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15화: 백억 원의 보증서
“굽 사진이 없네요.”
진우가 특별 도록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한성옥션 프리뷰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아르케 상담실 탁자 위에는 달항아리를 찍은 사진이 여섯 장 펼쳐져 있었다. 정면과 양옆, 입술의 확대 사진까지 있었지만 바닥을 보여 주는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강예림이 차 열쇠를 손가락에 걸었다.
“작품을 거꾸로 세우고 찍기가 조심스러웠을 수도 있어요. 추정가가 백억이니까요.”
“사진을 못 찍은 것과 감정 근거로 제시하지 않은 건 다릅니다.”
진우는 윤성철의 친필 서명이 인쇄된 페이지 옆에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다. ‘조선 후기 제작. 보존 상태 양호. 과학 검사 및 출처 조사 완료.’ 판정은 명쾌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 시료를 떼었는지, 출처 문서의 원본을 누가 확인했는지는 요약에 없었다.
서명은 증거처럼 큼직했고 증거는 각주만큼 작았다.
마두식이 휴대전화 화면을 엎어 놓았다.
“박태준이 오늘도 나온답니다. 프리뷰 입구에 협회 사람들을 세워 뒀다는군요.”
“협회 초청 행사입니까?”
“아니요. 옥션 행사죠. 그 인간은 자기 손님처럼 굴겠지만.”
강예림이 흰색 확인증 두 장을 탁자에 놓았다. 진우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프리뷰 참관증이었다. 마두식은 현장에서 별도 등록을 마쳤다고 했다.
“일반 관람객으로 신청했습니다.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 선에서 질문할 권리는 있어요.”
진우는 확인증을 챙겼다. 오늘 확인할 것은 세 가지였다. 실물의 표면, 가려진 굽을 볼 방법, 검사 원자료를 낙찰 전에 열람할 수 있는지. 사진 속 흰빛만으로 백억 원짜리 물건을 믿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작은 수첩의 첫 장에 시각을 적었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섞이지 않게 기록할 참이었다. 윤성철의 이름이 아무리 커도 비어 있는 칸까지 채워 주지는 않았다.
한성옥션의 프리뷰실은 낮인데도 창을 가린 채 조명을 밝혀 놓았다. 벽마다 작은 작품들이 걸렸고 중앙의 유리 진열장에 달항아리만 홀로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유리 앞에 반원을 만들고 낮은 목소리로 가격을 점쳤다.
진우는 그들 뒤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높이와 어깨의 비율은 도록과 같았다. 달처럼 팽팽하게 차오른 양쪽 면이 미세하게 달랐다. 두 개의 반구를 이어 빚은 오래된 달항아리라면 자연스러운 불균형이었다. 표면에는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과 가마 안에서 생긴 작은 점들이 보였다.
그럴듯했다. 그래서 더 천천히 봐야 했다.
진우는 유리의 반사를 피해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가까이서 보니 유약의 흰빛은 고르게 칠한 페인트처럼 평평하지 않았다. 미세한 기포와 얇게 흘러 멈춘 자국이 조명을 받을 때마다 다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받침대의 검은 윗면이 항아리 아랫부분을 완전히 감쌌다. 굽은 한 치도 보이지 않았다. 진우가 몸을 낮추자 보안 직원의 신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더 아래로 내려가도 검은 받침만 보일 뿐이었다.
“조명을 오른쪽으로 조금만 옮길 수 있을까요?”
안내 담당자가 다가왔다.
“관람 위치에서 보이는 범위만 감상 부탁드립니다.”
“표면 접합부를 보고 싶습니다. 작품을 만지실 필요는 없어요.”
담당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이동 조명 하나의 각도를 바꿨다. 진우는 빛이 지나가는 어깨선을 보았다. 가운데를 도는 옅은 띠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달항아리의 제작 방식과 맞는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 띠만으로 어떤 판정도 내릴 수 없었다.
진우는 수첩에 ‘중앙 접합선 육안 확인, 굽 관찰 불가’라고 적었다. 의심을 사실처럼 쓰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골랐다.
“굽 사진은 별도로 볼 수 있습니까?”
담당자의 얼굴이 굳었다.
“도록에 수록된 사진이 공개 자료의 전부입니다.”
“검사 보고서 원본은요? 시료 채취 위치와 날짜라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공식 감정 절차를 모두 거쳤습니다. 보증서는 도록에 있습니다.”
진우는 다시 항아리를 보았다. 유리 안에 있는 물건보다 유리 밖에 내건 이름이 더 쉽게 팔리고 있었다.
“보증은 결론입니다. 제가 여쭌 건 결론을 낸 과정이고요.”
담당자가 대답하기 전에 뒤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자격 정지된 사람이 검사 보고서부터 찾는군.”
박태준이었다. 손목은 재킷 소매 안에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그의 뒤에는 낯선 협회 직원 한 명이 서 있었다.
“프리뷰를 소란스럽게 만들 생각이면 지금 나가.”
마두식이 끼어들려는 것을 진우가 손으로 막았다.
“소란이 아니라 열람 문의입니다. 한성옥션 담당자께 드렸습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백억 원짜리 작품을 검증해? 감정원에서 쫓겨난 주제에.”
근처 관람객들이 돌아봤다. 진우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작품의 진위에 관해 아직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굽 사진과 검사 자료를 볼 수 있는지만 묻고 있습니다.”
담당자는 박태준과 진우를 번갈아 보다가 난처한 표정으로 안내 책자를 움켜쥐었다.
“현장에서는 추가 자료 열람이 어렵습니다.”
“그 답변을 서면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박태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프리뷰실 밖 접수대에는 열람 요청서 양식이 없었다. 진우는 빈 종이를 한 장 받아 직접 적었다. 작품 번호, 요청 자료, 요청 시각. 달항아리 굽 전면 사진과 검사 보고서의 시료 채취 위치를 열람하고 싶다는 문장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원자료를 공개할 의무는 없다고 써 주셔도 됩니다.”
접수 직원은 서류를 읽고 상급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두식은 접수대 옆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진우는 급하게 재촉하지 않았다. 직원이 전화를 내려놓을 때까지 문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요청은 접수하겠습니다. 경매 전 열람은 어렵습니다.”
“접수 사실과 답변을 적어 주세요.”
직원은 종이 하단에 시간을 쓰고 접수 도장을 찍었다. 그 옆에 ‘경매 전 추가 자료 열람 불가’라고 기재했다. 진우가 사본을 받자 강예림이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도장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아 진우는 종이를 가장자리만 잡고 들었다.
“종이 한 장 받아서 뭐가 달라지나?”
박태준이 옆에서 말했다.
“답을 받은 사실이 남습니다.”
“쓸데없는 짓이지. 오늘 이 자리에서 윤 이사장님 보증을 뒤집을 생각이라면 꿈 깨.”
“보증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료 요청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죠.”
박태준의 입술이 굳었다. 그는 접수 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 경매장 출입 막아. 감정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강예림이 먼저 참관증을 내밀었다.
“한성옥션에서 발급한 확인증입니다. 참관 기준에 감정원 자격이 필요하다는 조항이 있나요?”
직원은 확인증을 스캔한 뒤 참관자 명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 화면에 초록색 표시가 떠올랐다.
“참관 등록은 유효합니다.”
박태준이 뭐라 더 말하려는 순간 복도 끝의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윤성철이 회색 정장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자가 카메라를 들었고 행사 진행자가 옆에서 다음 동선을 설명했다.
윤성철은 박태준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진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진우 씨. 여기서 뵐 줄은 알았습니다.”
“이사장님 이름이 크게 걸려 있더군요.”
“그 이름에 걸맞은 책임도 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검토한 물건이에요.”
그의 말에 기자의 카메라가 진우를 향했다. 진우는 렌즈를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검토 기록을 확인하는 일도 어렵지 않겠지요.”
윤성철의 미소가 조금 얇아졌다.
“절차는 한성옥션에 맡기세요. 경매는 곧 시작합니다.”
그는 박태준에게 더는 소란을 만들지 말라는 듯 짧은 눈짓을 주고 지나갔다. 박태준은 이를 악물었지만 앞을 막지는 못했다.
진우는 사본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손에 쥔 것은 위작의 증거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자료를 요청했고 경매 전에 무엇을 확인할 수 없었는지 남긴 기록이었다.
경매장에서는 번호 팻말이 파도처럼 들렸다 내려왔다. 앞선 회화 한 점이 추정가를 훌쩍 넘자 객석에서 작은 박수가 터졌다. 열기가 오를수록 마지막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 뒤 붉은 천으로 몰렸다.
진우는 참관석 끝에 앉아 도록과 자신이 적은 메모를 나란히 펼쳤다. 달항아리 사진 여섯 장. 보증서 한 장. 출처 연혁의 중간에 놓인 두 줄짜리 개인 소장 기록. 검사 방법은 쓰여 있지만 무엇을 어디서 채취했는지 빠져 있었다.
마두식이 옆자리에서 낮게 말했다.
“앞줄 오른쪽 둘. 입찰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통화만 하고 있어요.”
“누군지는 확인됐습니까?”
“대리인으로 들어왔대요. 의뢰인 이름은 안 내놓았고요.”
강예림은 진우의 메모를 들여다봤다.
“이것만으로는 경매를 세울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록을 남긴 건 잘했어요. 만약 문제가 생기면 옥션이 무엇을 알면서도 공개하지 않았는지 따져 볼 수 있으니까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낙찰 뒤에 따지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만약 가짜라면 누군가 값을 치르는 순간 손해와 소송은 이미 시작된다. 의심만으로 소리칠 수도 없고 확신을 기다리다 망치가 내려와도 안 됐다.
그는 요청서 사본을 다시 꺼내 접힌 자국을 폈다. 경매가 시작된 뒤에는 관람객의 질문이 곧 소란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확보한 것은 자기 눈으로 본 표면과 상대가 답하지 않은 항목의 목록뿐이었다.
객석의 불빛이 낮아졌다. 진행자가 마이크 앞으로 나왔다.
“마지막 출품작을 소개합니다.”
붉은 천이 걷혔다. 운반 담당자 두 사람이 투명 보호 상자에 든 달항아리를 회전대 위에 올렸다. 객석 곳곳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윤성철은 맨 앞줄에서 일어섰다. 화면에는 그의 보증서와 항아리의 정면 사진이 번갈아 나타났다.
“이 작품은 우리 도자 문화의 정수입니다. 저는 제 이름으로 그 가치를 보증합니다.”
박수가 흘렀다. 진우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회전대가 천천히 돌자 프리뷰실에서는 정면으로 보지 못한 아랫배의 유약 흐름이 드러났다. 그는 도록의 확대 사진과 번갈아 보았다.
푸른 글자가 시야 끝에 어른거렸다. 유리와 화면의 흰빛이 겹쳐 처음에는 초점을 잡기 어려웠다. 진우가 눈을 감았다 뜨자 글자의 첫 줄이 달항아리 위에 걸렸다.
[대상: 조선 백자 달항아리]
“시작가는 칠십억 원입니다.”
경매사가 망치를 들었다. 앞줄 오른쪽에서 번호 팻말 하나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