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상태창이 너무 많음

7화: 균열에 박힌 쐐기
왕립 마도탑 북문을 나섰을 때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오를 넘긴 시각이었지만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햇빛을 가렸다. 아르덴 북부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젖은 돌바닥 위로 세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토른 경위는 품에 안은 납빛 증거 상자를 고쳐 쥐며 걸음을 재촉했다.
“탑에서 울린 붉은 경보가 마음에 걸립니다. 배수로 입구에 경비대를 두었으니 함부로 들어간 자는 없어야 합니다만.”
“그 경보는 문 안쪽의 두드림과 달랐습니다.”
이안이 지팡이를 짚으며 말했다.
“돌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금속이 바위를 긁어내는 얇은 마찰음이었습니다. 파편이 스스로 내는 반응이 아닙니다.”
세라는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가 폈다. 손등의 흰 문양은 여전히 절반쯤 흐려져 있었으나 피부 아래에서 미세하게 맥동했다.
“저도 느꼈습니다. 신성 마력이 밀려나는 감각이 이전 지하 수조와는 달랐어요. 무언가 억지로 비틀어 끼워 넣은 것처럼 찌르는 진동이었습니다.”
구시가지 외곽의 폐쇄 배수로 입구에 다다랐을 때 토른이 걸음을 멈췄다.
철문 앞에 서 있어야 할 경비병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입구를 막아두었던 성당의 백색 봉인 끈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단면은 날카로운 쇠붙이로 단숨에 끊어낸 듯 매끄러웠다.
“경비병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토른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리를 비울 녀석들이 아닙니다.”
이안은 쪼그려 앉아 바닥의 흙탕물을 살폈다. 끊어진 끈 옆으로 젖은 진흙 위에 깊게 패인 군화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도탑 수습 마법사의 가벼운 신발이나 경비병의 보급 장화가 아니었다. 징이 박힌 무거운 군용 장화였다.
“단 한 사람입니다.”
이안이 손가락 끝으로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보폭이 넓고 무게중심이 낮습니다. 무거운 무기를 든 자가 혼자 내려갔습니다.”
세라가 손을 들어 백색 마나를 흩뿌렸다. 엷은 빛의 막이 배수로 입구 안쪽으로 퍼져나가며 기척을 훑었다.
“안쪽에 매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렀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어요.”
“마도탑에 다녀온 두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토른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렸습니다.”
이안은 지팡이 머리의 청색 보석을 가볍게 두드렸다.
“현장 검증 조건은 문을 개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침입자가 이미 봉인을 건드렸다면 즉시 확인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세라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다시 허가를 받기엔 늦습니다. 동행 감시관으로서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진입하죠.”
세 사람은 밧줄을 타고 지하로 이어지는 수직 통로를 내려갔다.
배수로 아래로 내려서자 축축한 이끼 냄새 사이로 마른 쇳내가 풍겼다.
어둠 속 저편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 찌르륵.
돌 틈에 박힌 쇠를 비트는 듯한 금속음이었다.
지하 수조의 바닥은 검은 모래로 질척거렸다.
석벽의 거대한 균열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돌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안쪽의 기괴한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균열 주변의 분위기는 이전과 판이했다.
공기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자연스러운 냉기가 아니라 마나를 굳혀버리는 인위적인 한기였다.
세라가 신성 결계를 넓히려 하자 손끝에서 튀는 백색 불꽃이 흔들렸다.
“결계가 흩어집니다. 마나의 결이 심하게 꼬여 있어요.”
이안의 시야 한구석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파르르 떨리며 떠올랐다.
[외부 억제 기제가 고대 봉인석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경고: 균열의 고유 진동을 교란하는 외래 금속 반응 감지.]
이안의 귓가에 낮고 거친 바르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군.
‘역겨운 냄새?’
―산 자들이 잔재주를 부렸다. 문을 닫아둔 봉인석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게 만들고 있어.
바르칸의 상태창은 짧은 문장을 띄운 뒤 다시 숨었다.
이안은 지팡이 끝을 바닥에 대고 숨을 골랐다. 성녀의 힘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대마법사로서 마나의 맥을 짚었다.
푸른빛 마나 한 줄기가 지팡이 끝에서 뻗어나가 바닥을 기어갔다. 마나는 균열의 석벽을 타고 오르다가 문 왼쪽 모서리 아래 틈새에서 거칠게 꺾였다.
“저기입니다.”
이안이 가리킨 곳은 검은 모래와 무너진 돌무더기에 덮여 있던 암반 이음매였다.
토른이 횃불을 높이 들었다. 붉은 불빛 아래 드러난 암벽 틈새에는 어른 팔뚝만 한 굵기의 묵직한 쇠못이 박혀 있었다.
단순한 철못이 아니었다.
표면이 검붉은 광택을 띠는 합금이었고 못 머리에는 톱니 모양의 나선형 홈이 정밀하게 깎여 있었다.
그 쇠못은 균열을 메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 틈을 쐐기처럼 억지로 비틀어 벌리고 있었다.
못 표면에 새겨진 주술 문양이 번쩍일 때마다 차가운 공명이 지하 수조로 퍼져나갔다.
“이건 루미아의 물건이 아닙니다.”
토른이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왕국 마도탑의 봉인 도구는 은합금이나 백양목을 씁니다. 이런 검붉은 주철에 각진 주술식을 새기는 방식은…….”
“제국입니다.”
세라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아르케스 제국 군부의 제식 규격이에요. 국경 분쟁 지역에서 괴수를 억제할 때 쓰던 쐐기입니다.”
“단순한 억제 쐐기가 아닙니다.”
이안이 지팡이로 못 주변의 마나 흐름을 짚어내며 덧붙였다.
“봉인을 누르는 게 아니라 고대 봉인의 주파수를 억지로 긁어내서 외부로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탑의 관측실에서 잡혔던 두 번째 응답은 이 못이 송출하던 신호였어요.”
누군가 균열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이 쐐기를 박아 신호를 수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뽑아야 합니다.”
토른이 허리에서 봉인 집게를 꺼내들었다.
“이런 흉물이 지하에 박혀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당장 수거해야 합니다.”
“기다리십시오.”
이안이 토른의 팔을 막아섰다.
“함부로 뽑으면 반발 폭발이 일어납니다. 제국의 군용 쐐기는 외부 마나가 닿으면 내부의 마력핵을 자폭시키도록 안전장치가 걸려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안은 마도탑 금서고에서 보았던 제국의 주술 구조도를 빠르게 떠올렸다.
제국의 쐐기는 강한 억지력으로 마나를 가둔다. 마나를 주입해 해제하려 들면 즉각 덫이 작동한다.
반대로 쐐기가 물고 있는 암반 접촉면의 마나를 일순간 진공 상태로 비워버린다면 쐐기는 물고 있던 압력을 잃고 헛돌게 된다.
“세라 사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빛을 쐐기에 직접 닿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접촉면을 분리하는 순간 터져 나올 충격파만 결계로 감싸주시면 됩니다.”
세라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충격은 제가 전부 막겠습니다.”
이안은 숨을 멈추고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대마법사의 마나가 정밀한 푸른 칼날 형태로 벼려졌다. 그는 지팡이 끝을 쐐기 바로 옆 바위 틈에 밀어 넣었다.
‘공백식, 역류 분리.’
파지직!
지팡이 끝에서 주변의 공기와 마나 잔여물이 빨려 들어가며 칠흑 같은 공백이 형성되었다.
바위를 짓누르던 쐐기의 톱니가 지지대를 잃고 헛돌기 시작했다.
쐐기 머리의 붉은 룬이 위험하게 점멸했다. 갇혀 있던 파동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세라의 백색 장막이 쐐기 전체를 감쌌다.
콰앙!
먹먹한 폭음이 결계 안쪽에서 터졌다. 충격이 결계를 뒤흔들었지만 세라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장막을 유지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토른이 납빛 봉인 집게로 쐐기 머리를 잡아챘다.
끼기긱!
살을 에는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쐐기가 암벽에서 빠져나왔다.
토른은 지체 없이 그것을 열어둔 납빛 상자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세 겹의 잠금쇠가 맞물리자 지하 수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불쾌한 진동이 멎었다.
바위 벽의 균열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붉은빛을 뿜지 않았고 공기를 찢던 금속음도 사라졌다.
세라가 거친 숨을 내쉬며 결계를 거두었다.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해냈군요.”
“상처는 없습니까?”
이안이 묻자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마나를 완벽하게 비워준 덕분이에요.”
토른이 상자를 들어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제국의 개입은 명백해졌습니다. 마도탑의 베른 녀석도 이안 님을 일방적인 오염 매개로 몰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안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바닥의 흙탕물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 못을 건드렸던 군화 자국.
침입자는 왜 못을 뽑지 않고 건드리기만 한 채 물러났던 것인가?
“서둘러 올라갑시다.”
이안이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지하 배수로를 빠져나가는 길은 훨씬 어두웠다.
세 사람은 좁은 석조 통로를 지나 지상 출구로 이어지는 나선형 돌계단 앞에 다다랐다.
계단 위쪽에서 바깥의 잿빛 빛줄기가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계단 맨 위쪽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멎었다.
쿵.
철갑을 덧댄 장화가 돌바닥을 짓밟는 소리였다.
세라가 걸음을 멈추고 손을 올렸다. 토른도 상자를 등 뒤로 숨기며 검을 반쯤 뽑았다.
“누구냐! 우리는 왕립 마도탑과 성당의 공식 조사대다!”
토른의 일갈이 어두운 통로에 울렸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붉은 갈색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 사내였다.
체격은 곰처럼 떡 벌어져 있었고 낡은 가죽 갑옷 위에는 부러진 날개 문양이 새겨진 흉갑을 걸치고 있었다.
등 뒤에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양손 대검이 비스듬히 메여 있었다.
사내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고 그 시선은 토른의 품에 들린 납빛 상자에 꽂혔다.
“공식 조사대?”
사내가 낮게 헛웃음을 쳤다.
목소리는 굵고 탁했으며 쇠를 긁는 듯한 거친 울림이 담겨 있었다.
“탑 샌님들과 성당 비둘기들이 몰려와서 뭘 주웠나 했더니 기어이 그걸 건드렸군.”
토른이 검을 완전히 뽑아 겨누었다.
“신분을 밝혀라! 관헌의 공무를 방해하면 체포하겠다!”
“체포?”
사내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등 뒤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거대한 칼날이 칼집을 벗어나는 순간 통로 전체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검날 곳곳에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흔적인 이 빠진 자국들이 역력했다.
그 무딘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검기는 계단참의 돌벽을 사정없이 긁어내고 있었다.
단순한 용병의 기세가 아니었다. 뼈를 깎는 실전을 거친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정점의 살기였다.
토른이 검기의 압력에 숨을 들이켜며 반 보 물러섰다.
세라가 앞으로 나서며 백색 결계를 단단히 펼쳤다.
“멈추십시오! 우리는 정당한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무기를 거두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사내는 세라의 결계를 차갑게 일별하더니 칼끝으로 토른의 품에 들린 상자를 가리켰다.
“그 상자 안에 든 쐐기, 내놔라.”
사내의 붉은 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제국 놈들이 냄새를 맡고 파놓은 덫이다. 너희 같은 먹물들이 호기심으로 만지작거리다 탑 구석에 처박아둘 물건이 아니야.”
이안은 세라의 어깨 너머로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검자루 끝에 박힌 부러진 가문의 문장.
그리고 온몸에서 풍겨오는 마른 쇠 냄새와 피비린내.
지상 통제선의 봉인 끈을 단칼에 끊고 들어왔던 발자국의 주인이 바로 이 자였다.
이안은 지팡이를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보석의 푸른빛이 사내의 검기와 맞부딪치며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이것은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던 위험물이며 왕국과 성당이 공동으로 관리해야 할 증거다.”
이안의 차가운 대답에 사내는 대검을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계단 바닥의 화강암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파편이 튀었다.
“증거로 넘겨서 탑 장로들 탁자 위에서 썩히겠다고? 웃기는 소리 마라.”
사내가 거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좋게 말할 때 넘겨라. 안 그러면 네놈들 손모가지를 부러뜨려서라도 가져갈 테니까.”
좁은 계단 통로에서 두 갈래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피할 수 없는 격돌의 뇌관이 당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