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8화: 부러진 문장의 결투
지하 배수로 출구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계단 바닥을 찍은 거대한 대검 칼날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 있었다. 부서진 화강암 파편이 흙탕물 위로 튀며 잘게 굴렀다.
붉은 갈색 머리칼 아래 번뜩이는 사내의 눈빛은 굶주린 늑대처럼 형형했다.
“귀가 먹었나? 아니면 손에 쥔 게 뭔지도 모르고 헤벌레 웃고 있는 거냐?”
사내가 굵고 거친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의 시선은 토른 경위의 품에 들린 납빛 상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건 왕국 수도 경비대와 마도탑이 공식 압수한 중대 증거물이다.”
토른이 상자를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허리춤의 칼을 비껴 쥐었다.
“신원도 밝히지 않고 관헌의 공무를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반역죄로 다스릴 수 있다.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서라!”
“반역죄?”
사내의 입술 사이로 조소 어린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탑 늙은이들 서랍에 처박혀서 보고서 몇 장 쓰고 덮어버릴 찌꺼기가 증거라고? 제국 놈들이 수도 지하에 박아둔 덫의 꼬리를 잡고도 그따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나 보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의 무거운 군화가 계단을 박찼다.
쾅!
폭음과 함께 계단참의 돌바닥이 깨져나갔다. 사내의 거구가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토른 경위님 물러서요!”
세라가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토른은 이미 반 보 앞으로 전진하며 경비대 제식 검술로 칼끝을 찔러 넣고 있었다. 상자를 품에 안은 채였지만 찌르기는 날카로웠다.
사내는 칼날을 피하지 않았다.
채애앵!
사내의 대검 등이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무게를 실은 칼등의 타격 한 방에 토른의 검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손목이 꺾인 토른이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사내는 돌아가는 원심력을 그대로 실어 토른의 옆구리를 향해 발길질을 내질렀다.
그대로 맞았다면 갈비뼈가 으스러질 위력이었다.
“빛의 방벽!”
세라의 손끝에서 순백의 마나가 폭발하듯 펼쳐졌다.
콰앙!
사내의 발끝이 세라의 신성 결계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묵직한 충격파가 터지며 결계 표면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토른은 결계 안쪽으로 굴러떨어지며 바닥을 짚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납빛 상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성당 비둘기 계집이 제법 단단한 껍질을 둘렀군.”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튕겨 나간 반동을 이용해 가볍게 공중에서 회전하더니 대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스으윽.
이 빠진 대검의 칼날 위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단순한 마력 주입이 아니었다. 뼈와 살을 갈아 넣은 수련 끝에 검날에 새겨 넣은 실전의 검기였다.
그 검기가 뿜어내는 살기만으로도 좁은 석조 통로의 공기가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이안은 세라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뒤로 물리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 머리에서 청색 마나가 나선형으로 감겨 올라갔다.
“제국의 덫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빼앗으려 드는 이유가 뭡니까.”
이안의 목소리는 파도 하나 없는 수면처럼 침착했다.
“당신이 제국의 첩자가 아니라면 그 상자를 열 권한도 숨겨야 할 명분도 없을 텐데요.”
“명분?”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못 대가리에 박힌 주술식이 뭔지 네놈들이 알기나 하나? 탑 서랍에 넣는 순간 그 냄새를 맡고 누가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르면서 떠벌리지 마라.”
사내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말이 길었다. 뺏어서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쿠웅!
사내의 대검이 호를 그리며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푸른 검기가 좁은 계단 통로를 통째로 쓸어 담으며 덮쳐왔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이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팡이 끝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공백식 지면 경화.’
지팡이 끝에서 뻗어나간 푸른 마나가 계단 모서리를 타고 바닥의 모래와 암반을 일순간 강철처럼 굳혔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를 비틀어 허공으로 치켜올렸다.
‘역위상 반사각.’
콰아아앙!
사내의 검기가 이안의 마나 장막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직접 받아내면 지팡이가 부러질 위력이었다. 이안은 충격을 받아내는 대신 마나의 경사면을 30도 비틀어 검기의 궤적을 천장 쪽으로 굴절시켰다.
돌벽이 세로로 쪼개지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사내의 눈동자에 언뜻 경악이 스쳤다.
“단순한 방어벽이 아니군. 궤도를 꺾었어?”
“폭력에는 계산이 앞서는 법입니다.”
이안은 차갑게 쏘아붙이며 지팡이 머리를 사내의 명치를 향해 겨누었다.
파지직!
청색 마나 탄환 셋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좁은 통로에서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고안된 마도탑의 제식 압축탄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대검의 넓은 몸통을 방패처럼 앞으로 세워 탄환 두 발을 튕겨냈다. 나머지 한 발은 고개를 살짝 비틀어 뺨을 스치게 내버려 두었다.
뺨에서 피 한 줄기가 배어 나왔지만 사내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피를 핥지도 않고 묵직한 보폭으로 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마법사 놈들과 싸워본 게 어제오늘인 줄 아나 보지?”
사내의 주먹이 대검의 자루를 부러뜨릴 듯 쥐어졌다.
그의 몸 주변으로 회오리치는 검기가 계단 벽면을 닥치는 대로 깎아내고 있었다.
실전에서 수많은 마법사의 목을 베어 넘겨본 자의 노련함이었다. 주문의 틈과 호흡을 읽고 파고드는 솜씨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세라가 입술을 깨물며 신성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안 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완력이 아닙니다!”
세라의 양손에서 눈부신 백색 빛줄기가 뻗어나가 사내의 발목을 얽어매려 했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사내는 몸을 비틀며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아 신성의 밧줄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그 반동을 틈타 사내의 칼끝이 토른을 향해 쇄도했다.
토른은 검을 잃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가 품에 안은 납빛 상자가 사내의 손아귀에 닿기 직전이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굴렀다.
‘순간 가속 편향 돌파.’
바람의 마나가 이안의 발목을 감싸며 거리를 좁혔다. 이안은 토른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지팡이를 수평으로 뻗었다.
그리고 지팡이 중앙의 룬에 자신의 중심 마나를 아낌없이 밀어 넣었다.
대마법사의 푸른빛과 사내의 거친 검기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지지직!
살을 에는 쇳소리와 함께 지팡이의 보석과 대검의 칼날이 맞물렸다.
거대한 압력이 이안의 팔목을 타고 어깨뼈까지 짓눌러왔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물러서지 않고 사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이었다.
사내의 흉갑에 새겨진 부러진 날개 문양이 생생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의 거친 숨결에서 짙은 쇠 냄새가 풍겼다.
그 순간 이안의 시야 한구석에서 반투명한 푸른 텍스트가 파르르 떨리며 튀어 올랐다.
[전직 '무신'의 편린과 미약한 파동 감응 감지.]
[조건 불충분: 적합자의 의지와 기억 공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무신?’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태창이 사내의 검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보조 전직의 편린이 사내의 검끝에 닿아 공명하려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사내 역시 표정을 굳혔다.
그는 칼날을 맞대고 있는 이안의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네놈…… 마나 결이 왜 이따위지?”
사내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마도탑 샌님들의 미적지근한 마나가 아니야. 살내음이 섞여 있어. 마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뒹굴어본 놈처럼…….”
사내의 감각은 짐승처럼 예리했다.
이안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바르칸의 흔적과 상태창의 파동을 무의식중에 감지해 낸 것이었다.
바르칸의 묵직한 음성이 이안의 귓가를 찔렀다.
―호흡이 거칠군.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피를 먹고 자란 뼈다.
이안은 이를 악물며 지팡이를 비틀었다.
‘공백식 반발 방출!’
지팡이 끝의 룬에서 응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며 사내의 대검을 밀어냈다.
사내는 뒤로 세 걸음 밀려나며 계단참에 우뚝 섰다. 흙먼지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번뜩이고 있었다.
이안 역시 뒤로 반 보 밀려나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팡이를 쥔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라가 재빨리 다가와 이안의 등 뒤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신성 마력이 이안의 뒤틀린 마나 순환을 빠르게 바로잡아 주었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이안이 짧게 답하며 사내를 겨눈 지팡이를 내리지 않았다.
사내는 칼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칼날을 고쳐 잡으며 온몸의 근육을 더욱 팽팽하게 죄었다.
“이름이 뭐냐 마법사.”
사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왕립 마도탑의 이안 베르크다.”
“이안 베르크…….”
사내가 이름을 씹어 삼키듯 중얼거렸다.
“나는 카일이다. 성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네놈 실력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 상자는 넘겨줄 수 없다.”
카일이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푸른 검기가 칼날을 넘어 그의 양팔까지 집어삼키며 통로 전체를 뒤흔들었다.
벽면의 화강암이 버티지 못하고 금이 가며 쩍쩍 갈라졌다.
진짜 전력을 쏟아붓겠다는 신호였다.
세라가 입술을 깨물며 양손을 모아 가장 단단한 축복 결계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이안 역시 남은 마나를 모두 긁어모아 지팡이의 핵을 한계까지 공명시켰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충돌이 다시 터져 나오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우르르릉!
돌계단 아래쪽 깊은 배수로 바닥에서 기괴한 진동이 솟구쳐 올랐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조금 전 봉인못을 뽑아냈던 지하 수조의 암반 틈새에서 차갑고 끈적한 마나가 분수처럼 역류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마수의 포효가 젖은 석조 통로를 타고 메아리쳤다.
배수로 바닥의 흙탕물이 거칠게 소용돌이치며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카일의 치켜올려진 대검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계단 아래 어둠 속을 향했다.
“빌어먹을.”
카일이 이를 갈며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내가 말했지. 덮어놓고 뽑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냐고!”
이안과 세라 역시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봉인못이 억누르고 있던 균열의 심층부.
그곳에서 제국의 덫이 숨겨두었던 진짜 이형의 그림자가 어둠을 찢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카일은 붉게 물드는 계단 아래를 노려보며 대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결투의 긴장은 순식간에 배수로 전체를 집어삼키는 또 다른 살기로 번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