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17화: 사각지대 없는 요새
지하 1층 배전실 옆 창고에서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굵은 와이어에 묶인 사내의 가죽 조끼에는 붉은 송곳니 표식이 선명했다. 허벅지에 감긴 지혈대 위로 피가 배어 나왔고 민혁의 테이저건에 맞았던 가슴팍은 여전히 파르르 떨렸다.
"두목이 몇 놈이나 끌고 오지?"
박태우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탁자를 툭 치며 물었다. 사내는 태우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본, 본대에 남은 인원은 스물다섯 명쯤 됩니다. 개조 트럭 두 대랑 버기카 석 대가 전부예요."
"언제 출발하기로 했나?"
"정찰조가 해 지기 전까지 복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안 들어가면 당했다고 보고 내일 밤이나 모레 새벽에 전면 습격을 걸 겁니다. 강철 턱 두목님은 한 번 찍은 먹잇감은 절대 안 놓쳐요."
"먹잇감이라."
민혁이 한 걸음 다가서자 사내는 질겁하며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폐허에서 단검 하나와 테이저건으로 순식간에 자신들을 제압하던 민혁의 손놀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가 노린 게 뭐지?"
"굴, 굴뚝에서 맑은 연기가 났잖습니까! 정제유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모릅니까! 식량이랑 기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게 뻔한데……."
사내의 자백에 민혁과 태우는 말없이 시선을 나눴다.
예상대로였다. 쉘터의 보일러가 돌아가며 뿜어져 나온 온기와 맑은 수증기가 굶주린 약탈자들의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태우가 창고 철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스물다섯 명의 무장 병력이라. 개조 트럭으로 방벽을 밀고 들어오면 버티기 힘들어. 게다가 우리 방위대는 열두 명이 전부다."
"문제가 화력뿐만이 아닙니다."
뒤따라온 한소희가 손에 쥔 양철 도면을 펼쳤다.
"남쪽 진입로만 해도 무너진 고가도로 하부, 폐주유소 뒤편, 배수관 출구까지 사각지대가 널려 있어요. 붉은 안개가 짙어서 50미터 앞도 안 보이는데 놈들이 연막을 치고 기어오면 벽이 뚫릴 때까지 알아챌 방법이 없어요."
"외곽에 보초를 세우면 되지 않나?"
"안개 속에서 보초를 세우면 놈들의 저격총에 표적판이 될 뿐이에요. 전선을 새로 깔 시간도 없고 기온이 떨어지면 피복이 굳어서 단선 신호조차 늦게 잡혀요."
소희의 지적은 정확했다. 눈이 멀어 있는 요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민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태우 아저씨, 일단 방위대를 동원해 남쪽 출입문과 환기탑 주변에 폐철판 바리케이드를 세워 주세요. 소희 씨는 중앙 모니터에 연결할 독립 전원 단자를 준비해 두시고요."
"감시장비는 어쩔 셈이냐? 아까 말한 그 무선 카메라인가를 진짜 구할 수 있는 건가?"
"네. 몇 시간 뒤면 돌아옵니다. 안개 너머를 대낮처럼 비춰 줄 눈을 가져오겠습니다."
민혁은 두 사람을 안심시킨 뒤 정비실 안쪽 깊숙한 개인 창고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차원 균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청동 문고리가 회전하며 문이 열리자 아포칼립스의 매캐한 포자 냄새가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마포 오피스텔 특유의 은은한 디퓨저 향기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잔잔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하아……."
민혁은 낡은 야상 점퍼와 방탄조끼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자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물줄기가 온몸의 긴장과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보리차를 들이켜고 배달 앱으로 따뜻한 설렁탕을 주문해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멸망한 세상에서 흙탕물을 구르고 돌아와 누리는 이 소박한 일상은 언제나 기적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송도의 새벽 안식처는 지금 약탈자들의 칼날 앞에 놓여 있었다.
민혁은 컴퓨터를 켜고 산업용 특수 보안 장비 전문 업체의 당일 출고 목록을 검색했다.
일반 가정용 웹캠은 아포칼립스의 거친 환경을 견딜 수 없었다. 붉은 독 안개의 산성 성분과 영하로 떨어지는 밤기온을 버텨낼 규격이 필요했다.
민혁은 사전에 파악해 둔 용산의 특수 보안 장비 도매상으로 차를 몰았다.
매장 안쪽 상담실에서 직원이 가져온 검은색 하드케이스가 탁자 위에 열렸다.
"혹한기·산악 플랜트 감시용 무선 PTZ 시스템입니다. 군용 수준의 방수·방진 IP67 등급이라 폭우나 화학 물질 분진 속에서도 렌즈가 흐려지지 않습니다."
직원이 매끄러운 무광 블랙 바디의 렌즈를 가리켰다.
"스타라이트 센서와 고출력 적외선 IR LED가 박혀 있어서 빛이 전혀 없는 암흑 속에서도 150미터 전방을 고화질로 잡아냅니다. 체온을 색상으로 구분하는 열화상 모드도 지원하고요."
"무선 전송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자체 고이득 안테나를 쓰면 개활지 기준으로 1킬로미터까지 끊김 없이 암호화 영상이 전송됩니다. 초강력 네오디뮴 자석 마운트가 있어서 철골이나 콘크리트 기둥에 몇 초 만에 고정할 수 있죠."
"전원은요?"
"대용량 배터리팩을 물리면 충전 없이도 보름 동안 연속 작동합니다. 함께 드리는 8채널 모니터 수신기에 전원만 꽂으면 전파를 자동으로 잡아서 8분할 화면으로 띄워 줍니다."
민혁은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열었다.
- 산업용 무선 적외선 열화상 카메라 8세트
- 장거리 광각 PIR 모션 감지 센서 12개
- 고이득 암호화 무선 중계기 및 안테나 2조
- 8채널 통합 관제 모니터 겸 NVR 레코더 1대
- 외장 배터리팩 및 초강력 마그네틱 브래킷 세트
장비들을 고강도 방수 전술 백팩에 채워 넣고 디지털 저울에 올렸다.
[38.4kg]
게이트 허용 한도인 50kg에 여유 있게 들어맞는 수치였다.
민혁은 오피스텔로 돌아와 무선 페어링 상태와 모니터 출력을 점검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카메라를 들이대자 벽장 뒤 배선의 미세한 온도 차이까지 모니터에 선명한 주황빛 윤곽으로 떠올랐다.
성능은 확실했다. 민혁은 매트리스에 누워 남은 쿨타임 동안 깊은 잠을 청했다.
열두 시간의 쿨타임이 끝나자마자 시공간이 뒤틀리며 송도 쉘터의 퀴퀴한 공기가 돌아왔다.
덜컹.
정비실 문가에서 불침번을 서던 박태우가 소총을 쥔 채 돌아보았다. 거대한 배낭을 멘 민혁을 발견하자 태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혁이 너……!"
"준비해 왔습니다."
민혁이 배낭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정비실 안쪽에서 밤새 회로판을 붙잡고 있던 한소희가 붉어진 눈을 비비며 달려왔다.
"이게 다 뭐예요?"
"쉘터의 눈이 되어 줄 물건들입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대 위로 매끄러운 흑색 코팅의 카메라 본체들과 안테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 고글을 얹은 소희가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군용 규격이잖아요? 불화마그네슘 코팅에 적외선 필터까지 들어갔어요. 게다가 선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신호를 보내죠?"
"독립 주파수를 쓰는 무선 통신 모듈입니다. 최대 1킬로미터까지 암호화 신호가 잡힙니다. 배선 없이 원하는 위치에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배선이 없다고요?"
소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선이 없으면 단선될 걱정도 없고 마물이 전선을 갉아먹을 일도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모니터를 보세요."
민혁이 접이식 8채널 관제 모니터를 펼쳤다. 소희는 코어 안정화 회로에서 빼둔 독립 전원 라인을 모니터에 재빨리 결선했다.
치직, 윙―.
낮은 구동음과 함께 액정 화면이 밝아지며 8개의 분할 창이 떠올랐다.
"작동해요! 정말로 작동해요!"
소희가 탄성을 질렀다. 태우 역시 턱수염을 쓸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물건이라면 놈들이 어디로 기어오든 손바닥 보듯 들여다볼 수 있겠어."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의 척후조가 움직이기 전에 설치를 끝내야 합니다."
민혁이 지도 위에 8개의 포인트를 찍었다.
1번: 북쪽 중앙 환기탑 꼭대기
2번과 3번: 남쪽 고가도로 교각 상판
4번: 서쪽 배수관 합류 지점
5번: 남동쪽 폐주유소 캐노피 철골
6번과 7번: 외곽 철조망 완충지대 좌우측
8번: 쉘터 주 출입구 방폭문 정면
"태우 아저씨는 엄호를 맡아 주시고 소희 씨는 무전으로 화면을 체크해 주세요. 제가 직접 올라가서 붙이겠습니다."
쉘터 밖으로 나서자 뼛속까지 시린 칼바람과 함께 붉은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민혁은 방독 마스크를 조여 매고 허리에 카메라 파우치를 둘렀다. 잔뼈가 굵은 스캐빈저의 몸놀림이 빛을 발했다.
환기탑 사다리를 타고 15미터 정상으로 기어올라 녹슨 철골에 마그네틱 브래킷을 가져다 대자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달라붙었다.
카메라를 켜고 각도를 맞추자 무전기에서 소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1번 카메라 신호 잡혔어요! 안개 너머 폐타이어 더미까지 다 보여요!
"다음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민혁은 곧바로 뛰어내려 고가도로 잔해로 이동했다. 방위대원들이 사주경계를 펼치는 사이 콘크리트 상판 틈새로 기어올라 2번과 3번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어 서쪽 배수관에는 적외선 트립와이어 센서를 심었고 폐주유소 캐노피에는 5번 카메라를 은폐 고정했다. 카메라 본체는 붉은 먼지로 위장 도색되어 있어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설치를 마칠 때마다 무전이 울렸다.
― 4번 통과! 센서 감도 최상이에요!
― 6번, 7번 연결 완료! 사각지대가 사라지고 있어요!
마지막 8번 카메라를 주 출입문 상단에 고정하고 쉘터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민혁의 장갑은 붉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수고했다, 민혁아!"
태우가 땀에 젖은 민혁의 어깨를 툭 쳤다.
정비실 안은 숨 막히는 침묵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면에 거치된 관제 모니터에는 8개의 고화질 실시간 영상이 한 치의 끊김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보세요, 민혁 씨."
소희가 화면 전환 버튼을 눌렀다. 일반 야간 모드에서 초정밀 적외선 열화상 모드로 전환되었다.
뿌옇던 붉은 독 안개가 흑백의 투명한 배경으로 물러나고 폐허 속 모든 온도가 색상으로 구현되었다. 방금 전 설치를 돕고 돌아온 대원들의 발자국에 남은 잔열까지 주황색 점으로 반짝였다.
"이건…… 마법이군."
태우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안개가 무색하구나. 놈들이 어디에 숨든 이 화면을 벗어날 수가 없어."
저 멀리 폐허 더미 사이로 들쥐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조차 녹색 십자선이 따라붙으며 [미확인 열원 감지]라는 문구를 띄웠다.
쉘터를 옥죄던 미지의 공포와 사각지대의 불안감이 단번에 깨졌다. 보초들의 목숨을 걸고도 지키지 못했던 외곽 500미터 반경이 완벽한 감시 요새로 거듭난 것이다.
"소희 씨, 모션 감지 경보 구역을 남쪽 주유소 진입로 100미터 지점으로 설정해 주세요."
"벌써 해 뒀어요. 그 선을 넘으면 경보음이 울리게 해 놨어요."
소희가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정비실 콘솔에서 날카로운 전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5번 카메라 화면으로 쏠렸다.
남동쪽 폐주유소 뒤편, 짙은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잡석 더미 위로 붉은색 사각형 박스가 번쩍였다.
[침입 경보: Sector 5]
[생체 열원 감지: 2]
화면을 확대하자 안개 속 흙바닥을 포복으로 기어오르는 두 개의 인간 형체 열 신호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 놈은 등 뒤에 볼트 커터를 멨고 다른 한 놈은 개조 소총을 든 채 철망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송곳니의 침공 척후조였다.
놈들은 머리 위 30미터 허공에서 첨단 열화상 카메라가 자신들을 대낮처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기어가고 있었다.
태우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쥐새끼들이 벌써 기어들어왔군."
민혁은 배낭 옆에 세워둔 전술 장비를 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우리가 먼저 환영 인사를 건넬 차례입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모니터 불빛을 받는 민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