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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16화

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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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영주의 첫 번째 레시피

남부 가도는 초여름의 녹음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엘리제는 차창 밖을 보았다. 수도 황궁의 대리석 회랑은 먼 기억이었다. 눈앞에는 구릉과 맑은 수로를 낀 과수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공녀님! 물레방앗간이 보입니다!”

호위병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언덕을 넘어서자 세찬 물살을 가르는 물레방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금술 카페 라 보나였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공녀님이 돌아오셨다!”

“남부의 진짜 영주님이 오셨다!”

마차가 멈춰 서자 터져 나온 환호성이 계곡을 뒤흔들었다. 앞치마를 두른 마리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공녀님! 무사하셨군요! 황궁에서 칙령을 받아 내셨다는 소식 다 들었어요!”

“마리. 숨부터 고르세요. 가게는 별일 없었나요?”

엘리제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리의 뒤편에서 베른이 두꺼운 장부를 안고 달려왔다.

“황실 전령 매가 도착한 뒤로 남부 전역에서 귀족과 상단 마차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황실 공인 디저트 선주문서만 벌써 백 장이 넘었습니다.”

베른이 땀을 닦으며 장부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곧 낮게 가라앉았다.

“다만 며칠 전부터 외곽을 배회하는 외지인들이 목격되었습니다. 낡은 외투 안에 순백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슨 질문이죠?”

“주방에서 공명성 마력을 흘리는 어린아이가 일하고 있지 않느냐고요.”

엘리제의 붉은 눈동자에 서늘한 긴장감이 스쳤다.

원작 소설의 단두대 플래그를 부수고 돌아왔더니 또 다른 먹구름이 남부의 하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제는 곧장 라 보나 뒤편의 신설 공정실로 들어섰다.

작업대 위에는 반응관과 비커가 오차 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유리관을 닦고 있던 작은 그림자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손목에 낡은 끈을 감은 소녀 아델이었다.

“……공녀님?”

아델의 보랏빛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 돌아오셨네요. 매일 밤 걱정했어요.”

“내가 약속했잖아. 라 보나의 앞치마를 두르러 반드시 오겠다고.”

엘리제는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넸다.

“수도에서 맞춘 네 선물이야.”

상자 안에는 은빛 정밀 계량 도구와 내열 시험관, 마력 안정 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돼요?”

“그럼. 내 유일한 제자인데 이 정도는 갖춰야지. 일지도 훌륭하게 썼더구나.”

칭찬에 뺨을 붉히던 아델은 이내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베른에게 들었어.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기웃거렸다고.”

아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틀 전 저녁에 하얀 천을 두른 남자 둘이 서 있었어요. 그들이 든 도구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어요. 손목에서 마력이 솟구쳤지만 가르쳐 주신 대로 저당 마카롱을 삼키고 숨을 참았어요.”

“마력을 억누르자 물러갔니?”

“빛이 꺼지자 사라졌어요. 하지만 울타리에 자국을 남겼어요.”

엘리제는 아델과 함께 뒷마당 나무 울타리로 향했다.

울타리 한구석에 은빛으로 그을린 손바닥만 한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세 갈래로 뻗은 가시나무 덩굴 문양이었다.

엘리제는 시약병에서 산도 지시약을 꺼내 은빛 재 위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치익 소리와 함께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비커 바닥에 눈 결정 모양의 은색 격자가 굳어졌다.

‘원소 마력이 아니야. 신성력의 공명 파동이다.’

일반 마력이라면 불꽃을 튀겼겠지만 이 결정 격자는 타고난 순수 마나나 신전의 비의로만 굳어지는 반응이었다.

‘성맥을 추적하는 신성 각인이야. 세레나의 온기와는 전혀 다른 배타적인 살기다.’

엘리제는 파랗게 질린 아델을 돌아보았다.

“저 때문에 공녀님과 가게가 위험해지는 거죠? 제가 떠나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엘리제는 아델의 작은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너는 내 주방의 식구야. 내가 황궁에서 단두대를 부수고 자치권을 얻은 건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넌 아무 잘못 없어.”

아델의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떨어졌다. 엘리제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는 순간 공정실 앞마당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앞마당에는 남부 과수원과 밀밭을 관리하는 농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맨 앞에는 과수 조합 대표인 노인 클로드가 모자를 쥐고 서 있었다.

“공녀님. 황궁 소식은 들었지만 상단 놈들이 흉흉한 소문을 퍼뜨립니다.”

클로드의 목소리에 불안이 가득했다.

“황실 규격이 까다로워 과일에 티끌만 섞여도 땅을 몰수하고 벌금을 물릴 거라면서요.”

“골드미르 잔당의 농간입니다.”

베른이 이를 갈았다. 남부 토양은 마력 잔류로 산성화되어 과일 당도가 떨어지는 병해를 앓고 있었으니 농민들의 공포는 클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는 밸류어 공작의 직인과 황실 칙령이 찍힌 문서를 높이 치켜들었다.

“농민 여러분. 제 말을 똑똑히 들으세요.”

단호하고 맑은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황실 규격은 족쇄가 아니라 상단의 횡포를 막는 방패입니다. 오늘부로 밸류어 전역의 농가에 공정 최저가를 보장하는 직거래 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농민들이 웅성거리자 엘리제의 신호로 로딘이 나무 통 세 개를 굴려 왔다.

“이 통에 든 것은 황궁 심사에서 분리해 낸 황산 마그네슘 부산물과 천연 목회를 배합한 토양 순화 연금 비료입니다.”

엘리제는 클로드가 가져온 시든 황금 서리배 묘목 화분에 용액을 부었다.

흙 속으로 용액이 스며들자 기포가 일며 은은한 마력 파동이 번졌다. 메말랐던 흙이 순식간에 기름진 양토로 윤기를 되찾았고 누렇게 뜨던 잎사귀가 파릇한 생기를 뿜어 올렸다.

“마그네슘은 식물의 엽록소를 만들고 황은 향기와 당도를 끌어올립니다. 산성화된 영지의 토양을 이 비료로 개간할 것입니다. 비료는 라 보나에서 무상으로 보급합니다.”

농부들이 흙을 쥐어보며 경탄을 터뜨렸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른 과일의 진짜 가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엘리제의 손짓에 마리와 하녀들이 갓 구워낸 디저트 쟁반을 들고 나왔다.

바삭한 타르트지 위에 얇게 저민 황금 서리배가 장미꽃 모양으로 곱게 얹혀 있었다. 투명한 시나몬 마력 시럽이 코팅된 타르트에서 버터의 고소함과 서리배 특유의 청량한 단내가 피어올랐다.

남부의 척박한 땅에서 자라 신맛이 강했던 토종 서리배를 펙틴 추출 기법과 완충 설탕 시럽에 저온 졸임하여 탄생시킨 ‘황금 서리배 콤포트 타르트’였다.

“어르신부터 맛보시지요.”

클로드는 떨리는 손으로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바삭한 파이 크러스트 사이로 따뜻하고 풍부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서리배의 시원한 감미가 퍼지자 고된 농사일로 굳어 있던 어깨와 허리의 뻐근함이 씻은 듯 가라앉았다.

“이게 정녕 우리가 기른 서리배란 말입니까? 이렇게 달콤할 수가……!”

클로드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다른 농민들도 타르트를 나누어 먹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골드미르 놈들의 거짓말에 흔들리지 마세요. 여러분의 수확물은 제가 제국 최고의 디저트로 빛나게 할 것입니다.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영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농민들의 불안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 바뀌어 있었다.


노을이 붉게 깔릴 무렵 물레방앗간 가도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빛 감찰단 깃발을 앞세운 기마대의 선두에서 검은 준마를 탄 카일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단정한 정복 차림의 에드윈과 정예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카일레온 님?”

엘리제가 놀란 눈으로 마당을 나섰다.

말에서 내린 카일레온은 망토의 먼지를 털어내며 성큼 다가왔다. 장거리 행군에도 푸른 눈동자는 한결같이 맑았다.

“황도에서 정무를 보셔야 할 분이 어찌 이리 서두르셨습니까?”

“황실 공인 보급 기지 설치 칙령을 직접 집행하러 왔다. 보급망 경비를 내 손으로 점검해야 안심이 되니까.”

카일레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그대에게는 황궁의 비단옷보다 그 앞치마가 훨씬 잘 어울리는군.”

“일하는 사람을 놀리지 마세요.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마침 새로 구운 타르트가 있습니다.”

엘리제는 카일레온을 전용실로 안내하고 따뜻한 차와 황금 서리배 타르트를 내놓았다. 카일레온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음미하더니 감탄 어린 눈으로 엘리제를 보았다.

“떫은맛이 조금도 없군. 지친 심장이 편안해진다.”

“마그네슘과 펙틴의 결합 덕분이죠. 하지만 카일레온 님, 한가롭게 맛을 즐길 때가 아닙니다.”

엘리제는 은빛 격자가 굳어 있는 비커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카일레온의 시선이 비커 속 가시나무 문양에 닿는 순간 미소가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성 침묵회의 낙인이로군.”

“역시 아시는군요.”

“대신전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암약하는 이단 심문 조직이다. 정통 사제들도 이름을 입에 담기 꺼려 하지. 타고난 성맥을 지닌 자들을 감금해 성물 촉매로 쓰거나 숙청해 온 놈들이다.”

카일레온의 손이 검자루를 쥐었다.

“어디서 발견되었나?”

“공정실 뒷마당 울타리요. 아델을 노리고 접근했습니다.”

카일레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델은 신전 권력 다툼으로 파문당했던 전대 성혈의 후손일 가능성이 커. 놈들은 물러서지 않을 거다. 필요하다면 아델을 황실 시설로 격리하겠다.”

“안 됩니다.”

엘리제가 단호히 말을 잘랐다.

“황실 시설이라고 안전할 리 없습니다. 그곳 역시 중앙 귀족과 신전의 입김이 닿는 곳이니까요. 무엇보다 아델은 물건이 아니에요. 제 주방의 조수이자 라 보나의 식구입니다.”

엘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일레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작께서는 제게 남부의 전권을 넘기셨고 전하께서는 칙령으로 제 자치권을 승인하셨습니다. 라 보나의 영역 안에서는 신성 침묵회든 교황이든 제 허락 없이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 사람을 건드리는 자는 제 연금술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에 카일레온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는 천천히 검을 끌러 탁자 위에 묵직하게 내려놓았다.

“그대의 말이 옳다. 지키는 자의 의지가 곧 영지의 법이지.”

카일레온이 엘리제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굳은살 박인 그의 손에서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가 전해졌다.

“황실 감찰단의 정예 기사들을 라 보나와 과수원 외곽에 전면 배치하겠다. 아델과 이 공정실을 지키는 것은 이제 황실의 공무다. 그리고 그대의 주방 문을 넘보려는 자가 있다면 내 검이 먼저 그들을 가로막을 것이다.”

엘리제의 입가에 신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든든한 동업자를 둬서 다행이네요.”

“동업자만이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을 텐데.”

카일레온의 낮은 웃음이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밤하늘 아래 물레방앗간의 물살은 힘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영지 외곽의 짙은 어둠 속에서 순백색 로브를 뒤집어쓴 세 개의 그림자가 라 보나의 환한 불빛을 서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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