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1화: 봉투에 남은 손
대구행 첫차가 동대구역 플랫폼에 멈췄을 때 진우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밤새 손에 쥐고 있던 것은 갤러리 아르케의 열쇠가 아니었다. 법무사에게서 온 약속 문자와 윤창호 수장품 정리 봉투의 사본 사진이었다.
마두식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와 진우 옆에 앉았다.
“새 갤러리 주인 양반이 첫날부터 남의 봉투를 쫓아 대구까지 내려오는구먼.”
“제 갤러리 이름을 걸기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박태준이라는 이름?”
“이름이 아니라 손입니다. 누가 봉투를 열고 메모를 붙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법무사 서민석의 사무실은 역에서 차로 십오 분 떨어진 오래된 상가 건물 3층에 있었다. 서민석은 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의 신분증과 열람 목적서를 확인했다.
“원본은 보여 드리겠습니다. 다만 촬영은 봉투 전체와 서류 번호만 가능합니다. 내용물의 반출과 접촉은 금지입니다. 상속인 중 한 분이 아직 소유권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조건을 따르겠습니다. 열람 시작 시각과 원본 상태를 먼저 기록하게 해 주십시오.”
진우는 탁자 위에 날짜판과 자를 놓았다. 서민석이 흰 장갑을 건넸고 마두식은 휴대전화 카메라의 촬영 시간을 맞췄다.
갈색 봉투가 문서 보관함에서 나왔다. 모서리는 눌려 있었고 봉합선에는 오래된 먼지가 얇게 끼어 있었다.
진우의 시야 한쪽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대상: 윤창호 수장품 정리 봉투]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15,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120,000,000원]
[핵심 단서: 1998년 서울 경매 위탁 확인서와 원수령 메모의 접착면 선후 관계]
진우는 숨을 고르고 봉투를 뒤집었다. 뒷면 아래쪽에 남은 도장은 루체에서 본 사본의 도장과 같았다.
‘윤창호 수장품 정리. 2호.’
사본은 진짜 원본에서 복제된 것이었다. 하지만 봉투가 진짜라는 사실만으로 박태준에게 직접이라는 문장의 주인이 박태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우는 봉투의 접힌 선을 자로 재고 사진을 찍었다. 메모는 앞면이 아니라 안쪽 덮개에 붙어 있었다. 종이를 접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메모가 처음부터 붙어 있었다면 봉투를 닫기 전에 적었을 겁니다.”
“그럼 후대에 붙였다는 뜻입니까?” 서민석이 물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접착제가 종이 섬유를 얼마나 끌어올렸는지 봐야 합니다.”
진우는 루페를 봉합선 가까이 가져갔다. 메모 아래 접착면에는 봉투의 갈색 섬유가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그러나 메모 오른쪽 모서리만 섬유가 깨끗했다. 누군가 한 번 떼었다가 다시 붙인 흔적처럼 보였다.
마두식이 몸을 낮췄다.
“이쪽은 붙은 지 오래됐고 저쪽은 최근에 만졌다는 말이오?”
“그 가능성이 큽니다. 물리적 확인이 더 필요합니다.”
서민석은 별도의 투명 파일을 꺼냈다.
“봉투 안에 있던 서류는 이것뿐입니다. 1998년 서울 경매 위탁 확인서 사본과 운송 영수증. 원본 장부는 윤창호 씨가 별도로 보관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우는 확인서의 인계 도장을 살폈다. 사본의 도장은 붉은색이었지만 가장자리 잉크가 종이 결을 따라 번진 방향까지 봉투 뒤편 도장과 같았다.
그때 서류 아래에서 작은 도장이 보였다.
P.T. 자문실 수령
진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도장은 사본에는 없었습니다.”
서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운송 영수증에만 찍혀 있습니다. 당시 윤창호 씨가 거래하던 자문실이라고 들었습니다.”
“박태준 씨의 자문실이었습니까?”
“그건 제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장부 부속 목록에 수령인 이름이 비어 있습니다. 도장만 남아 있습니다.”
진우는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루체에서 본 메모는 박태준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곧장 범죄의 증거로 바꿔 주지는 않았다. 확신하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기록을 망칠 수 있었다.
“메모의 필체를 대조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윤창호 씨가 보관하던 거래 노트가 있습니다. 상속 정리 과정에서 대구 외곽 수장고로 옮겼습니다. 2호 상자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
서민석은 운송 영수증 원본을 펼쳤다.
1998년 11월 3일. 발송인 윤창호. 수령인 P.T. 자문실. 운송 담당 이도현.
진우는 이름을 메모지에 옮겼다.
“이도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자문회사 회계 담당자였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사무실 밖 복도에서 구두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마두식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민석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열람대장을 닫았다.
“오늘 아침에도 어떤 남자가 2호 상자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상속인도 아니고 위임장도 없어서 돌려보냈습니다.”
“인상착의를 기억하십니까?”
“검은 모자였습니다.”
진우와 마두식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민석은 옛 수장고의 주소와 관리인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그는 원본 봉투를 다시 파일에 넣기 전에 열람 확인서에 서명했다. 진우도 옆 칸에 서명했다. 원본의 상태와 봉합선의 훼손 여부가 문장으로 남았다.
수장고는 대구 외곽의 낮은 공장 건물 안에 있었다. 관리인 김덕수는 두 사람을 보자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윤 선생님 물건은 상속 정리 전까지 손대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법무사님 확인서가 있으니 장부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부에는 낡은 상자 번호가 줄지어 있었다. 1호 칸에는 먼지가 내려앉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지만 2호 칸은 비어 있었다. 칸막이 안쪽에 사각형으로 남은 먼지 자국만이 상자의 크기를 말해 주었다.
진우가 빈 칸 아래의 바닥을 비추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대상: 윤창호 수장고 출입대장]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8,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70,000,000원]
[핵심 단서: 2호 상자 이동 후 재위탁 보관소와 보관료 납부 계좌]
진우는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2004년 6월 18일, 2호 상자 반출. 목적지 칠곡 복원공방. 2011년 9월 2일, 서문동 공동 수장고 재위탁. 보관료 납부인은 ‘P.T. 컨설팅’으로 적혀 있었다.
“상자는 언제 나갔습니까?”
김덕수가 장부의 연필 자국을 가리켰다.
“기록상으로는 2011년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누군가 이 칸을 확인했어요. 상자 번호를 세 번이나 물었습니다.”
마두식이 창고 밖을 살폈다. 도로 건너편 검은 승합차의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차는 시선을 마주치자 천천히 움직였다.
진우는 빈 칸의 안쪽 모서리에서 종이 섬유 하나를 집지 않고 사진으로 남겼다. 섬유 끝에는 붉은 안료가 아주 얇게 묻어 있었다.
그때 창고 출입문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상자 안에는 그림이 없습니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자료관 숙소 앞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마두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의 창고에 들어와서 할 말은 아니구먼.”
“상자를 쫓느라 돈을 더 쓰지 마십시오. 진우 씨 아버지 병원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진우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내 녹음 화면을 켰다.
“방금 말한 병원비 정보의 출처를 설명하십시오. 그리고 2호 상자가 그림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안에 그림이 있었다면 당신이 이렇게 기록을 따졌겠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제는 누가 기록을 지우는지까지 확인합니다.”
진우는 녹음 파일을 저장하고 김덕수에게 출입대장 보존 확인을 요청했다. 서민석에게는 봉투 원본과 대장의 열람 확인서를 함께 보관해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검은 모자 남자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돌아서기 전 짧게 말했다.
“서문동에 가면 상자보다 먼저 당신 이름이 사라질 겁니다.”
남자가 떠난 뒤 김덕수는 한참 동안 문밖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오전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틀렸어요.”
“무엇이죠?”
“2호 상자는 안에 그림이 있든 없든 그냥 빈 상자가 아닙니다. 보관료가 몇 번이나 연체됐는데도 누군가 계속 돈을 냈습니다. 안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지요.”
진우는 휴대전화로 서문동 공동 수장고에 공식 열람 요청을 보냈다. 답장은 삼 분 만에 왔다.
첨부 사진 한 장이 함께였다.
낡은 나무 상자의 앞면. 봉인지는 찢기지 않았지만 붉은 도장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하나는 윤창호 수장품 정리 도장과 같았다.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두 번째 도장의 주인을 먼저 확인하십시오. 이 상자는 오늘 밤 이동 예정입니다.
진우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마두식에게 말했다.
“대구에 내려온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상자를 못 봤는데도?”
“원본 봉투는 진짜였습니다. 메모도 후대에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 박태준 본인이 아니라 자문회사와 이도현을 거쳐 갔다는 흔적이 나왔습니다.”
진우는 빈 2호 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상자를 찾는 게 아니라 상자를 계속 살려 둔 사람을 찾겠습니다.”
그의 손안에서 갤러리 아르케의 열쇠가 차갑게 빛났다. 새 이름을 얻은 공간으로 돌아가기 전에 진우는 서문동 공동 수장고의 두 번째 붉은 도장을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