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 공학자의 전설 무기 공방

5화: 룬 홈의 오차
아침 안개가 카르딘 남부 골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페로 대장간의 문턱 안쪽에는 어제 쓸어 담았던 검은 입자의 흔적이 가느다란 선으로 남아 있었다.
이안은 작업대 위에서 숯가루로 정리한 결함 보고서를 챙겼다. 활대의 비틀린 하중선과 서로 다른 두께의 금속 고리가 손톱 두께의 비율로 종이 위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마라는 화덕 옆에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스승님. 창고 관리병이 군용 장비를 순순히 내줄까요?”
“내주지 않으면 제 손으로 활대를 부러뜨려야지.”
“농담이 아니에요. 군용 장비를 하급 공방에 통째로 맡기는 건 규정에도 없을 텐데요.”
“사흘 뒤에 부러질 무기를 쥐고 순찰을 나가느냐 아니면 규정을 조금 넘겨서라도 제대로 깎아 쓰느냐의 문제야. 경비대장도 멍청이가 아니라면 어느 쪽이 제 목숨에 이로운지 알겠지.”
이안은 보고서를 가죽 주머니에 넣고 공방 문을 열었다.
서늘한 늦가을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문밖 자갈밭은 안개에 젖어 축축했다. 이안은 발을 내딛기 전 담벼락 모퉁이를 살폈다. 어젯밤 누군가 서성거렸던 자리에 밑창 홈이 닳아 없어진 낡은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군용 장화가 아닌 민간 노동자의 신발이었다.
이안은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가자.”
마라가 나무 상자를 짊어지고 뒤를 따랐다.
경비대 창고의 철문은 묵직한 기름 냄새를 뿜어냈다.
창고 관리병은 탁자에 다리를 걸친 채 마른 빵을 씹고 있었다. 이안이 도면과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
“약속한 결함 보고서입니다.”
관리병은 마지못해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몇 줄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게 다 무슨 소리요? 룬 홈의 깊이가 입구와 출구에서 손톱 반만큼 차이가 난다고? 게다가 금속 고리가 서로 다른 쇠라는 건 또 뭐요?”
“첫 번째 석궁의 고리는 구리가 섞인 연철이고 두 번째는 탄소가 부족해 쉽게 휘어지는 회색 철입니다.”
이안은 종이에 그려진 수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서로 다른 합금을 같은 두께로 두드렸으니 탄성이 어긋납니다. 활대가 당겨질 때마다 오른쪽 고리가 먼저 주저앉고 그 충격이 룬 홈의 턱을 짓누릅니다.”
“그걸 하급 대장장이가 눈대중으로 증명한단 말이오?”
관리병이 쏘아붙였다. 그때 안쪽 철문이 열리며 전달병이 걸어 나왔다.
“증명은 어제 이미 끝났소.”
전달병의 차분한 목소리에 관리병이 입을 다물었다. 전달병은 탁자 위의 도면을 들어 올려 압력선 표시를 들여다보았다.
“어제 네가 손본 석궁은 사격장에서 스무 발을 쏘는 동안 단 한 번도 시위가 털리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밀리던 탄착군도 중앙에 꽂혔지.”
“그건 활대 밑에 덧댄 받침판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고에 남은 두 자루는 받침판만으로는 못 고칩니다.”
이안이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룬 홈 자체가 잘못 파여 있습니다. 공방으로 가져가서 룬 홈의 단차를 다시 깎아내야 합니다.”
관리병이 즉각 반발했다.
“창고 밖으로 군용 장비를 반출하는 건 엄연한 군율 위반이오!”
“여기서 불을 피우고 정밀 연마를 하라는 겁니까?”
이안이 차갑게 맞받았다.
“바닥은 축축하고 조명도 없으며 룬을 달랠 화덕도 없습니다. 여기서 손을 대면 홈을 파먹거나 마나 잔향이 터져 석궁을 아예 버리게 됩니다. 순찰병 손에서 터지면 그 책임은 관리병 나리가 지실 겁니까?”
관리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전달병이 관리병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끼어들었다.
“반출은 규정에 어긋나지만 무기를 썩히는 것 역시 문책 대상이지. 공방으로 가져가는 걸 묵인하는 대신 조건을 붙이겠다.”
“말씀하십시오.”
“기한은 오늘 해가 질 때까지다. 수리비는 두 자루 합쳐서 은화 열두 닢. 어제 약속한 검사비는 이 수리비에 포함한다.”
마라가 숨을 삼켰다. 두 자루에 열두 닢. 사흘 뒤 압류를 막기에는 부족했지만 당장의 숨통을 틔우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좋습니다. 대신 부품을 분해하며 나오는 금속 찌꺼기는 공방에서 처분하겠습니다.”
관리병이 코웃음을 쳤다.
“쓸모도 없는 쇳가루 따위 마음대로 해라.”
전달병은 봉인 끈이 묶인 가죽 자루 두 개를 꺼내왔다. 마라가 재빨리 나무 상자에 자루를 받아 넣었다.
창고를 나서는 길에 전달병이 이안에게 낮게 속삭였다.
“헤르만 공방에서 오늘 아침 경비대 본부에 고장난 석궁들을 헐값에 넘기라고 문의를 넣었다더군.”
이안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자가 왜 이걸 탐낼까요?”
“글쎄. 하지만 네가 오늘 해지기 전까지 고쳐 오지 못하면 이 석궁들은 헤르만의 화덕으로 들어간다.”
“그 화덕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겁니다.”
이안은 짧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페로 공방의 문이 닫히고 빗장이 덜컥 걸렸다.
작업대 위에 기름때 묻은 석궁 두 자루가 나란히 놓였다. 이안은 붕대 감긴 왼손으로 석궁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송곳과 집게를 집어 들었다.
“마라. 등불을 작업대 바로 위로 내려.”
“네!”
노란 불빛이 룬 홈의 음각을 길게 비췄다. 이안이 첫 번째 석궁의 금속 고리를 풀어내자 활대 나무가 삐걱거리며 튀어 올랐다.
“역시나 비틀려 있어.”
고리가 풀린 활대는 왼쪽으로 약 1밀리미터 휘어져 있었다. 금속 고리가 억지로 오른쪽으로 비틀어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룬 홈을 잰다.”
이안은 손톱 절반 두께부터 얇게 다듬어 둔 폐철 게이지를 꺼냈다. 0.3밀리미터 두께의 철편을 룬 홈 입구에 밀어 넣었다.
사각.
철편이 홈 초입에서 뻑뻑하게 걸렸다. 그러나 안쪽으로 밀어 넣자 헐렁하게 헛돌았다.
“입구는 좁은데 안쪽으로 갈수록 넓어져. 정을 비스듬히 눕혀서 깎아낸 탓이야.”
마라가 고글을 고쳐 쓰며 물었다.
“입구가 좁고 안이 넓으면 마나가 어떻게 돼요?”
“물길로 생각해 봐. 넓은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갑자기 좁은 바위틈을 만나면 어떻게 되지?”
“소용돌이가 치고 역류해요.”
“마나도 똑같아. 방아쇠에서 출발한 마나가 좁은 입구에 부딪히는 순간 병목 현상이 일어난다. 홈 안에 갇혀 소용돌이치던 마나가 활대로 분산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거야.”
마라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스승님 손등을 태웠던 불꽃도……?”
“그 마나 잔향이었어. 헤르만은 마나가 역류하니까 석궁 위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서 금속 고리를 억지로 덧대 시위를 강하게 당기려 한 거다. 병목을 뚫을 생각은 안 하고 뒤에서 억지로 밀어붙인 셈이지.”
이안이 두 번째 석궁의 고리도 분해했다.
예상대로였다. 두 번째 석궁의 룬 홈 역시 입구가 출구보다 정확히 0.3밀리미터 좁았다. 똑같은 잘못된 형틀을 대고 깎아낸 것처럼 오차가 일치했다.
그때 홈 밑바닥 결속면을 긁어내던 마라가 탄성을 질렀다.
“스승님! 여기 좀 보세요!”
핀셋 끝에 굳어 있던 잿빛 검은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공방 문턱과 석궁 고리 밑에서 나왔던 바로 그 입자였다.
이안은 어제 봉인해 둔 가루 봉투를 꺼내 종이 위에 나란히 올렸다. 하급 마석 조각을 두 가루 사이에 놓았다.
지잉.
미세한 마나 반응에 검은 입자들이 파르르 떨리더니 마석 쪽으로 엉겨 붙으며 단단하게 뭉쳤다.
“일반 철가루는 마나를 받는다고 뭉치지 않아요.”
“이건 마나를 머금으면 굳어지는 성질이 있어. 헤르만이 룬 홈을 파다가 실수로 틈을 크게 벌려 놓자 이 가루를 반죽해 메워 넣은 거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루가 굳으면서 통로를 막았고 충격을 견디지 못해 부스러진 거야. 불발 원인은 0.3밀리미터의 좁은 입구와 이 불량 충전재 두 가지다.”
챙강!
바깥 골목에서 쇠파이프를 걷어찬 소리가 울렸다.
마라가 화덕 옆 쇠막대를 낚아채 문 쪽으로 달려갔다.
“누구야!”
벌컥 열린 문 너머로 짙은 회색 외투를 걸친 그림자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달아났다. 마라가 뛰쳐나가려 하자 이안이 옷깃을 낚아챘다.
“쫓아가지 마. 함정일 수 있어.”
이안은 마라를 물리고 담벼락 아래를 살폈다.
신선한 발자국 옆에 마석 분쇄 찌꺼기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회색 가루가 한 줌 흩어져 있었다.
이안이 쇠주걱으로 가루를 긁어모았다.
“지켜보는 눈이 하나가 아니야. 서두르지 않으면 석궁을 고쳐 내기도 전에 일이 터진다.”
마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쇠막대를 내렸다.
“……알았어요. 대신 저 자들이 딴소리 못 하게 완벽히 고쳐 놔요.”
문제의 원인은 명확했다. 남은 것은 0.3밀리미터의 단차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이안의 다친 손으로는 정과 망치로 좁은 홈을 균일하게 파낼 수 없었다. 그는 작업대 아래의 강철 배수관을 보았다. 톱으로 관 끝을 손가락 굵기만큼 잘라낸 뒤 줄로 밀어 매끄러운 원통형 봉을 만들었다.
“마라. 규석 가루와 기름을 가져와. 쇠로 깎는 게 아니라 갈아 낼 거다.”
원통 봉에 기름을 바르고 고운 규석 분말을 얇게 묻혔다.
“이 원통의 지름은 룬 홈의 규격과 같아. 이걸 홈에 넣고 왕복시키면 튀어나온 0.3밀리미터의 단차만 깎여 나간다.”
현대의 래핑 공정이었다. 일정한 규격의 연마구를 이용해 손기술의 한계를 넘는 방식이었다.
“잡아.”
마라가 석궁을 단단히 누르자 이안이 연마봉을 홈에 걸쳤다.
서걱. 서걱. 서걱.
규석 가루가 금속을 고르게 긁어내며 일정한 마찰음이 퍼졌다. 이안은 호흡을 멈추고 체중만을 실어 손끝의 미세한 저항에 집중했다.
뻑뻑하던 연마봉이 점차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사각거리며 마모된 쇳가루와 검은 충전재가 기름과 함께 밀려 나왔다.
마른 천으로 홈을 닦아내자 등불 아래 거울처럼 매끄러운 곡면이 드러났다. 입구부터 바닥까지 0.1밀리미터의 단차도 없이 일정한 통로가 이어졌다.
이안이 하급 마석을 홈 입구에 댔다.
쉬이익.
푸른빛이 번져 나갔다. 불꽃도 연기도 없었다. 마나는 맑은 물처럼 거침없이 룬을 관통해 활대 양끝으로 스며들었다. 거친 소용돌이는 흔적도 없었다.
“……흘러가요. 걸리는 곳이 없어요.”
마라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공차가 맞았기 때문이야. 통로가 매끄러우면 마나는 스스로 힘을 집중시킨다.”
이안은 손에 쥔 강철 연마봉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 또 다른 그림이 맞춰졌다.
배수관 안쪽에 마석 가루를 넣고 격발할 때 내벽 공차가 0.1밀리미터라도 어긋나면 폭발 압력은 관을 찢는다. 하지만 오늘처럼 내경을 균일하게 연마하고 점화 룬의 수평을 맞춘다면 단발 룬총은 현실이 된다.
쿵.
공방 바닥 아래 검은 모루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어제보다 훨씬 깊은 파동이 작업대를 타고 올라와 다듬어 놓은 석궁을 가볍게 떨리게 했다.
마라가 흠칫 놀라며 바닥을 보았다.
“스승님…… 방금 그건?”
“가만히 있어.”
이안이 말을 맺기도 전에 공방 문이 부서질 듯 덜컹거렸다.
쾅! 쾅! 쾅!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경비대 전달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쇳소리 섞인 거친 사내의 고함이었다.
이안은 작업대 위의 쇠집게를 천천히 쥐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