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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4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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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안전한 문

민혁은 부동산 앱에 떠 있는 매물 목록을 세 번이나 내려 보았다.

보증금과 월세만 따지면 선택지는 많았다. 하지만 차원 이동 거점으로 쓸 집은 달랐다. 창이 크면 밖에서 내부가 보였고 저층이면 접근이 쉬웠다. 보조실이 없으면 마력 코어를 숨길 곳이 없었다. 지하 주차장과 비상계단이 연결되지 않은 건물은 귀환 직후 누군가 마주칠 위험이 컸다.

그는 화면에 조건을 적었다.

‘중층. 이중 출입. 지하 주차장. 관리실 상주. 창고로 쓸 수 있는 보조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이진우에게서 온 암호 메시지였다.

[직접 알아본 매물은 기록이 남습니다. 소개한 중개인에게 연락하십시오. 계약 장소는 건물과 분리합니다.]

민혁은 메시지를 지운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마포역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공유 오피스 라운지였다. 유리벽 너머로 사람들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출입문에는 방문객용 카드 리더기가 달려 있었다.

검은 세단 한 대가 맞은편 도로에 서 있었다.

민혁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가 창가 자리를 잡는 대신 건물 뒤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상가를 가로질러 다른 출구로 나온 뒤 버스를 갈아탔다. 세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시선이 가장 오래 남는 법이었다.

중개인은 라운지 안쪽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대 초반의 여자는 민혁의 신분증과 계좌 잔액 증명서를 번갈아 살폈다.

"법인 명의는 아니시고 개인 계약이시네요. 보증금은 바로 입금 가능하십니까?"

"가능합니다. 대신 건물 이름과 호수는 외부에 공유하지 않는 조건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런 조건은 임대인에게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이 건물은 입주민 외에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습니다. 지하 주차장도 차량 번호가 등록돼야 하고요."

중개인은 태블릿 화면에 매물 정보를 띄웠다. 마포 안쪽의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열여덟 층짜리 건물의 열한 층. 엘리베이터 홀 앞에 카드 리더기가 있고 현관문은 번호와 등록 키를 함께 요구했다. 같은 층 끝에는 창이 작은 다용도실이 딸려 있었다.

"다용도실은 전용 면적에 포함되지만 환기창이 작아서 창고로 많이 씁니다. 이전 세입자는 촬영 장비를 보관했어요."

민혁은 화면의 평면도를 확대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 욕실이 있었고 현관에서 다용도실까지 일직선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상계단은 다용도실 뒤쪽 벽과 가까웠다.

"오늘 볼 수 있습니까?"

마지막 매물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문이 닫히며 외부의 소리가 한 겹 줄었다. 복도 끝 CCTV의 붉은 점이 천천히 회전했다. 거실 창으로는 맞은편 건물의 벽만 보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두 대였다.

민혁은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손바닥 두 개를 펼친 정도의 환기창과 콘크리트 벽이 눈에 들어왔다. 선반을 세우면 상자 서너 개는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었다.

"여기로 하겠습니다."

중개인이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곳도 아직 안 보셨는데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민혁은 빈 방 한가운데 서서 가슴 안쪽의 문고리를 느꼈다. 게이트가 열릴 때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바닥이어야 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현관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창고.

그날 저녁 계약이 끝났다. 보증금 일부와 중개 수수료를 치르고도 계좌에는 넉넉한 돈이 남았다. 민혁은 잔액을 확인하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숫자가 커질수록 그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민혁은 오피스텔에 작은 탁자부터 들였다.

생활용품점에서 산 선반과 공구함은 평범했다. 금속 선반을 다용도실 벽에 고정할 때도 관리실에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창고를 정리하는 입주민은 흔했다.

다용도실 바닥에는 고무 매트를 두 겹 깔았다. 코어 상자가 떨어져도 진동이 복도까지 전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반 안쪽에는 방수 상자와 완충재를 넣고 바깥쪽에는 세제와 휴지를 올렸다. 누군가 문을 열어 보더라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배열이었다.

현관의 번호키는 그대로 두고 보조 잠금장치만 추가했다. 민혁은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시간을 재고 비상계단으로 다용도실 뒤까지 걸리는 시간도 확인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 빠져나갈 길이 있어야 했다.

책상 위에 한소희가 적어 준 목록을 펼쳤다.

정밀 저항선. 고주파 다이오드. 절연 세라믹. 미세 납땜용 플럭스. 열에 강한 연결선.

그 아래에는 쉘터에서 필요한 물품을 적었다.

전술식량. 정수 필터. 보온포. 난방용 연료 캔. 소독제. 배터리와 건전지.

부품은 합쳐도 3킬로그램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을 책임질 물자였다. 연료 캔 하나가 4킬로그램을 넘었고 정수 필터는 포장까지 하면 생각보다 무거웠다.

민혁은 잠시 연료 캔을 빼고 전술식량을 늘렸다. 그러나 소희의 정비실 난방기가 멈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차가운 금속 위에서 손가락을 녹이던 그녀의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전부 조금씩 가져간다."

민혁은 포장 상자 네 개를 꺼냈다.


전자부품 상가는 오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민혁은 한 가게에서 모든 물건을 사지 않았다. 저항선은 첫 번째 점포에서 사고 다이오드는 두 블록 떨어진 가게에서 샀다. 판매자가 용도를 묻자 고장 난 오디오 장비를 수리한다고 답했다.

산업용 자재점에서는 절연 세라믹과 고온용 연결선을 골랐다. 직원이 더 좋은 제품을 권했지만 민혁은 중간 등급을 택했다. 최고급 제품 하나보다 규격이 맞는 제품 여러 개가 안정기 제작에는 유리하다는 소희의 설명이 기억났다.

마지막은 대형 마트였다. 민혁은 카트에 전술식량과 즉석밥을 담고 생수는 두 묶음만 골랐다. 물은 쉘터에 쌓여 있었지만 정화 장치가 멈추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정수 필터와 소독제는 식량보다 먼저 상자에 넣었다.

난방용 연료 캔을 계산대에 올리자 직원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민혁은 절차대로 구매 기록을 남겼다. 대신 여러 매장을 나눠 이용해 한 번에 이상한 양이 찍히지 않도록 했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그는 택배 상자처럼 보이는 포장 네 개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첫 번째 상자에는 소희의 부품과 공구를 넣었다. 두 번째에는 필터와 소독제 그리고 배터리를 담았다. 세 번째에는 전술식량과 즉석밥을 넣었다. 마지막 상자에는 보온포와 난방용 연료 캔을 고정했다.

저울의 숫자가 올라갔다.

[상자 1: 7.8kg]
[상자 2: 9.6kg]
[상자 3: 13.2kg]
[상자 4: 11.0kg]

총 41.6킬로그램.

게이트 한도 안이었다. 민혁은 네 상자의 모서리에 작은 흰 점을 찍었다. 아포칼립스에서 꺼내는 순서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민혁은 즉시 불을 끄고 다용도실 문을 닫았다. 문 아래로 복도의 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발소리 하나가 현관 앞에서 멈췄다.

누군가 우편함을 확인하는 듯 금속이 흔들렸다. 이어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열한 층 맞지?"

민혁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옆집 앞에서 다시 움직였지만 곧 멈췄다. 그는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현관 모니터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복도 끝 CCTV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비상계단 문을 열어 안쪽을 확인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민혁은 이진우에게 한 줄만 보냈다.

[새 거점 주변에 확인되지 않은 남자.]

답장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지난 거래 때 정한 숫자 신호가 먼저 도착했다.

[7]

일회용 연락망을 유지하고 차량이 떠날 때까지 먼저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민혁은 창가로 가지 않고 지하 주차장 화면을 확인했다. 검은 세단이 건물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차량은 번호판이 가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숨길 생각이 없는 차량은 감시가 아니라 미끼일 수도 있었다.

민혁은 연료 캔의 고정 끈을 다시 조였다. 포장을 더 나누면 무게는 같아도 손에 들기 편해졌다. 네 상자의 주소 스티커는 모두 떼어 내고 쓰레기는 다른 지역의 분리수거함에 나눠 버리기로 했다.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게이트가 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민혁은 소희의 부품 상자를 맨 위에 올렸다. 목숨을 걸고 가져온 코어를 지키는 일만큼 그것을 안정화할 회로를 건네는 일이 중요했다. 이 물자가 쉘터의 전력과 난방을 바꿀 수 있다면 41.6킬로그램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다용도실 한가운데서 청동 문고리가 떠올랐다.

금빛이 방수 상자의 모서리를 스쳤다. 민혁은 잠시 현관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 속 검은 세단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네 상자의 끈을 손목에 묶고 문고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공간이 조용히 뒤틀렸다.

게이트 너머의 붉은 비상등이 다용도실 벽을 물들였다. 민혁은 먼저 부품 상자를 끌어안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사라진 뒤 빈 오피스텔의 현관 모니터가 한 번 깜빡였다. 건물 앞의 차량은 열한 층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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