평가하려는 게 아닙니다. 뒤에 남은 기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노유진의 손이 멈췄다.
진우는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오억 원은 아직 자신이 검증해야 할 방향이었다.
“화면 아래에 다른 날짜의 천을 덧댔습니다. 원래 캔버스를 버린 적이 있습니까?”
“버리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실패작이라고 잘라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잘라낸 부분을 다시 꿰매고 계속 그렸어요.”
노유진은 가방에서 접힌 포스터를 꺼냈다. 제목은 계단의 날씨였고 날짜는 2021년 4월로 적혀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꾸고 두 번 더 덧칠했어요.”
진우는 종이를 건드리지 않고 촬영 허락을 구했다. 노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포스터의 날짜와 접힌 선을 기록했다.
강예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품을 팔 생각은 있습니까?”
노유진의 표정이 닫혔다.
“또 가격부터 묻네요. 교수님도 그랬어요. 얼마에 팔 수 있는 그림인지부터.”
“강예린 씨는 가격을 정하려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우가 말을 받았다.
“저는 이 그림의 기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작업노트와 잘라낸 캔버스 조각이 있다면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외부 검증을 받을지는 그 뒤에 결정하세요.”
“저한테 사겠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지금 사겠다고 하면 작품의 가치가 아니라 제 숫자를 믿으라는 말이 됩니다.”
노유진은 진우를 오래 바라보았다.
“작업실에 그림이 스무 점 있습니다. 대부분 팔리지 않았고 몇 점은 제가 망가뜨렸어요.”
“망가뜨린 이유를 적어 둔 노트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걸 보시면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알게 될 겁니다.”
“작품을 망친 기록도 작품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전시장 직원이 사다리를 세우자 노유진은 재빨리 작품 앞을 막아섰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학교 소유라니까요.”
“재료비를 냈다고 제 시간을 가져갈 수는 없어요.”
강예림이 학교와 작가 사이의 인계 조건을 확인하는 동안 진우는 작품 뒤의 덧댄 천을 다시 살폈다. 안쪽에는 계단 난간의 각도와 맞물리는 연필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전 그림을 숨긴 게 아니었다. 다음 그림이 이어질 위치를 표시한 흔적이었다.
진우는 노유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갤러리 아르케의 이름과 아직 비어 있는 전시장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작품을 사기 전에 작업실을 보게 해 주세요. 검증 보고서를 먼저 만들겠습니다. 공개 여부와 판매 여부는 그 다음에 결정합시다.”
“갤러리라면 결국 팔겠다는 뜻 아닌가요?”
“팔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무엇을 그렸는지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채 사라지게 두지는 않겠습니다.”
노유진은 한참 뒤 명함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작업실로 오세요. 대신 약속 하나는 해 주세요.”
“말씀하십시오.”
“제 작품을 팔기 전에 제 기록부터 확인해 주세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은 여전히 관람객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진우의 눈에는 계단 위로 겹쳐진 계절과 아직 공개되지 않은 스무 개의 화면이 이어져 보였다.
갤러리 아르케의 첫 거래는 작품 한 점의 매입으로 시작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한 작가가 지워지지 않도록 남겨 두는 기록에서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