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가족 상담실의 빈 의자

1화: 비워 둔 의자 하나
상담실에는 늘 의자가 하나 비어 있었다.
임나래는 그 의자를 벽에 붙여 놓았는데도, 다음 주가 되면 누군가 다시 문 쪽으로 돌려 놓곤 했다. 오늘 아침에는 의자 위에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글씨는 검은 펜으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지만, 작성자 이름은 없었다.
나래는 종이를 손대지 않고 상담실 문을 닫았다. 피해자 지원센터의 절차상 익명 메모는 상담기록과 분리해 보관해야 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봉투에 넣은 뒤, 발견 시각과 위치만 적었다. 누구의 글씨인지 추측하지 않았다.
“또 왔어요?” 법률지원 담당 박진호가 물었다.
“네. 지난주에도 같은 자리에 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메모가 있었나요?”
“아니요. 의자만요.”
진호는 경찰에 알려야 하는지 물었다. 나래는 아직 위협이나 구체적 사건을 나타내는 내용이 없다고 답했다. 메모를 근거로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내담자 정보를 열람하면 안 됐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담실에 남은 종이니까, 누군가가 우리 도움을 요청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라고 말했다.
그날 오전 첫 상담은 윤미숙이었다. 그녀는 20년 전 살해된 동생의 유족으로, 매주 목요일 같은 시간에 센터를 찾아왔다. 상담을 시작하기 전 미숙은 빈 의자를 문 쪽으로 돌렸다. 나래는 그 동작을 막지 않았다.
“이번 주에도 그 자리가 비어 있네요.” 미숙이 말했다.
“그 의자에 누가 앉기를 기다리세요?”
“그런 건 아니에요. 문이 잘 보이면, 누가 와도 덜 놀라요.”
미숙은 그날 동생의 기일을 앞두고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밤마다 사건 당시 경찰 조사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고, 다음 날이면 자신이 기억한 문장을 의심했다. “동생은 마지막에 ‘그 사람 아니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기사에는 ‘그 사람을 알아봤다’고 나왔죠.”
나래는 기록을 열지 않았다. 미숙이 지금 원하는 건 사건 내용 확인이 아니라, 기억이 흔들릴 때 버틸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그녀는 잠을 못 잔 날의 몸 상태와 상담 뒤 연락할 사람을 함께 정리했다. 미숙은 언니에게 전화하겠다고 했다.
“상담 기록을 경찰에게 넘기라는 연락이 올까 봐 무서워요.”
“현재 상담기록은 동의 없이 제공하지 않습니다. 법적 요청이나 긴급한 안전 문제가 있으면 예외와 절차를 설명드릴게요.”
“그럼 내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도 밖에 알려지지 않나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 한 다른 내담자나 가족에게 알리지 않겠습니다.”
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이 끝날 때 그녀는 빈 의자를 창 쪽으로 조금 밀었다. 나래는 그 행동을 기록하지 않았다. 의자를 어디에 둘지는 미숙이 선택하는 일이었다.
점심 무렵, 나래는 상담실 바닥에 작은 쪽지 하나가 더 놓인 것을 발견했다. ‘기억은 다르지만 질문은 같습니다.’ 이번에도 이름은 없었다. 글씨는 첫 메모와 달랐다. 그녀는 같은 봉투에 넣지 않고 별도 봉투로 보관했다. 두 글씨가 같은 사람이 썼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 서은별이 처음 센터에 왔다. 스물네 살의 은별은 7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언니의 동생이었다. 그녀는 상담 신청서에 ‘사건과 관계된 질문을 하고 싶다’고 적었다. 나래는 상담과 수사 자문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은별은 경찰에게 여러 번 같은 말을 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질문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다.
“언니가 사고 당일 전화로 ‘그 사람은 아니야’라고 말했어요. 경찰은 그 말을 운전자를 못 봤다는 뜻으로 정리했어요. 저는 그게 다른 사람을 가리킨 것 같아요.”
나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지 않았다. 은별에게 상담기록과 외부 전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지금 대화에서 남겨도 되는 내용을 물었다. 은별은 상담기록에는 자신의 불안과 잠 문제만 적고, 사건 발언은 기록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래는 그 경계를 지켰다.
“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같이 추측해도 될까요?” 은별이 물었다.
“제가 수사관처럼 질문을 맞혀 드리진 않을게요. 다만 그 말을 떠올릴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 함께 살펴볼 수 있어요.”
“답을 찾으면 덜 괴로울 줄 알았어요.”
“답이 바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질문을 가지고 돌아가도 괜찮아요.”
은별은 한동안 빈 의자를 바라봤다. “저 자리에 언니가 앉아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언니한테 계속 말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상담실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복도에서는 진호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고, 다른 상담 예약이 시작되려 했다. 은별은 문이 열린 걸 확인한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상담 끝에 그녀는 연락 가능한 친구의 이름을 적었다.
상담이 끝난 뒤 진호가 나래에게 물었다. “그 문장은 경찰에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 사건의 유족에게 같은 표현이 나왔잖아요.”
“상담에서 들은 말은 각 내담자의 동의 없이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일부러 메모를 남기고 있어요.”
“익명 메모는 별도 관리하고, 내용에 위험이 있으면 절차에 따라 검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상담 발언을 수사에 쓰지는 않겠습니다.”
진호는 조급해 보였다. 그는 오래된 사건에서 잘못된 진술로 무고한 사람이 구속된 사례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진실이 묻히는 걸 막고 싶어 했다. 나래는 그의 우려를 이해했지만, 상담을 수사 도구로 만들면 내담자들이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래는 메모 두 장의 작성 시각과 발견 위치를 별도 파일에 기록했다. 상담내용은 포함하지 않았다. 첫 메모는 상담실 문 쪽 의자 위, 두 번째는 복도 바닥. 누군가 센터 내부 출입이 가능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방문자 명부에는 목요일마다 같은 시간에 세 사람이 왔지만, 그들의 상담 주제는 알 수 없었다.
진호는 퇴근 전 나래의 방에 다시 왔다. “내가 아는 유족 한 분이 예전 사건 기록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해요. 이 메모가 그 사람한테서 나온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래는 바로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분에게 메모를 보여 주면 본인이 쓴 적이 있는지 답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상담 내용과 연결될 수 있어요. 먼저 메모가 누군가를 압박하거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해요.”
“그럼 작성자를 찾을 때까지 그냥 두자는 건가요?”
“작성자가 원한 게 뭔지 모른 채 이름부터 찾으면, 메모를 남긴 이유를 망가뜨릴 수 있어요.”
진호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는 사건 수사에 필요한 정보와 피해자 지원이 서로 멀어지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나래는 그에게 메모가 상담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만 공유했고, 누구의 발언도 알려 주지 않았다. 진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내가 너무 빨리 답을 찾으려 했네요”라고 했다.
그들은 별도 검토표를 만들었다. 메모의 위협성, 구체적 대상, 긴급한 안전 위험 여부만 확인하고, 작성자를 특정하기 위한 상담기록 열람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나래는 그 기준을 센터장에게 보고했다. 센터장은 접수 절차와 CCTV 확인 가능 범위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다만 복도 영상은 48시간 뒤 자동 삭제되므로, 보존 여부를 먼저 결정해야 했다.
나래는 상담실 문 앞의 복도 영상 보존을 요청했다. 특정한 내담자 얼굴을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메모가 놓인 시간대에 문이 열렸는지 확인하는 범위였다. 센터장과 진호가 함께 요청서를 서명했다. 영상은 나래 혼자 볼 수 없도록 접근 권한을 제한했다.
오후에 윤미숙이 다시 연락했다. 그녀는 상담에서 말한 동생의 마지막 문장이 불안해졌다며, 자신이 기억을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래는 기록을 다시 들춰 사실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미숙에게 기억이 흔들려도 지금 느끼는 감정은 진짜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미숙은 통화가 끝난 뒤 언니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저는 그 말을 증언으로 바꾸고 싶은 게 아니에요.” 미숙이 말했다. “동생이 진짜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서 무서운 거예요.”
“모르는 채로 있어도, 지금 느끼는 무서움을 돌볼 수 있어요.”
미숙은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끊었다. 나래는 상담기록에 수면 어려움과 연락 계획만 적었다. 사건 문장은 기록하지 않았다. 상담실 문은 닫혔지만, 빈 의자는 창가를 향한 채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음 날 출입문 잠금 상태를 점검해 달라고 시설팀에 요청했다. 그 순간 상담실 문 아래로 종이가 밀려 들어왔다. 나래는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 문밖에는 발소리가 없었다. 종이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빈 의자는 피해자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번 글씨는 첫 메모와 같았다. 나래는 봉투를 꺼내면서도 누구를 부를지 고민했다. 문밖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상담센터 방문자 명부에는 오늘 마지막 상담이 이미 종료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나래는 새 메모를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 발견 시각을 기록했다. 영상 보존 요청이 승인될 때까지 원본 봉투는 잠금 서랍에 넣었다. 문 밖의 발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나래는 출입 기록의 빈칸도 센터장에게 보고했다. 상담실을 잠그는 대신, 다음 날 문 앞에서 방문자 안내를 직접 맡기로 했다. 메모를 남긴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나래는 방문자 명부를 잠그고 센터장에게 열쇠를 넘겼다. 오늘은 혼자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