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15화: 단두대의 파괴
황궁 대회의당으로 이어지는 회랑의 대리석 바닥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엘리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죽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근위병들의 은빛 갑옷에는 먼지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긴장할 필요 없다.”
한 걸음 뒤를 따르던 밸류어 공작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메말랐으나 코트 안쪽에서 쥔 가문의 인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아요. 익숙하지 않은 옷이라 걸음이 무거울 뿐이죠.”
엘리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화려한 코르셋 드레스 대신 남부의 고급 린넨으로 단정하게 재단한 감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간결하게 묶어 넘겼고 품에는 두꺼운 가죽 시료 상자를 안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으레 두르는 보석 목걸이나 부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회의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열리자 수십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융단 너머 옥좌 아래 단상에는 황실 정복 차림의 카일레온이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제를 마주하는 순간 서늘하던 기운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단상 주변을 둘러싼 전례원 원로들과 중앙 귀족들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매서웠다.
“사교계를 제멋대로 뛰쳐나가 시골 구석에서 장사치 흉내를 내던 공녀로군.”
“앞치마를 두르고 빵이나 굽더니 기어코 황실 소환장에 얼굴을 들이밀었어.”
귓가를 스치는 수군거림은 조금도 낮지 않았다. 저들에게 엘리제는 가문의 체통을 깎아먹고 쫓겨난 문제아에 불과했다.
전례원 수석 심사관인 루카스 경이 은빛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나왔다. 주름진 얼굴에는 노골적인 멸시가 번져 있었다.
“엘리제 드 밸류어 공녀. 오늘 자리는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살피고 황실 직속 수석 파티시에의 적격성을 검증하기 위한 엄중한 심사요.”
“알고 있습니다. 늦지 않게 도착했지요.”
엘리제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답하자 루카스 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녀는 여전히 제국의 법도를 모르는군. 귀족의 신분을 망각하고 천한 상업 활동에 매달린 것도 모자라 황실을 상대로 오만한 독점 조건을 내걸었소. 게다가 전하의 청혼까지 장부 놀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었지.”
“제가 내건 것은 독점이 아니라 품질 보증입니다. 기준이 없는 계약은 황실의 이름이라도 거절하는 것이 만든 사람의 의무니까요.”
“오만하기 짝이 없군!”
원로 귀족 하나가 소리쳤지만 엘리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루카스 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뒤편의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받쳐 든 은제 쟁반 위에는 밀랍으로 봉인된 유리 반응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관 바닥에는 탁한 회색 가루가 가라앉아 있었다.
“공녀가 변명할 시간은 끝났소.”
루카스 경이 반응관을 들어 올렸다.
“이것은 황실 감찰단에 납품될 예정이던 남부 영지의 허브 시료에서 분리해 낸 잔여물이오. 바닥에 가라앉은 이 불길한 회색 침전을 보시오. 마력의 순환을 교란하는 정체불명의 불순물이오!”
회의당 내부가 크게 술렁였다. 귀족들의 눈빛에 경악과 분노가 번졌다.
“설마 전하께 바칠 음식에 손을 댔단 말인가?”
“마력 장애를 앓으시는 전하를 노린 계획적인 독살 시도다!”
터져 나오는 비난은 사나웠다.
엘리제의 시야에 기시감이 스쳐 지나갔다. 원작 소설 속에서 엘리제 드 밸류어가 영문도 모른 채 황태자 독살 미수범으로 몰려 단두대로 끌려가던 바로 그 광경이었다.
그때의 원작 엘리제는 연금술도 화학도 알지 못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회색 찌꺼기를 보며 공포에 질려 비명만 질렀고 결국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지금 서 있는 사람은 화학공학을 전공했던 대학원생이자 라 보나의 점주였다.
엘리제는 가죽 시료 상자를 열고 단상 앞 검사대 위에 도구들을 꺼내 놓았다. 소형 마력 가열석과 눈금 달린 완충 용액 비커 그리고 은제 핀셋이 차례로 놓였다.
“독살이라고요? 그 침전물이 무엇인지 성분 분석이나 해 보고 그런 무거운 죄명을 입에 올리시는 겁니까?”
“황실 전례원 소속 연금술사들이 조사한 결과요! 마력을 불안정하게 흔드는 미지의 독성 침전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단 말이오!”
루카스 경이 핏대를 세웠다. 엘리제는 덤덤하게 반응관을 건네받았다.
“미지의 독성이 아니라 단지 화학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겠지요.”
엘리제는 주저 없이 마력 가열석을 켰다. 푸른 불꽃이 비커 아래에서 은은하게 일어났다.
“아델과 함께 영지에서 수십 번 반복 검증한 시료입니다. 이 회색 침전은 허브 자체에서 나온 독초 성분이 아닙니다.”
그녀는 완충 식초산 용액을 스포이트로 빨아올려 반응관에 세 방울 떨어뜨렸다. 약알칼리 순화 용액을 섞은 뒤 온도를 섭씨 60도로 정확히 유지했다.
유리관 안쪽에서 미세한 기포가 피어올랐다.
“남부 영지의 허브 밭은 맑은 청정 마력수로 재배됩니다. 그런데 중앙 상단들은 운송비를 아끼려고 건조 과정에서 곰팡이를 억제하는 저급 황산 마그네슘 광물 가루를 불법으로 살포했습니다.”
엘리제의 설명이 회의당을 조용하게 채워 나갔다.
“순수한 마력수와 저급 황산염이 만나면 불용성 회색 침전물이 생성됩니다. 사람의 마력선을 해치는 독이 아니라 단순히 침전되어 흡수를 방해하는 무기 광물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녀가 분말 형태의 순화 촉매를 아주 미량 털어 넣었다.
순간 반응관 내부에서 은빛 파동이 일더니 바닥에 엉겨 붙어 있던 탁한 회색 침전물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찌꺼기는 무해한 투명 소금 결정으로 바닥에 가라앉았고 상층부에는 맑고 영롱한 푸른빛의 순수 마력 에센스만 깨끗하게 분리되었다.
마치 마술처럼 탁함이 걷히고 완벽한 정화가 이루어졌다.
“저는 이 불순물의 존재를 파악했기에 공정실 시설과 인력이 갖춰지기 전까지 생산량을 하루 백 개로 제한했습니다. 원료를 세 단계로 나누어 불량 광물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함이었죠.”
엘리제는 푸른 에센스가 담긴 유리관을 루카스 경의 눈앞에 내밀었다.
“독살을 꾀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이익에 눈이 멀어 광물 가루를 뿌려 댄 중앙 상단들이며 이를 제대로 검수조차 하지 않고 방치한 전례원의 무능입니다.”
루카스 경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귀족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영롱한 푸른빛을 바라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을 깬 것은 서늘한 발걸음 소리였다.
단상 위에 서 있던 카일레온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집에서 서슬 퍼런 마력이 푸른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소드 마스터의 서늘한 기백이 홀 전체를 짓눌렀다.
“전하…….”
루카스 경이 뒷걸음질을 쳤으나 카일레온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엘리제의 곁에 나란히 섰다.
“본인은 지난 수년간 극심한 마력 통증과 무감각 증후군에 시달렸다.”
카일레온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제국의 수많은 의원과 학회가 본인을 포기했을 때 감각을 되살리고 뒤엉킨 마력을 풀어 준 유일한 존재는 엘리제 공녀였다. 그녀의 디저트가 없었다면 본인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품 안에서 가죽 장정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라 보나에서 작성되었던 바로 그 계약서였다.
“황실 전례원과 결탁하여 불량 원료를 유통하고 감찰단의 보급망을 위협한 중앙 상단 전원에 대한 즉각적인 조사를 명한다. 아울러 황실은 엘리제 드 밸류어 공녀와 체결한 독립 운영 계약을 공식 승인한다.”
에드윈이 앞으로 나와 칙령 문서를 펼쳤다.
“라 보나의 모든 레시피와 공정 기록은 공녀의 영구적 사유 재산으로 인정된다. 황실 공정실은 독립 검수관을 두며 남부 영지 주민들과 맺은 원료 직거래 계약은 황실 법령으로 보호된다. 또한 수석 파티시에의 직무는 사교 행사 참석 의무를 배제한 순수 기술직으로 한정한다.”
원로 귀족들이 웅성거렸지만 카일레온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밸류어 공작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가문의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밸류어 공작가는 오늘부로 남부 전역의 상업 및 농업 자치권과 유통 인가권을 엘리제 공녀에게 전권 위임한다. 공녀의 결정은 곧 가문의 뜻이며 황실의 공인과 함께 영지의 법이 될 것이다.”
공작의 선언은 쐐기였다.
사교계에서 버림받았던 악역 영애는 이제 단순한 영주의 딸이 아니었다. 제국 황태자의 신뢰와 가문의 실권을 한 손에 쥔 독보적인 연금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카일레온이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권력자가 아닌 한 사람의 남자로서 바치는 깊은 존중과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그대의 조건을 지켰다. 그러니 나의 청혼 또한 유효하다.”
엘리제는 그가 내민 계약서의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청혼에 대한 답은 아직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알고 있다. 그대가 언제든 라 보나의 앞치마를 두르고 웃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으니.”
카일레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강요가 아닌 기다림의 표시였다. 엘리제의 입가에도 비로소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공식 심사가 끝나고 대회의당을 빠져나온 엘리제는 황궁 서편 정원의 넓은 광장에 섰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낡고 거대한 회색 돌로 쌓아 올린 높은 단상이 놓여 있었다.
제국의 역사 속에서 반역자와 중범죄자들의 목을 베던 처형대 터였다.
원작 소설의 엘리제 드 밸류어가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어야 했던 바로 그 단두대의 자리였다.
엘리제는 가만히 그 돌단을 내려다보았다. 빙의 첫날부터 가슴 깊은 곳을 짓누르던 파멸의 사슬이 마침내 소리 없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저곳을 허물 생각이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카일레온이 말했다.
“어두운 과거의 흔적을 황궁 안에 남겨 둘 이유는 없지. 그 자리에 그대가 원하는 정원을 꾸며도 좋다.”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허물지 마세요.”
“기억이 불쾌하지 않은가?”
“단두대가 서 있던 자리 위에 제국 최초의 연금술 카페 황실 지국 설립 인가 표지석을 세울 거예요.”
그녀는 주머니 속에 든 하얀 앞치마 끈을 쥐었다.
“누군가를 죽이던 자리를 사람들에게 달콤한 위로를 건네는 곳으로 바꾸는 것. 그게 제가 연금술을 하고 빵을 굽는 이유니까요.”
카일레온의 눈동자에 깊은 감탄이 어렸다. 그는 엘리제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광장 너머 물레방앗간과 영지로 이어지는 남부 가도에는 이미 라 보나로 돌아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시료 기록판을 안고 있을 아델과 쟁반을 든 마리 그리고 깐깐하게 장부를 채점하고 있을 베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두대의 망령은 완전히 사라졌다.
원작이 정해 놓았던 잔혹한 결말을 발밑에 짓밟은 채 엘리제는 제국의 가장 달콤하고 강력한 연금술 영주로서 자신의 가게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