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교수님의 연구실 노예가 되기 싫어서

9화: 서명 없는 보고서
틀린 이름의 숫자
마렐이 깃펜 끝으로 양피지의 한 줄을 가렸다.
“이거 내 클램프가 잰 값 아니야.”
리에트는 눈을 들었다. 지하 열람실 벽시계가 아홉 시를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펼쳐 둔 기록지는 책상 절반을 차지했다.
‘첫 펄스 위상 편차 0.037마크.’
그녀는 방금 쓴 문장에서 ‘위상 편차’를 긋고 ‘접지선 내부 열 변위’로 고쳤다.
“맞아. 네 장비는 위상을 직접 재지 않았지.”
“내 숫자로 표준식이 틀렸다고 쓰면 나도 항의할 거야.”
마렐은 평소처럼 웃으려 했으나 입술이 떨렸다. 연구실 문을 두드리던 점검반의 군화 소리가 귓속에 남은 듯했다.
리에트는 서로 다른 두 장의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마렐의 저온 계측 클램프는 단독 고리의 첫 펄스에서 0.037마크를, 두 번째에서 0.078마크를 남겼다. 주 공명대의 계측 침이 2단계 증폭에서 가리킨 0.12마크와는 측정 대상도 실험 조건도 달랐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는 둘 다 같은 방향의 어긋남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그 감각을 보고서의 증거로 옮길 수는 없었다. 관자놀이가 아프고 손끝에서 잉크 냄새마저 희미해졌다.
리에트는 문장 하나를 지웠다.
‘표준식의 치명적 결함이 입증되었다.’
그 아래에 다시 썼다.
‘단독 고리의 접지선 열 변위와 다중 공명 2단계의 위상 역류가 각각 관측되었다. 현행 표준식의 미세 편차 무시 조건에 대한 독립 검증이 필요하다.’
“문장이 약해졌어.”
마렐이 말했다.
“그래서 버틸 거야.”
리에트는 에르반의 서명이 찍힌 사전 동의서를 보고서 뒤에 붙였다. 비상 차단을 요구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2초 안에 멈추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 아래에는 자신이 적은 07시 48분의 사고 기록이 있었다.
“교수님 서명이 있어서 다행이네.”
“서명은 실험 전 조건에 대한 거야. 이 보고서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지.”
리에트는 보고서 첫 장에 ‘책임 교수의 사후 확인 불가. 연구실 출입 봉쇄로 원본 대조 불가’라고 적었다.
마렐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까지 쓰면 네가 혼자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어.”
“안 쓰면 우리가 감춘 것처럼 보일 거야.”
마렐은 자신의 계측지에 서명했다. 장비 번호와 영점 교정 시각 옆에 또렷한 이름이 남았다.
“그럼 나도 같이 쓸게. 클램프를 잡은 손이 내 손이었으니까.”
리에트는 한동안 그 이름을 보았다.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지워 버릴 뻔했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교수의 서명이 없는 보고서였다. 그렇다고 자기 이름 하나로 다른 사람의 측정까지 떠안을 수는 없었다.
“독립 계측 담당. 원자료 작성자.”
그녀가 보고서의 기여자 칸에 적었다.
마렐이 보온 상자에서 마른 빵을 꺼내 반을 내밀었다.
“이것도 기록해? 식사 담당 마렐.”
“그건 내 책임이야.”
리에트는 빵을 받아 들고 물 한 모금을 삼켰다. 감각을 더 밀어붙일 수 없는 몸이었다. 남은 일은 손에 쥔 기록으로 해야 했다.
접수 번호
학부 감사실 앞에는 정오 긴급 평의회 자료가 묶음으로 놓여 있었다. 마렐이 제3공명연구실 이름을 찾았다. 그 옆에는 연구비 삭감과 공명핵 회수 요청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리에트는 창구에 보고서를 내밀었다.
“안전 사고 신고와 원자료 보존 요청입니다. 접수 번호를 주십시오.”
회색 조끼를 입은 접수 조교가 첫 장을 넘겼다. ‘표준식 위상 결함 분석’이라는 제목에서 손이 멈췄다.
“책임 교수 확인란이 비었군요. 조교 단독으로 연구 결론을 평의회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
“연구 결론을 승인해 달라는 신청이 아닙니다. 사고 경위와 검증 필요성을 접수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분석을 붙였습니까?”
“분석이 없으면 사고를 단순 출력 초과로만 분류하게 됩니다.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라는 표시도 했습니다.”
조교가 파손 항목을 읽더니 표정이 굳었다.
“정규 2등급 공명핵에 균열이 세 줄. 이 사실을 직접 신고하겠다고요?”
마렐의 손이 보온 상자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리에트는 잠깐 숨을 골랐다.
“예. 제가 본 손상입니다. 파손 핵은 연구실 안 암호 금고에 있습니다. 접근할 수 없어 상태 재확인은 못 했습니다.”
“자칫하면 실험 담당자 과실 자료가 됩니다.”
“그래서 차단 경위도 함께 적었습니다.”
리에트는 에르반의 사전 동의서와 자신이 적은 차단 기록을 펼쳤다. 문을 잠근 교수가 사후 확인을 거부한 사실은 그 옆에 있었다.
접수 조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서류철을 찾아 맨 위의 점검 기록을 보여 주었다.
‘08시 15분. 냉각 상태 및 내부 책임자 면담 불가. 강제 개문 보류. 긴급 평의회 결정 대기.’
“문은 아직 닫혀 있습니다. 점검반도 안에 들어가진 못했어요.”
마렐이 어깨에 힘을 풀었다. 리에트는 오히려 점검 기록의 빈칸을 보았다. 안에 누가 있는지, 무엇이 보관됐는지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파손 핵이 금고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 지금의 진술만으로는 경로를 밝힐 수 없었다.
“그 기록도 저희 보고서와 함께 다뤄 주십시오. 핵을 열어 확인할 때는 입회자와 인수 목록이 필요합니다.”
“그건 평의회가 정할 일입니다.”
“그러니 평의회 자료에 이 문장을 넣어야 합니다.”
조교는 보고서를 다시 훑었다. 에르반의 서명에 눈길이 한 번 더 머물렀다.
“사고 신고로는 접수하겠습니다. 결함의 입증이나 책임 판단은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도장이 첫 장과 리에트가 가져온 부본에 차례로 찍혔다. 작은 숫자가 찍혀 나오자 마렐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젠 기록에서 우리를 지울 순 없겠지?”
“쉽지는 않을 거야.”
리에트는 부본을 접어 장부 속에 넣었다. 접수 번호는 방패가 아니었다. 적어도 누가 언제 무엇을 신고했는지 가리키는 못 하나는 박았다.
친절한 질문
열한 시가 지나자 접수 조교가 다시 두 사람을 불렀다.
“부학장님이 작성자를 확인하겠답니다.”
감사실 안쪽에는 반듯한 예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세드릭 발테른은 리에트가 들어오자 미소부터 보였다.
“벨로아 양. 수석 장학생의 이름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꽤 꼼꼼한 서류를 쓰셨군요.”
“접수 번호가 있으니 서류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세드릭은 보고서 두 번째 장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0.037마크와 0.078마크. 작은 값들입니다. 그런데 0.12마크까지 이어지는 한 줄로 그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각각 측정한 것이 다릅니다. 연결 여부는 재현 실험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표준식의 결함을 제목에 올렸군요.”
“가능성이라고 본문에 썼습니다. 지금 확인된 건 역류와 파손, 그리고 안전 중단입니다.”
“교수님의 생각도 그렇습니까?”
“모릅니다. 연구실 문이 잠겼습니다.”
세드릭은 에르반의 사전 서명을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루센 교수가 학생에게 차단 권한을 줬다는 것은 분명하군요. 흥미롭습니다.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보관한 기록과 마렐 오르티스의 독립 계측 기록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본은 연구실 금고 안입니다.”
마렐이 리에트 옆으로 한 걸음 나왔다.
“제 계측지는 제가 작성했고 영점 교정도 제가 했어요. 원자료를 확인하려면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오르티스 양.”
세드릭의 시선은 곧 리에트에게 돌아왔다.
“원본을 한곳에 모으면 확인이 빠르겠지요. 평의회 전까지 제게 맡기시겠습니까?”
“원본 인수 목록과 입회자가 정해지면 제출하겠습니다. 지금은 접수된 사본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제가 자료를 없앨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자료를 보관했는지 남기자는 뜻입니다.”
세드릭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리에트는 그가 에르반의 서명보다 자신의 수정 흔적을 오래 보는 것을 알아챘다. 잘못 쓴 ‘위상 편차’를 지우고 ‘열 변위’로 고친 자리였다.
“틀린 문장을 남겨 두셨군요.”
“고친 이유까지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조교는 드뭅니다.”
말투는 칭찬이었으나 리에트에게는 물건의 값을 매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드릭은 접수 조교에게 보고서의 기여자 칸을 가리켰다.
“오르티스 양의 계측도 별도 자료로 붙이세요. 작성자를 빠뜨리면 나중에 수치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
마렐은 뜻밖이라는 듯 그를 보았다. 리에트는 세드릭이 원자료를 살피는 동안 누구의 손이 필요한지도 이미 계산하고 있다고 느꼈다.
평의회 문턱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평의회실 문이 열렸다. 서기가 배포용 자료를 한 묶음씩 들고 들어갔다. 리에트는 맨 뒤에 붙은 얇은 별첨을 확인했다.
자신의 보고서 첫 장이었다. 접수 번호와 마렐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들어갔어.”
마렐이 속삭였다.
“읽히는 건 다른 일이야.”
리에트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연구실 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에르반이 빗장을 풀었다는 소식도 없었다.
세드릭이 두 사람 뒤에 섰다.
“벨로아 양은 평의회에서 직접 말해야겠습니다. 현장에 있던 책임 교수 대신 보고서를 썼으니 질문도 받으셔야지요.”
“제 관측과 제가 한 조치에 대해서는 답하겠습니다. 교수님의 침묵을 대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리에트는 장부 가장자리를 쥐었다. 잉크가 묻은 손가락이 떨렸지만 부본만큼은 접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리고 회의 뒤에 제 방에도 들르시지요. 연구실 문제와 별개로 벨로아 양의 앞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마렐이 리에트를 흘끗 보았다. 경고장을 받은 자신의 공방도, 리에트의 학적도 저 남자의 말 한마디에 흔들릴 수 있었다.
“먼저 회의에서 사고 기록부터 다루시죠.”
리에트가 대답했다.
서기가 그녀의 이름을 호명했다. 문 안쪽에는 표준식 결함이라는 말을 지우려는 사람들과 공명핵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에트는 접수 도장이 찍힌 부본을 손에 쥐고 문턱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