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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3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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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가치의 무게

보일러실 철문 틈새로 서늘한 쇳소리가 새어 들었다.

"원정에서 돌아왔으면 배급소 장부부터 갱신해야지. 저 상자들은 다 뭐야?"

윤대섭이었다. 기름 낀 조끼 주머니에 볼펜을 꽂은 채 턱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장재복을 비롯한 관리반 대원 둘이 완장을 찬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시선은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세 개의 금속 상자에 꽂혀 있었다.

태우가 땀에 젖은 전술 장갑을 벗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탐색대 정식 전리품이다. 규정대로 방위대 검수와 정비반 배분부터 끝내고 장부에 올린다."

"규정? 쉘터 총칙 제4조 몰라? 외부에서 들여온 고가치 동력원과 군용 물자는 전량 배급 위원회가 먼저 봉인하고 보관하게 되어 있어. 기석이 녀석 다리까지 분질러 먹고 주워온 게 뭔지 확인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대섭이 손을 뻗어 상자 손잡이를 쥐려 했다.

탁.

태우의 굵은 손가락이 대섭의 손목을 낚아챘다. 뼈마디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보일러실 벽을 울렸다.

"손 치워라. 바이오 연구소 B2 구역까지 들어가서 목숨 걸고 건져온 물건이다. 셔터 안쪽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장부나 끄적이던 놈들이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이거 안 놔? 박 대장! 완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알 텐데!"

대섭이 비명을 참으며 얼굴을 붉혔다.

작업대 한쪽에서 붕대를 정리하던 한소희가 스패너를 바닥에 쾅 내려놓았다.

"시끄러워요. 기석 삼촌 상처 봉합 방금 끝났거든? 그리고 저거 안정화 안 된 고농축 마력 코어예요. 차폐 완충재 함부로 건드렸다간 보일러실 전체 배관이 과전압으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책임질 수 있어요?"

소희의 으름장에 대섭의 부하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대섭 역시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헛기침을 삼켰다.

"흥, 어디 두고 보자고. 내일 아침 운영 회의에서 정식으로 문제 삼을 테니까."

대섭 일행이 휑하니 보일러실을 빠져나가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우가 한숨을 내쉬며 세 개의 상자를 바라봤다.

"대섭이 놈이 눈독을 들였으니 오래 숨기긴 힘들다. 민혁이 네 생각은 어때?"

민혁은 작업대 옆에 걸터앉아 차분하게 상자들을 정리했다.

"하나는 쉘터 비상 발전실에 비축해 두시죠. 정화 라인 모터가 멈출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소희 씨 정비실로 넘겨서 안정화 변환기를 설계하는 테스트용으로 쓰고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제 몫으로 챙기겠습니다."

태우가 민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누가 뭐래도 B2 보관함을 열고 퇴로를 뚫은 건 너다. 이의 없다. 나머지 둘은 내가 방위대 무기고와 정비소에 철저히 봉인해 두마."

소희는 방수 주머니에 든 연구 일지를 가슴에 품으며 민혁을 올려다보았다.

"이 일지에 적힌 공명 주파수 회로를 분석하면 소형 안정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러려면 정밀 저항선이랑 고주파 다이오드가 필요한데…… 여기선 구할 수가 없어."

"부품 목록 적어 두세요. 제가 어떻게든 구해 올 테니까요."

민혁은 코어 상자 하나를 배낭 안쪽에 단단히 결속했다.


개인 격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탐색을 마치고 쉘터에 복귀해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덧 12시간의 쿨타임이 다 채워져 가고 있었다.

스윽.

가슴팍 안쪽에서 묵직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청동 문고리가 붉은빛을 털어내고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차원 이동 게이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적재 한도: 50.0kg / 현재 소지 중량: 8.4kg]

민혁은 배낭끈을 고쳐 매고 심호흡을 했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공간이 비틀리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스르륵.

발끝에 닿는 감촉이 달라졌다. 퀴퀴한 곰팡이와 붉은 포자 가루 냄새 대신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과 마른 벽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창문 틈새로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강변북로의 규칙적인 차량 소음. 평화롭기 그지없는 현대 서울 마포구의 옥탑방 원룸이었다.

"하아……."

민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감이 일순간에 녹아내렸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스포어 울프의 이빨과 대섭의 날 선 시선이 얽혀 있던 지옥이었지만 이곳은 따뜻한 온수가 콸콸 쏟아지는 서울이었다.

민혁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잿빛 먼지와 땀을 씻어내고 깨끗한 면바지와 검은색 후드 집업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선 그의 눈빛은 아포칼립스의 사선을 넘나들며 한층 더 날카롭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침대 밑에서 두툼한 여행용 스포츠 더플백을 꺼냈다. 금속 상자에 완충재를 꼼꼼히 덧대어 가방 깊숙이 넣고 지퍼를 채웠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운동 장비 가방처럼 보였다.

지난번 이진우의 감정소 주변을 맴돌던 검은 세단이 뇌리를 스쳤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민혁은 곧장 마포역 쪽으로 가지 않았다. 반대편 골목으로 돌아가 마을버스를 탄 뒤 환승역 상가 건물을 통과했다. 상가 통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뒤편을 면밀히 관찰하며 꼬리를 밟히지 않았음을 확신한 뒤에야 이진우의 희귀 광물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안쪽 붉은 벽돌 건물 2층. '우진 무역'이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철문 앞에 섰다.

민혁이 도어폰 버튼을 세 번 짧게 눌렀다.

치직거리는 잡음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십니까?"

"강민혁입니다."

철컥하는 전자음과 함께 무거운 방음문이 열렸다.

사무실 안쪽은 지난번보다 훨씬 삼엄해져 있었다. 벽면에는 사설 보안업체의 경보 시스템이 새로 증설되어 있었고 블라인드는 틈 하나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반무테안경을 고쳐 쓴 이진우가 문을 닫고 빗장을 걸며 민혁을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강 대표님. 지난번 주신 샘플 때문에 제가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습니다."

"상황이 좀 복잡해 보여서 골목을 한참 돌다 들어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최근 마포 일대에 출처 불명의 사설 탐정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대형 에너지사나 제약 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아요."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쪽 감정실로 민혁을 안내했다.

차폐 시설이 갖춰진 감정실 중앙에는 고정밀 질량 분석기와 분광 계측기 그리고 두꺼운 강화유리 실험대가 놓여 있었다.

"지난번 가져오신 마정석 파편 말입니다. 연구소 지인에게 성분 분석을 의뢰했더니 방사능이나 유해 전자기파는 전혀 없는데 내부 에너지 밀도가 기존 리튬 배터리의 40배가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그걸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민혁은 대답 대신 더플백의 지퍼를 열었다.

묵직한 금속 상자가 테이블 위에 쿵 소리를 내며 얹혔다.

"출처를 묻지 않는 게 우리 거래의 기본 규칙이었을 텐데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결례를 범했군요."

진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상자를 응시했다.

민혁이 상자의 4중 걸쇠를 하나씩 풀었다. 뚜껑이 열리자 짙은 감청색 완충재 사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웅-

작은 공간에 파란빛이 번지며 미세한 진동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두운 감정실 안이 순식간에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이…… 이건……."

진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경 너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난번 파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순도입니다. 완벽한 결정 구조를 지닌 마력 코어 원형이에요."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정전기 방지 장갑을 착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측용 센서 케이블을 코어 주변에 거치했다.

디지털 측정 패널의 수치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삐비비빅!

상온 초전도 특성을 나타내는 저항값 0.00Ω.
방출 에너지 연속성 99.8%.
외부 방사선 수치: 자연 배경 준위(정상).

"말도 안 돼…… 상온에서 저항이 완전히 0에 수렴하고 있어. 게다가 이 에너지 방출 패턴은…… 대체 물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자연계 상위 에너지체야."

진우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열화상 카메라로 코어를 비췄다. 주변 온도는 정확히 21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막대한 에너지를 내뿜으면서도 열 손실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강 대표님…… 이게 뭔지 알고 가져오신 겁니까? 이건 단순한 희귀 광물이 아닙니다. 현재 인류 과학계가 수십 년 동안 매달려온 완벽한 상온 초전도체이자 무한 동력원에 가까운 결정체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져온 겁니다."

민혁은 담담하게 팔짱을 꼈다.

진우는 계산기 앞에 앉아 숫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떨려 몇 번이나 숫자를 지우고 다시 쳤다.

"이걸 공식 학회나 공개 시장에 내놓으면 수백억, 아니 수천억의 가치가 매겨질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우리 둘 다 국가 정보기관이나 거대 다국적 기업의 표적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죠."

"저도 요란한 건 사양입니다. 당장 안전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선을 원합니다."

진우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한참 동안 계산기를 응시하던 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비공개 VIP 연구 라인이 있습니다. 차세대 에너지 셀을 비밀리에 개발 중인 국내 굴지 대기업의 사설 랩입니다. 그쪽에 프로토타입 연구용 샘플로 넘기면 즉시 깨끗한 자금으로 정산받을 수 있습니다."

"금액은요?"

"초도 물량 감정 및 독점 매입 대금으로 즉시 5천만 원을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5천만 원.

송도 쉘터에서 썩은 빵 한 조각을 위해 진흙탕을 구르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득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진우가 민혁의 눈치를 살피며 다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이 코어의 잠재 가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세무 조사나 금융 추적을 완벽히 피한 합법적 비자금 계좌에서 즉시 지급할 수 있는 상한선입니다. 이후 이 샘플로 실증 연구가 성공하면 발생하는 기술 로열티의 일부도 제 몫에서 떼어 드리겠습니다."

민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신중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 조건으로 하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강 대표님!"

진우는 지체 없이 노트북을 열고 공인인증서를 연결했다. 몇 번의 키보드 두드림 끝에 민혁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신한은행 110--*]
[타행입금 50,000,000원 (입금자: (주)우진무역)]
[잔액 50,240,000원]

통장에 선명하게 찍힌 숫자 50,000,000.

민혁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차올랐다. 아포칼립스 폐허에서 목숨을 걸고 가져온 푸른 심장이 현대 서울에서 거대한 현실적 힘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진우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특수 보관 금고에 넣으며 물었다.

"혹시…… 앞으로도 이런 물건을 더 구할 수 있습니까?"

민혁은 외투를 걸치며 담담하게 답했다.

"파트너십의 조건은 신용과 보안입니다. 이진우 대표님이 선을 지키는 한 다음 물건도 이곳으로 올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대 비밀은 보장합니다."

진우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문앞까지 민혁을 배웅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맑은 저녁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민혁은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5천만 원의 잔고가 선명했다.

이제 좁고 낡은 옥탑방 원룸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언제 외부의 시선이 닿을지 모르는 불안한 거처 대신 엘리베이터와 지하 주차장 그리고 철저한 사설 보안이 갖춰진 마포의 고급 오피스텔을 전용 차원 이동 기지로 마련해야 했다.

또한 소희가 요구했던 정밀 전자 부품과 정화기 변환 자재 그리고 쉘터 사람들을 위한 든든한 보급품도 대량으로 사들여야 했다.

'돈이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군.'

민혁은 스마트폰의 부동산 중개 앱을 켜며 활기찬 서울의 퇴근길 인파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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