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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6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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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붉은 송곳니의 그림자

청동 문고리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자 낡은 환풍기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민혁은 다용도실의 섬유유연제 냄새를 뒤로하고 서늘한 정비실 구석에 발을 디뎠다. 어깨에 멘 전술 배낭에는 현대 서울에서 챙겨 온 고배율 광학 관측경과 열화상 스코프, 휴대용 외상 구급 키트, 리튬 배터리 팩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무게는 정확히 17.8kg이었다.

그런데 코를 스치는 공기가 사뭇 달랐다.

늘 정비실을 짓누르던 곰팡이 핀 냉기와 녹슨 철 냄새 사이로 은은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복도 너머에서는 굵은 보일러 배관 속을 순환하는 온수 소리와 라디에이터가 달아오르는 규칙적인 금속음이 들려왔다.

민혁이 정비실 차폐문을 밀고 중앙 복도로 나섰다.

복도 한편의 임시 격리 구역에서 군용 모포를 두른 노인이 갓 끓인 맑은 물을 쇠컵에 담아 마시고 있었다. 늘 기침을 달고 살던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색색 고른 숨을 쉬었다. 양동이에는 붉은 부유물 하나 없는 투명한 정수가 찰랑거렸다.

지난번 반입했던 정밀 정수 필터와 난방용 정제 연료 캔이 실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민혁 씨, 오셨어요?"

배급대 앞에서 죽을 푸고 있던 기석이 그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덕분에 3구역 온수 라인이 터지지 않고 돌기 시작했습니다. 필터가 좋으니 물에서 쇳내도 안 나고요. 다들 민혁 씨 덕분이라고 난리입니다."

"다행이네요. 소희 씨와 태우 아저씨는요?"

"태우 대장님은 방위대 교대 점검 중이시고 소희 씨는 정비실 안쪽 시험실에 계실 겁니다. 그런데……."

기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복도 안쪽을 힐끔거렸다.

"윤대섭 관리위원이 아침부터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영 흉흉해요."

민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 왔을 뿐이었다.


중앙 배급소 앞 공터는 이미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무 궤짝을 밟고 선 윤대섭이 장부를 한 손에 쥔 채 목청을 높였다. 그 뒤에는 쇠파이프와 산탄총으로 무장한 관리반 대원 셋이 버티고 섰다.

"다들 내 말을 들으시오! 이번에 풀린 필터와 연료는 출처가 불분명한 물자요. 총칙 제4조를 보면 쉘터로 유입되는 모든 외부 에너지원과 정밀 물품은 배급 위원회의 승인과 검수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소!"

대섭의 눈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오는 민혁을 포착했다.

"마침 잘 왔군, 강민혁 스캐빈저. 어제 탐색대 복귀 장부에는 네놈이 가져온 상자 네 개의 기록이 아예 없었어. 정비실에 물건을 풀기 전까지 두 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했지. 그 물건들을 어디서 훔쳐 왔는지 당장 털어놓아야겠어!"

군중 속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민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대섭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정수 필터와 소독제 그리고 난방 연료는 어제 정식으로 배급 장부에 넘겼습니다. 기석 씨와 다른 대원들이 검수하고 서명까지 마쳤죠. 그것들이 지금 환자들을 살리고 보일러를 돌리고 있는데 훔쳐 왔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그 상자 안에 있던 은빛 정밀 부품들은 왜 장부에서 뺐나? 배급 위원회의 공식 봉인을 거부하고 멋대로 정비실에 숨겨 두지 않았어!"

대섭이 핏대를 세우며 민혁의 가슴팍을 삿대질하려던 찰나였다.

"그 부품에 손대는 순간 손가락부터 날아갈 텐데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한소희가 스패너를 손에 쥔 채 걸어 나왔다.

"그건 B2 보관고에서 회수한 마력 코어의 공명 주파수를 잡기 위한 고전압 절연 회로예요. 일반인이 함부로 만졌다간 쉘터 변전실 전체가 폭발해요. 관리위원님이 그 고전압을 몸으로 접지해 주실 건가요?"

대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 그런 위험물을 멋대로 들여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몰수해서 방폭 금고에 봉인해야지!"

"봉인하면 코어는 누가 제어합니까?"

묵직한 저음이 공터를 갈랐다.

야상 점퍼 차림의 박태우가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탐색대원들이 목숨 걸고 오염 구역을 뒤져서 코어를 가져왔고 민혁이는 사비와 연줄을 털어서 그 코어를 다룰 부품과 생필품을 구해 왔다. 대섭이 너는 그동안 보일러실 파이프 하나 갈지 못해서 노인들을 얼어 죽게 만들지 않았나?"

태우가 대섭의 턱밑까지 다가서며 서류철을 내리쳤다.

"탐색대가 위험을 짊어지고 물자를 들여올 때마다 전량 몰수하겠다고 날뛰면 앞으로 어느 미친놈이 밖으로 나가겠나? 주민 여러분, 이 따뜻한 물과 난방을 끄고 다시 얼음장 바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민혁 씨 덕분에 애가 밤새 기침을 안 했소!"

배급대에 모여 있던 주민들과 스캐빈저들이 거칠게 반발했다. 식량과 온기를 체감한 사람들의 눈빛은 차가웠다.

대섭은 살기 어린 시선들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좋아…… 운영 회의에서 정식으로 문제 삼을 테니 그리 알아!"

대섭은 관리반을 데리고 황급히 꽁무니를 뺐다. 공터의 소란이 잦아들자 민혁은 태우와 소희에게 눈짓을 건넸다. 소희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비실 문이 닫히자마자 소희가 낡은 모니터를 켰다.

"윤대섭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쉘터 외곽 구시대 유선 감시망의 배선도가 떠 있었다. 남쪽 진입로를 따라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남쪽 고가도로 방면 4번 접지선이 끊겼어요. 십 분 전에는 배기탑 지지대 근처 진동 감지 센서에 규칙적인 충격음이 세 번 찍혔고요."

태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선인가? 피복이 삭았을 수도 있지 않나?"

"피복 문제라면 저항값이 서서히 떨어져야 해요. 이건 신호가 0.1초 만에 끊겼어요. 누군가 절단기로 고의로 자른 거예요."

소희가 열화상 외부 카메라 영상을 띄웠다. 노이즈 낀 화면이었지만 쉘터 남쪽 환기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선명했다.

민혁의 뇌리에 서늘한 경고등이 켜졌다.

"연기 때문입니다."

"연기?"

"난방용 정제 연료는 맑은 수증기와 함께 특유의 정제유 냄새를 풍깁니다. 주변 폐허의 쓰레기 타는 냄새와는 달라요. 붉은 안개가 짙은 송도 남부에서 하얀 증기와 기름 냄새는 사방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알아챌 수 있는 신호탄입니다."

태우가 턱을 쓸어내렸다.

"굶주린 하이에나 놈들에게 잔칫상 차렸다고 광고한 셈이로군."

"변종 마물은 전선을 자르지 않습니다. 도구를 쓸 줄 아는 인간들이에요."

민혁은 배낭에서 광학 관측경을 꺼내 들었다.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놈들이 정찰조인지 아니면 본대인지."

"내가 동행하마. 기석이에게는 출입문 폐쇄를 지시해 두겠다."

태우가 소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놓았다. 서늘한 금속음이 정비실을 울렸다.


두 사람은 버려진 우수 배수관을 통해 외곽으로 기어 나왔다.

밖으로 나서자 축축하고 비린 붉은 독 안개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질퍽한 흙탕물 위에 굵은 오프로드 타이어 자국과 쇠징이 박힌 전투화 발자국 세 쌍이 선명했다.

"차량을 끌고 왔어. 모래톱 쪽에 세워 두고 걸어서 접근한 거다."

태우가 낮게 속삭였다.

두 사람은 무너진 고가도로 상판 잔해 뒤로 숨었다. 콘크리트 틈새로 민혁이 광학 관측경을 들이댔다. 렌즈를 당기자 붉은 안개 너머의 형체가 뚜렷해졌다.

150미터 전방 주유소 캐노피 아래에 철망을 덧댄 개조 버기카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 가죽 조끼와 방탄 헬멧을 쓴 사내 셋이 웅크리고 있었다.

등판에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표식이 선명했다.

피를 흘리는 두 개의 날카로운 짐승 송곳니.

"……붉은 송곳니."

태우의 입술 사이로 살기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남부 공업단지 폐허를 거점으로 삼는 약탈자들이다. 다른 캠프를 습격해 사람을 죽이고 식량을 털어가는 놈들이지."

민혁은 관측경의 초점을 조절했다. 덩치 큰 사내가 쌍안경으로 새벽 안식처의 배기탑을 보며 낄낄거렸다. 바람을 타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 저 뽀얀 연기 말이야. 진짜배기 정제 기름 냄새라고."

"새벽 안식처 쥐새끼들, 다 굶어 죽는 줄 알았더니 어디서 알짜를 숨겨 둔 거야?"

"보일러를 빵빵하게 때고 있어. 식량이랑 기름이 넘쳐난다는 소리지. 두목님한테 알리면 당장 트럭 몰고 쳐들어오겠는데?"

다른 사내 하나가 볼트 커터를 쥐고 철조망 쪽으로 발을 디뎠다.

"외곽 좌표부터 따자. 철망 두어 군데 끊어 두면 밤에 본대가 들이닥칠 때 십 분도 안 걸려."

놈들이 본격적인 침공로를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며칠 안에 수십 명의 무장 약탈대가 몰려올 터였다.

"태우 아저씨, 놈들을 여기서 쫓아내야 합니다. 좌표를 온전히 들고 가면 쉘터 문이 부서집니다."

"동감이다. 하지만 셋 다 무장했어. 총성에 변종 마물들이 몰려올 수 있다."

"제가 선제 타격을 하겠습니다. 아저씨는 도주로를 끊어 주세요."

민혁은 배낭에서 투척용 세라믹 단검을 꺼내 쥐었다. 다른 손에는 고전압 테이저 발사기를 들었다.

민혁은 폐허 더미를 타고 소리 없이 전진했다. 스캐빈저의 몸놀림은 자갈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가오던 사내와의 거리가 20미터 안쪽으로 좁혀졌다.

팟!

민혁의 손목이 꺾이며 날아간 세라믹 단검이 사내의 허벅지에 박혔다.

"크아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기습이다!"

버기카 쪽의 두 놈이 총을 들어 올리는 순간 민혁의 테이저 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치지지직!

가슴팍에 꽂힌 캡슐에서 수만 볼트의 전류가 터져 나왔다. 사내는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꼬꾸라졌다.

타앙! 타당!

이어 태우의 소총이 불을 뿜으며 덩치의 발밑 아스팔트와 버기카 유리를 깨부쉈다.

"더 움직이면 다음 탄은 네놈 미간이다!"

태우의 고함이 폐허에 울렸다. 부상당한 동료들을 본 덩치는 사색이 되었다.

"이, 개새끼들이……!"

덩치는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버기카 뒷좌석에 처박고 시동을 걸었다.

쿠르릉! 콰아앙!

굉음과 함께 버기카가 붉은 흙먼지를 뿜었다. 놈은 기절한 다른 동료 하나를 버려둔 채 안개 속으로 도망쳤다.


차량이 사라진 뒤 두 사람은 현장으로 다가갔다.

바닥에는 기절한 정찰대원 하나와 그가 떨어뜨린 가죽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민혁이 가방을 주워 올렸다. 가방 안에는 쉘터 환기탑과 출입구가 스케치된 양철 판과 수첩이 들어 있었다. 수첩 첫 장에는 송곳니 문양과 좌표가 적혀 있었다.

‘송도 남부 폐물류창고 4호 거점. 본대 대기.’

태우가 약탈자를 결박하며 차갑게 씹어뱉었다.

"붉은 송곳니의 전초 기지 좌표군. 살아 도망친 놈이 보고하면 두목인 ‘강철 턱’이 본대를 끌고 올 거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길어야 이틀, 빠르면 내일 밤이다. 최소 스무 명 이상의 무장 인원이 올 거다."

태우의 안색이 어두웠다.

"우리 방위대 전력으로는 정면 화력전이 버거워. 쉘터 외곽은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연막을 치고 들어오면 어디가 뚫릴지 몰라."

민혁은 손에 쥔 관측경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구리선 센서와 사람의 눈에만 의존하는 경계로는 기습을 막을 수 없었다. 적이 어디서 오는지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눈이 절실했다.

"사각지대를 없애면 됩니다."

"뭐라고?"

태우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민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밤에도 안개를 꿰뚫어 보는 열화상 감지기와 무선 카메라를 쉘터 외곽 전역에 깔 겁니다. 개미 한 마리라도 철망에 닿는 순간 정비실 모니터에 뜨도록요."

"그런 첨단 감시장비를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방법이 있습니다."

민혁의 가슴 안쪽에서 서늘한 결의가 차올랐다.

현대 서울에는 초고화질 무선 보안 카메라와 적외선 센서가 넘쳐났다. 돈만 지불하면 당일 배송으로 창고에 쌓을 수 있었다.

약탈자 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 폐허의 벙커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개조해야 했다.

"서둘러 복귀하죠. 방어선을 짤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민혁이 포로를 들쳐 메며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독 안개 너머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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