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마트 사장은 갑질이 하고 싶다]

12화 [기적의 빨간 약]
소문과 들것
잿빛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골목을 메운 대기열은 전날보다 두 배 이상 길어져 있었다. 폐허 바닥에 웅크린 생존자들의 눈빛에는 전과 다른 열기가 감돌았다.
“진짜래. 그 꼬마 열병이 한 방에 내렸대.”
“요새 군인들도 총을 맡기고 약을 타 갔다더군. 부상병이 살아서 걸어 나갔다지 뭐야.”
소문은 날개보다 빠르게 퍼졌다.
식량만으로도 성역이었던 마트에 의약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상처 하나로 목숨을 잃는 시대에 약국은 신의 손길이었다.
“줄 벗어나지 마세요. 번호표 순서대로 입장합니다.”
빗자루를 든 박순자가 대기열을 정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곁에는 말끔한 얼굴의 민우가 작은 손으로 번호표 뭉치를 쥐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열로 신음하던 아이였다.
팔뚝의 상처에는 얇은 딱지만 앉아 있었다. 살아 있는 기적이 눈앞에 서 있으니 손님들은 숨을 죽인 채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거친 발소리가 흙먼지를 일으켰다.
“비켜! 다 비켜!”
고함과 함께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몰아쳤다.
붉은 늑대 문양을 덧댄 사내들이 인파를 헤치며 나타났다. 지하철 환승역 거점의 무장 탐색대 ‘적랑 헌터단’이었다. 그들 한가운데에는 간이 들것이 들려 있었다.
“커헉…… 컥!”
들것 위에 누운 사내의 상태는 처참했다.
적랑 헌터단의 부대장 조성태였다. 찢겨 나간 가슴과 어깨가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상처 주변의 혈관은 보랏빛으로 부풀어 목덜미까지 뻗어 있었다.
“3급 맹수 독이다!”
“피해! 독기 묻으면 다 죽어!”
손님들이 기겁하며 흩어졌다. 살을 태우고 피를 썩히는 괴사독에 중독되면 각성자라도 반나절을 버티지 못했다.
허리에 두 자루의 도끼를 찬 거구의 헌터 조찬익이 정문 앞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
“여기가 그 약국인가 하는 데냐? 당장 문 열어! 부대장님 숨 넘어가는 거 안 보여?”
조찬익이 군화발로 유리문을 걷어차려 했다.
탕!
쇠파이프가 바닥을 찍으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손님 발 멈춰라.”
정문을 지키던 강두철이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막았다.
“여긴 번호표 뽑고 들어가는 마트다. 발길질할 곳이 아니야.”
“우린 적랑이다! 안에 있는 약 전부 쓸어 담을 테니까 비켜!”
조찬익이 눈을 부라리며 손도끼 자루를 쥐었다.
가격표 앞의 칼날
“찬익이, 물러서라.”
들것 뒤편에서 묵직한 중저음이 울렸다.
대검을 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얼굴에 맹수 흉터가 파인 적랑 헌터단 대장 염도현이었다. C급 각성자인 그의 몸에서 묵직한 살기가 흘렀다.
염도현은 마트의 강화유리 너머를 쏘아보았다.
넓어진 매장 안쪽 카운터 뒤에 한도진이 서 있었다. 도진은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소란을 건조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염도현이 가죽 주머니를 열어 바닥에 쏟았다. 영롱한 빛을 뿜는 마수 코어들이 딸깍거리며 굴렀다.
“마트 사장. 긴말하지 않겠다. 부대장이 지하 터널에서 3급 마수에게 당했다. 독이 심장까지 닿기 직전이다.”
염도현이 묵직한 코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2급 정제 코어다. 이걸 통째로 줄 테니 네가 가진 해독제와 연고를 전부 내놔라.”
2급 코어 하나면 쉘터에서도 구하기 힘든 거금이었다. 주변 피난민들이 침을 삼켰다.
하지만 도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가 마이크 스위치를 켰다.
“손님. 귀한 돌을 가져오신 건 좋은데 번호표는 챙기셨습니까?”
“……뭐?”
염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대장이 죽게 생겼다. 지금 그깟 순서를 따질 때인가?”
“따져야죠. 저분들도 새벽부터 기다린 손님들입니다. 새치기는 안 됩니다.”
“이 자식이!”
참다못한 조찬익이 도끼를 뽑아 들었다. 도끼날에 푸르스름한 마력이 서렸다.
“좋게 말하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문 부수고 약 챙겨!”
조찬익이 정문으로 쇄도했다. 내리찍히는 도끼날이 유리문을 박살 낼 듯 번뜩였다.
“안 돼!”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쾅!
굉음이 터졌지만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허공에 투명한 격벽이 번쩍이며 충격파를 고스란히 튕겨냈다.
“끄아악!”
자신이 쏟아부은 완력이 되돌아와 조찬익의 양팔 뼈가 꺾였다. 손도끼는 튕겨 나갔고 거구는 벽면에 처박혔다.
“커헉…… 컥!”
조찬익이 피를 토하며 굴렀다. C급 전투원이 손끝 하나 못 대고 나가떨어지자 헌터들이 얼어붙었다.
도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차갑게 떨어졌다.
“무단 침입 및 기물 파손 시도. 경고 1회입니다. 한 번 더 무기를 휘두르면 전원 영구 출입 금지 처리하겠습니다.”
염도현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요새 정찰대가 왜 물러섰는지 이해가 갔다. 마트 안에서 사장의 말은 곧 법칙이었다.
염도현은 대검을 칼집에 넣고 도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경솔했다. 사과하지.”
“대장님!”
“닥쳐라. 성태를 살리려면 이 사장님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염도현은 권총과 단검을 꺼내 무장 보관함에 올려놓았다.
“무기부터 맡기겠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도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흉기 보관료는 한 점당 2포인트입니다. 약국은 사재기가 안 되니 환자를 직접 데리고 들어오세요.”
붉은 연고의 기적
보관함이 덜컹거리며 무기들을 집어삼켰다.
염도현과 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헌터들은 티끌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과 청결한 공기에 압도당했다.
“이쪽입니다. 환자를 눕히세요.”
윤설희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약국 앞 처치대를 안내했다.
들것이 놓이자 부드러운 스캔 광선이 조성태의 환부를 훑었다.
[환자 상태 정밀 분석]
[개체명: 조성태 (남, 32세)]
[상태: 3급 독각 맹수 네크로틱 독소 감염. 심부 열상 및 근육 괴사 64%. 심장 도달까지 8분.]
[처방: 고농축 마나 해독 소독 연고(통칭: 빨간 약) 1개, 멸균 거즈 1세트, 경구 해독정 1정.]
[정상 결제 가격: 20P]
“환자 상태가 몹시 나쁩니다. 십 분만 늦었어도 손을 쓸 수 없었겠군요.”
“치료할 수 있는가? 제발 살려만 다오!”
염도현이 애원하듯 2급 코어를 내밀었다. 도진이 결제 투입구에 코어를 넣었다.
[2급 정제 마수 코어 감정 완료: 60P]
[무기 보관료 3정(6P) + 의약품 처방(20P) = 총 26P 차감]
[잔여 포인트: 34P (적랑 헌터단 계정 등록)]
딸깍 소리와 함께 배출구에서 물품들이 나왔다. 루비처럼 붉은빛을 뿜는 투명한 연고 튜브와 알약, 거즈였다.
“설희 씨. 환자 입에 알약부터 넣으세요. 연고는 상처 부위에 전부 짜 넣으시고요.”
“네, 사장님.”
설희가 알약을 삼키게 도왔고 염도현이 떨리는 손으로 붉은 연고를 짰다.
치이익!
붉은 젤이 썩어 들어가던 가슴에 닿는 순간 믿을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났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던 검은 고름이 하얀 수증기로 변해 기화했다. 썩은 살점들이 거품과 함께 녹아내렸다.
“크아아악!”
조성태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썩은 피가 빠져나간 자리에 선홍빛 피가 돌았다. 찢겨 나갔던 근육 섬유가 빠르게 서로를 당기며 얽혀 들었다.
도진이 멸균 거즈를 덮고 압박 붕대를 감았다. 독기가 완전히 가라앉았고 목덜미의 보랏빛 핏줄도 자취를 감췄다.
“허억…… 헉!”
조성태가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부대장!”
“성태야! 정신이 드냐?”
조성태는 멍한 얼굴로 제 가슴을 보았다. 불타던 통증 대신 간지러운 감각만 남아 있었다.
“대장님……? 제가 살아 있는 겁니까?”
“살았다! 살았어!”
염도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다. 손바닥만 한 연고 하나가 부하를 살려낸 것이다.
유리창 너머로 광경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진짜야! 빨간 약을 바르니까 살이 다시 돋았어!”
“기적이다! 저건 진짜 기적의 약이야!”
골목 전체가 환호로 들썩였다.
거물 손님과 새로운 냄새
염도현이 일어나 도진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사내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도진은 영수증을 건넸다.
“감사는 됐습니다. 정상 거래를 하셨을 뿐입니다. 손님 계정에 34포인트가 남아 있습니다.”
“포인트요?”
“네. 2급 코어 잔액입니다. 다음에 쓰셔도 되고 지금 다른 물품을 사셔도 됩니다.”
염도현의 시선이 진열대로 향했다.
조명 아래 빛나는 생수병들과 온수기 옆의 핫컵라면, 매대 위의 신선한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꼬르륵.
조성태의 뱃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다른 대원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사장님. 저 음식들도 저희가 살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단 한 사람당 생수 두 병, 컵라면 한 개, 사과 한 개 제한은 지키셔야 합니다.”
“전부 주십시오!”
염도현은 남은 포인트로 대원들의 몫을 주문했다.
[추가 결제: 생수 8병, 핫컵라면 4개, 신선 사과 4개]
[차감 포인트: 32P]
[적랑 헌터단 잔여 예치금: 2P]
[도진의 현재 보유 포인트: 144P]
간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헌터들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얼큰한 라면 냄새가 매장에 번졌다.
“후루룩! 으아아……!”
조찬익이 면발을 삼키며 울먹였다. 염도현도 사과를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터져 나왔다. 폐허를 떠돌던 설움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식사를 마친 염도현이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한 사장님. 앞으로 우리 적랑 헌터단이 사냥해 오는 모든 상급 코어는 무조건 이 마트로 가져오겠습니다. 부디 단골로 받아주십시오.”
“규칙만 지키신다면 환영입니다.”
도진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무기를 돌려받은 적랑 헌터단이 정중히 인사하며 마트를 나섰다. 대기열의 손님들은 경외에 찬 눈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도진은 카운터에서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요새 정찰대와 적랑 헌터단의 결제가 더해져 보유 포인트는 144P에 달했다.
자본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때 시스템 창에서 새로운 금빛 알림이 반짝였다.
[고위험 수렵 집단 유치 성공]
[특수 수요 감지: 극심한 열량 소모 및 고단백 육류 갈망]
[신규 조리 시설 해금 조건 활성화]
[후보: 즉석 튀김 조리 코너 (비용: 150P)]
[해금 가능 메뉴: 황금빛 후라이드 및 특제 양념치킨]
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목숨 걸고 마수를 잡는 거친 헌터들에게 컵라면은 부족했다. 그들이 진짜 갈망하는 것은 기름진 단백질이었다.
바삭하게 튀겨낸 닭 다리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버무린 치킨 한 마리. 그 냄새가 퍼진다면 코어를 쥔 자들이 앞다퉈 기어들어 올 터였다.
“사장님, 대기 손님들 입장할까요?”
“네, 4번 손님부터 세 명씩 들이세요.”
도진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골목 저편을 보았다.
폐허 옥상에서 마트를 훔쳐보던 요새 첩보원이 황급히 몸을 숨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약국의 기적이 퍼진 이상 요새장 이성진도 가만히 있지 못할 터였다.
도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사장의 가격표는 그 어떤 군대보다 높고 견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