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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5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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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출처 없는 회로

게이트가 닫히자 붉은 비상등 아래로 네 개의 상자가 남았다.

민혁은 다용도실에서 가져온 상자 끈을 풀고 정비실 바닥에 무게를 나눠 내려놓았다. 포자 냄새가 밴 공기 사이로 새 플라스틱과 금속 냄새가 퍼졌다.

"부품부터 봐 주세요. 나머지는 태우 아저씨가 확인하시고요."

한소희가 대답 대신 첫 번째 상자의 테이프를 칼끝으로 갈랐다. 완충재를 걷어 내자 은빛 저항선과 작은 다이오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희의 손이 멈췄다.

"이 규격을 어디서 구했어요?"

"쓸 수 있는 경로를 찾았습니다. 출처는 묻지 말아 주세요."

"출처가 아니라 규격이 궁금한 거예요. 이건 지금 쉘터에서 구할 수 없는 부품이에요. 멸망 전에도 재고를 찾아야 했을 물건이라고요."

소희의 눈빛이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코어 공명 회로를 직접 깎지 않아도 돼요. 안정화 변환기의 1차 단계는 만들 수 있어요."

박태우가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정수 필터와 소독제 그리고 배터리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세 번째 상자에는 전술식량과 즉석밥이 있었고 마지막 상자에는 보온포와 난방용 연료 캔이 고정돼 있었다.

"총 몇 킬로그램이냐?"

"합쳐서 마흔한 점 육입니다."

민혁이 답하자 태우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걸 전부 등에 지고 온 거냐?"

"운반 장비를 나눴습니다. 공동 배급에 쓸 물자는 이쪽으로 빼 두죠."

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량 상자에 손을 댔다.

그때 정비실 문 밖에서 장화 소리가 멈췄다.

"또 뭘 숨기고 있나 했더니 이번에는 상자가 많군."

윤대섭이 장재복과 관리반 대원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의 시선은 식량보다 소희 앞에 놓인 은빛 부품에 먼저 꽂혔다.

"원정에서 돌아온 뒤 정식 반입 기록은 없었지. 어디서 난 물자냐?"

"쉘터가 쓸 물자입니다. 필요한 수량과 배급 내역은 적겠습니다."

"출처는?"

"비공개 거래입니다."

민혁이 대답하자 대섭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여기가 네 개인 창고인 줄 아나? 총칙 제4조에 따르면 외부에서 들어온 동력원과 군용 물자는 배급 위원회가 먼저 봉인한다."

"이건 동력원이 아닙니다."

소희가 부품 상자를 몸으로 가렸다.

"잘못 건드리면 정비실 전력망이 먼저 나가요. 책임질 수 있으면 가져가세요."

"공동 물자는 제가 직접 배급소에 넘기겠습니다. 연구 부품은 소희 씨가 관리합니다."

"내일 운영 회의에서 보자고."

대섭 일행이 나간 뒤 소희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저 인간은 부품보다 당신의 출처를 더 궁금해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시험하죠."

소희는 연구 일지를 작업대 위에 눌러 놓았다.


소희는 정밀 저항선을 세 갈래로 나누고 고주파 다이오드를 작은 기판에 붙였다. 민혁은 그녀가 지시한 대로 낡은 변환기의 차단기와 수동 접지선을 확인했다.

"코어를 발전기에 바로 연결하지 마세요. 이 회로는 전류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공명 폭을 낮추는 완충 단계예요."

"수치가 오르면 제가 차단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말할 때만 내리세요. 급하게 끊으면 내부 공명이 역류할 수 있어요."

소희가 코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푸른 결정이 낮게 떨리며 정비실 천장의 낡은 전등을 흔들었다.

기판 끝의 접점을 코어 받침대에 연결하자 측정기가 켜졌다.

[공명 주파수 측정 시작]

처음에는 숫자가 느리게 올라갔다. 연구 일지에 적힌 기준값 근처에서 멈추는 듯했다.

소희가 다이얼을 돌린 순간 수치가 튀었다.

삐이익!

정비실의 전등이 꺼졌다 켜졌다. 보일러실 쪽에서 굵은 배관이 울렸다. 코어의 푸른빛이 한순간 보랏빛으로 변했다.

"차단하지 마요!"

소희가 기판 위 연결선을 눌렀다.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민혁은 차단기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한소희 씨."

"아직 버틸 수 있어요. 기준값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요."

하지만 숫자는 다시 급등했다. 정비실 바닥 아래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겹쳐졌다. 코어가 쉘터 전체의 전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민혁은 수동 접지선을 뽑아 낡은 금속 배관에 걸었다.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배관은 보일러 라인과 연결돼 있어요!"

"전력망을 끊으면 역류한다고 했죠. 이쪽으로 빠지는 게 낫습니다."

민혁은 한 손으로 접지선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계기판을 확인했다. 보랏빛이 서서히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소희는 즉시 다이오드 옆 조절 나사를 반 바퀴 돌렸다.

공명이 낮아졌다. 울리던 배관도 조용해졌다.

[방출 연속성 61.4%]
[외부 전력망 간섭 감소]

소희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1차 안정화는 됐어요."

"완성입니까?"

"전혀요. 코어가 폭주하지 않게 붙잡은 것뿐이에요. 출력을 쓰려면 공명 주파수를 일정하게 바꾸는 변환 단계가 더 필요해요."

그녀는 연구 일지의 문장을 바라봤다.

‘코어를 전력원으로만 취급하면 안 된다.’

"이 경고가 왜 있었는지 알겠어요. 군사용 전환을 시도한 사람들은 코어를 배터리처럼 연결했을 거예요. 그럼 전력망이 아니라 주변 조직부터 망가졌겠죠."

민혁은 푸른 결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은 코어를 발전실에 연결했다면 사람들의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다음 시험부터는 정비실 전력망과 완전히 분리합니다."

"그럴 공간이 없어요."

"그러면 공간부터 만듭니다."

소희가 그를 보았다. 피곤한 얼굴에 짧은 미소가 떠올랐다.

"부품 출처는 계속 묻지 않을게요. 대신 다음에는 규격표도 같이 가져와요."

"가능한 만큼 준비하겠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태우가 정비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배급 장부가 들려 있었다.

"대섭이 운영 회의를 내일 아침으로 당겼다. 방금 소리를 들었으니 네가 가져온 상자를 전부 확인하겠다고 하더군."

"공동 물자는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코어와 회로는 안 됩니다."

"그놈은 총칙을 들이밀 거야."

"저도 규칙을 지키겠습니다. 다만 위험도를 모르는 사람이 안정기를 가져가면 규칙이 사람을 죽입니다."

민혁은 정수 필터와 소독제 수량을 장부에 적고 전술식량 절반은 공동 배급으로 표시했다. 보온포는 야간 순찰대와 환자용으로 분류했다.

"연료 캔은 발전실에 넘깁니다. 난방기 하나가 멈추면 부품보다 사람이 먼저 쓰러집니다."

태우가 장부를 내려다봤다.

"네 몫을 챙기지 않고도 이렇게까지 내놓을 생각이냐?"

"제가 쓸 물건은 따로 있습니다."

소희가 기판을 들어 올렸다.

"이 회로가 완성되면 전력과 정화 설비를 같이 살릴 수 있어요. 그러려면 코어는 제 관리 아래 있어야 합니다."

태우는 침묵하다가 장부 마지막 줄에 서명했다.

"방위대는 탐색대의 판단을 지지한다. 대섭이 봉인을 시도하면 내가 막겠다."

문밖에서 누군가 발을 멈췄다. 대섭이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환한 뒤 두 시간 동안 개인 격실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정비실에는 새 상자가 네 개나 들어왔고요."

장재복의 목소리가 낮게 새어 들어왔다.

"경로를 확인해."

대섭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태우의 표정이 굳었다.

"저놈들이 네 시간을 재고 있다."

민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게이트가 다시 열릴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다음부터는 시간을 더 흐리겠습니다."

그는 쉘터에 남길 물자와 숨길 부품을 다시 분리했다. 비밀이 하나 늘어난 만큼 지켜야 할 사람도 늘어났다.


열두 시간이 지나자 청동 문고리가 새벽 안식처의 어둠 속에 떠올랐다.

민혁은 코어를 건드리지 않고 빈 가방만 들었다. 소희의 회로는 정비실 잠금함 안에 남겼고 물자 장부에는 필요한 수량을 전부 적어 두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섬유유연제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새 오피스텔의 다용도실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 이진우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오늘은 우진 무역으로 오지 마십시오. 지하 주차장 아래 회의실을 잡았습니다. 숫자 7을 보낸 뒤 들어오세요.]

민혁은 메시지를 지우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택시를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지하 통로를 걸었다. 회의실 앞에서 숫자 7을 보내자 이진우가 직접 문을 열었다.

"새 거점 주소는 여기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상황이 예상보다 빨라졌습니다."

진우는 얇은 서류철을 탁자 위에 펼쳤다. 첫 장에는 코어 분석표가 있었고 다음 장에는 구매 요청서가 붙어 있었다.

"지난번 코어를 가져간 연구 라인이 추가 샘플을 요구했습니다. 단순히 성능을 확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공급자와 산지 그리고 한 번에 확보할 수 있는 물량을 묻고 있어요."

"그쪽이 어디인지 확인했습니까?"

"제가 아는 선에서 떠봤습니다. 외부 연구실에 자금을 대는 태성에너지 계열의 비공개 라인이란 정황이 있습니다. 공식 연구소 이름은 쓰지 않고 구매 담당도 중간 업체만 상대하더군요."

진우는 서류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공급자 직접 접촉 및 원산지 검증 요청.’

"이 문구를 넣은 사람이 있습니다. 거래처가 샘플을 다시 사려는 게 아니라 물건이 나오는 문을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민혁은 서류를 접어 진우 쪽으로 밀었다.

"두 번째 샘플은 넘기지 마십시오."

"이미 첫 거래가 끝났습니다. 갑자기 끊으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지 말고 늦추세요. 분석 장비 문제라고 하고 구매량을 줄이십시오. 공급처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하고요."

진우가 안경을 고쳐 썼다.

"강 대표님은 이 물건이 어디서 나온 건지 정말 말하지 않으실 겁니까?"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말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앞으로는 보관 장소를 나누고 거래 기록도 따로 관리하십시오. 제 이름으로 새 계좌를 만들지 말고 연락망을 바꾸세요."

"숫자 7은 유지합니까?"

"이번 한 번만 유지합니다. 다음에는 제가 먼저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진우는 작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일회용 단말기입니다. 전원을 켜 둔 시간도 짧게 하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가 서류철 안쪽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두운 주차장 입구에서 찍힌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는 정전기 방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오늘 아침 제 사무실 주변에서 이 사람이 두 번 확인됐습니다. 연구 라인의 사람인지 사설 탐정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민혁은 사진을 뒤집어 놓았다.

"확정할 때까지 적으로 취급합니다."

회의실 밖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진우가 불을 끄고 출입 모니터를 확인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민혁은 사진 속 장갑을 떠올렸다. 마포의 감시자는 코어가 단순한 광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단말기의 전원을 끄고 외투 안쪽에 넣었다. 더 많은 돈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새 오피스텔로 돌아온 민혁은 다용도실 선반의 빈칸을 확인했다. 다음 게이트가 열리면 다시 붉은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물자를 들고 가기 전에 쉘터 외곽부터 살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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