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9화: 서로 다른 검로
계단 아래에서 붉은 물기둥이 솟았다.
카일의 대검은 아직 이안을 향해 있었다. 이안도 지팡이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물기둥 속에서 나온 손이 계단 난간을 움켜쥐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손가락은 다섯 개가 아니었다. 돌조각과 뼈처럼 흰 관이 엉킨 여섯 갈래의 갈고리가 난간을 부쉈다. 뒤따라 올라온 머리에는 눈 대신 젖은 암반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틈마다 물이 끓었다. 난간에서 떨어진 돌조각 하나가 물방울에 닿자 검붉게 변해 덩어리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계단의 폭은 카일의 대검을 온전히 휘두르기에도 좁았다. 등 뒤에는 세라와 검을 잃은 토른이 있었다.
“위로 올라가면 구시가지다.”
카일이 낮게 말했다.
“그건 나도 압니다. 칼끝부터 돌리시죠.”
이안이 지팡이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마수가 계단 두 칸을 한꺼번에 뛰었다. 이안은 굳은 손목을 눌러 지팡이 끝을 돌계단에 박았다.
‘공백식 지면 경화.’
푸른 마나가 계단 모서리를 따라 퍼졌다. 미끄러운 흙탕물이 단단한 돌 위에서 갈 곳을 잃었다. 마수의 앞다리가 반 박자 늦게 접혔다.
“지금!”
카일의 대검이 낮게 횡으로 움직였다. 무릎 높이에서 검기가 터지고 마수의 앞다리 두 개가 끊어졌다. 붉은 물이 세라의 결계에 부딪쳐 쉭 소리를 냈다.
“토른 경위님. 지상에 경보를 보내세요.”
세라가 결계 안으로 토른을 끌어들였다. 토른은 상자를 놓지 않은 채 허리띠에서 짧은 신호관을 꺼냈다.
“출구가 막혀 있다. 두 사람만 올라가면 괴물이 뒤따른다.”
“제가 길을 엽니다.”
세라의 흰빛이 위쪽 계단에 얇은 통로를 만들었다. 토른이 발을 옮기는 순간 바닥에 떨어졌던 앞다리가 꿈틀거렸다.
잘린 면에서 붉은 실이 뻗어 나왔다. 실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대신 아래 수조 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끊어진 다리가 본체로 미끄러져 붙었다.
“재생한다고?”
카일이 칼을 들어 다시 내려치려 했다. 이안이 그의 팔을 지팡이로 막았다.
“같은 자리를 백 번 자르면 우리가 먼저 지칩니다.”
대답하는 사이에도 잘린 다리가 원래 자리로 기어왔다. 이안의 지면 경화 수식에는 이미 가는 금이 갔다. 계단 자체를 굳혀도 물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마수의 머리가 토른의 상자를 향해 꺾였다. 납빛 뚜껑 아래에서 둔한 진동이 울렸다. 마수는 두 사람을 지나 토른에게 돌진했다.
카일이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이번 칼질은 상자를 겨눈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수의 어깨를 찍어 계단 벽에 박았다.
“빨리 올라가!”
토른이 열린 통로로 뛰었다. 지상 출구의 틈으로 붉은 신호탄이 치솟았다. 바깥에서 경비대의 호각이 멀리서 대답했다.
신호탄이 올라가는 것을 보자 카일은 토른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안이 그 앞을 가로막을 필요는 없었다. 마수가 이번에는 대검의 옆면을 붙잡아 카일을 난간 쪽으로 끌고 갔다.
“상자는 못 놓는다. 저것도 못 올려 보낸다.”
카일은 발뒤꿈치로 깨진 계단을 짓밟았다. 이안이 그 아래를 다시 굳히자 그는 겨우 대검을 뽑아냈다. 서로의 손놀림을 확인할 틈도 없이 이어진 협력이었다.
마수가 벽에서 몸을 빼냈다. 카일의 칼에 갈라진 어깨가 부풀며 메워졌다.
“못을 뽑자마자 이게 깨어났다.”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그 못이 괴물을 재운 게 아니라 잡아놓고 먹이를 준 모양이군.”
“확실한 건 재생의 근원이 몸 바깥에 있다는 겁니다.”
이안은 지팡이 끝으로 붉은 실이 사라진 물길을 가리켰다. 물살이 너무 탁해 근원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세라 사제. 제가 흐름을 비우는 동안 빛을 수면 아래에 붙여주세요. 오래 유지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 손목이 떨립니다.”
“보고 나면 쉴 틈을 찾죠.”
세라는 불만을 삼키고 낮은 계단참에 빛을 던졌다. 이안은 그 아래의 마나만 원형으로 밀어냈다. 탁한 물에 손바닥만 한 맑은 구멍이 뚫렸다.
붉은 실은 수조 입구의 암반 틈에서 나왔다. 여럿이 마수의 몸통으로 이어졌다. 카일이 가장 굵은 실을 잘랐다.
검기가 물을 가른 자리로 마수가 몸을 던졌다. 물이 아니라 날이 선 돌편이 세라의 결계에 박혔다. 그녀는 팔을 뻗어 토른에게 향한 돌편을 막았고 흰 장막의 가장자리가 한 겹 벗겨졌다.
“두 번은 이렇게 못 막습니다.”
세라가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빛이 줄어들자 수면 아래의 실도 다시 흐려졌다. 이안은 수조 쪽으로 더 깊이 마나를 밀어 보냈다. 닿기 전에 암반이 그 흐름을 잡아먹었다.
마수의 어깨가 다시 무너졌다. 하지만 암반 더 깊은 곳에서 다른 실이 자라나 빈자리에 꽂혔다.
“뿌리를 잘라야 합니다.”
이안의 말에 카일이 코웃음을 쳤다.
“아래로 내려가자는 소리냐? 네 경위가 상자를 들고 올라가는 동안 우리를 여기 묶어두고?”
“그 상자가 어디로 가는지는 저도 지켜볼 겁니다.”
토른은 지상 문턱에서 멈췄다. 상자를 품에 안은 팔이 떨리고 있었다.
“왕국 경비대가 확보한 증거다. 여기서 개봉하지 않는다. 지원이 오면 인계 절차도 내가 감독한다.”
마수가 비틀린 입을 벌렸다. 소리보다 먼저 붉은 물방울이 솟았다. 세라의 결계에 닿은 물방울이 작은 구멍들을 팠다.
납빛 상자 안에서도 두 차례 짧은 진동이 났다. 봉인못을 빼냈을 때의 불쾌한 금속음과 같은 박자였다. 마수의 갈라진 머리가 즉시 지상 문턱으로 돌아갔다. 상자까지 닿으면 경보를 듣고 올 경비대도 위험했다.
“말싸움은 나중에 하세요.”
세라가 이를 악물고 결계를 다시 짰다.
“결계를 유지할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둘 다 아래를 막으세요.”
이안은 카일을 봤다. 검사의 눈은 여전히 상자를 좇았지만 발은 아래쪽 계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으로 오른쪽 실을 끊으십시오. 저는 왼쪽을 비웁니다.”
“명령하지 마.”
카일이 대검을 돌렸다.
“하지만 그쪽은 맡지.”
두 공격이 같은 순간 물속에 꽂혔다. 이안의 공백식이 왼쪽 실의 마나를 비웠고 카일의 검기가 오른쪽 실을 베었다. 마수의 몸통이 반으로 주저앉았다.
이안의 시야에 낯선 글자가 떠올랐다.
[전직 '무신' 편린. 적합자의 의지 공명 감지.]
[기억 공명 미충족. 기술 권한 잠김.]
카일은 계단 위쪽을 돌아봤다. 세라가 토른 앞에서 무너지는 결계를 붙들고 있었다.
“저 위로는 한 발도 못 올라간다.”
카일의 말이 끝나자 그의 대검 주변에서 푸른 선이 짧게 떨렸다. 이안에게만 그 선의 잔향이 보였다. 카일이 실제로 방금 그은 검로였다.
‘기술이 아니라 흔적이라면.’
이안은 지팡이 끝에 자신의 수식을 얹었다. 대마법사식으로 만든 공백에 검로의 잔향을 포갤 수만 있다면 암반 틈까지 한 번에 닿을 터였다.
―남의 칼을 네 식에 끼워 넣을 셈인가.
바르칸의 음성이 스쳤다.
“그 칼끝을 세 걸음 아래로 내려주세요. 제 마나가 따라갑니다.”
카일이 이안을 흘겨봤다. 그래도 칼을 거두지 않았다.
“놓치면 네 목부터 물린다.”
“그 전에 당신 검부터 붙잡겠습니다.”
카일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왼발을 이안의 수식이 만들어 둔 단단한 계단에 얹었다. 그 발판이 없었다면 큰 검의 궤도는 벽에 먼저 걸렸을 것이다. 이안은 그가 진짜로 칼을 내줄 때까지 지팡이를 들고 기다렸다.
대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안의 청색 수식이 그 옆으로 뻗었다. 푸른 검로와 마나 고리가 한 점에서 겹치려는 순간 이안의 손목 안쪽으로 뜨거운 것이 역류했다.
[교차 시전 경로 불안정.]
[적합자의 의지 공명 부분 충족. 기억 공명 미충족.]
그는 어느 손에 지팡이를 쥐었는지 잠깐 잊었다. 눈앞에는 자신의 손과 카일의 손이 겹쳐 보였다. 발을 놓을 계단의 높이마저 뒤틀렸다.
수식이 깨졌다.
오른손의 감각이 한순간 왼팔로 밀려났다. 이안은 지팡이를 놓친 줄 알고 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는 분명 차가운 목재가 있었지만 마나는 다른 사람의 검을 쥔 것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쏟아졌다.
마나 고리가 튀어 마수의 붉은 실 하나를 잘랐지만 나머지에는 닿지 못했다. 이안은 계단에 무릎을 짚었다.
“이안 님!”
세라가 손등을 이안의 목덜미에 붙였다. 따뜻한 신성력이 호흡의 박자를 되찾게 했다. 카일은 대검 옆면으로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를 밀어냈다.
“무슨 수식을 건드린 겁니까? 손목 맥이 거꾸로 뜁니다.”
“길을 하나 겹쳐 보려 했습니다.”
“다음에는 먼저 말하세요. 제가 붙들 위치도 알아야 하니까요.”
이안은 변명하지 않았다. 세라의 손이 떨어지자 다시 흐트러질 듯한 마나를 자신의 호흡에 맞춰 눌렀다. 카일은 둘의 대화를 듣고도 묻지 않았다. 아직 제 칼로 마수의 턱을 버티는 중이었다.
“허세를 부리더니.”
“실패했습니다.”
이안이 숨을 골랐다.
“하지만 아래를 봐야 합니다.”
잘린 실의 빈자리에서 붉은 물이 빠져나갔다. 세라의 빛이 그 틈을 비췄다. 마수의 가슴 한복판에는 핵이 없었다. 수조 암반에 붙은 둥근 검붉은 덩어리가 실들을 내뿜고 있었다.
“저게 심장인가.”
카일이 검끝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심장이라면 저기 있습니다. 이 몸통은 길을 막는 껍질이고요.”
“그러니까 계속 벨 수 있었던 거군.”
카일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는 암반 속의 덩어리까지 거리를 재듯 검을 곧게 뻗었다. 계단에서 내려가도 수조의 물살과 부서진 난간을 넘어야 닿을 자리였다. 이안은 조금 전 뻗은 수식이 그 전에 흩어진 이유를 이제 알았다.
이안은 계단의 양 벽에 지팡이를 찍었다. 돌이 부풀어 올라 좁은 턱을 만들었다. 카일이 껍질의 무게중심을 쳐 턱 아래로 밀었다. 세라가 그 위에 얇은 결계를 씌웠다.
마수가 턱에 부딪쳐 포효했다. 결계가 떨렸지만 위쪽 계단으로는 넘어오지 못했다.
토른이 지상 문턱의 고리에 납빛 상자의 사슬을 감았다. 경비대 호각 소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그는 사슬을 두 바퀴 더 돌린 뒤 몸으로 상자를 가렸다. 신호를 보고 몰려올 사람에게 이 위험물을 그대로 건네지는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카일도 그를 노려봤지만 더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지원이 오면 이 입구를 통제하겠다.”
“상자도요.”
카일의 말에 토른은 사슬 끝을 더 단단히 쥐었다.
“그건 당신과 다시 이야기해야겠지.”
이안은 지팡이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손목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수조의 검붉은 덩어리가 한 번 크게 뛰었다.
쿵.
이어 봉쇄 턱 뒤편에서 더 낮은 박동이 울렸다.
쿵.
돌벽 안쪽에 금이 갔다. 마수는 턱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턱 밑으로 새 실을 밀어 넣고 있었다.
세라의 결계가 처음보다 낮아졌다. 이안이 만든 돌턱의 안쪽에서는 붉은 물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버티는 시간을 벌었을 뿐 흐름 자체를 끊지는 못했다.
“오래 못 버팁니다.”
이안이 말했다.
카일은 검을 어깨에 걸지 않았다. 세라는 숨을 고르면서도 결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네 사람의 시선이 수조 암반의 심장에 모였다.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