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14화: 황태자의 정식 제안
라 보나 뒤편의 폐창고는 며칠 사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새로 올린 지붕 아래에는 마력 안정석이 줄지어 박혔고 벽면에는 원료 등급을 표시할 나무판이 걸렸다. 한쪽에는 세척용 수조가 놓였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계량대가 놓여 있었다.
“아델. 세 번째 반응관의 침전량을 다시 적어 줘요.”
엘리제는 유리관 세 개를 빛에 비춰 보았다. 같은 허브 분말을 같은 양의 우유 크림에 섞었는데도 세 번째 관의 바닥에는 회색 가루가 가라앉아 있었다.
“첫 번째는 흔적이 없고 두 번째는 아주 조금이에요. 세 번째는 어제보다 더 많아졌어요.”
아델이 기록판에 숫자를 옮겼다. 손목의 낡은 끈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였지만 글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수분 때문인지 마력 농도 때문인지 아직 분리하지 못했군요.”
카일레온이 계량대 옆에 냉각석을 내려놓았다. 검은 망토 자락에는 새 목재에서 묻은 톱밥이 붙어 있었다.
“그걸 왜 직접 옮기세요?”
엘리제는 반응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공정실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설치까지 확인할 의무가 있다.”
“후원자는 보통 돈만 내고 영수증을 받으러 오는데요.”
“그대의 영수증에는 서명이 없더군.”
카일레온은 요 며칠 라 보나에 나타날 때마다 공정실의 배관과 마력 안정석을 살폈다. 작업이 끝난 뒤에도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카일레온 님.”
엘리제가 장갑을 벗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요즘 라 보나에 너무 오래 계시는 것 같은데요.”
카일레온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불편한가?”
“손님이 오래 머무는 건 괜찮아요. 다만 후원자와 손님의 경계가 흐려지면 장부를 쓰기 어려워져요.”
“그대는 모든 일을 장부로 판단하는군.”
“장부에 남지 않는 건 나중에 누군가 자기 마음대로 바꿔 버리니까요.”
엘리제는 회색 침전이 든 반응관을 들어 올렸다.
“하루 삼백 개를 만들라는 요청이 아직 유효한가요?”
“황실은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럼 기다리게 해야죠. 하루 백 개도 겨우 품질을 지키는 양이에요.”
“그대는 황실의 요청도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황실이 손님이라면 제 규칙을 따라야죠.”
카일레온은 냉각석을 계량대에 맞춰 놓았다.
“그 규칙을 지키게 해 주겠다.”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물레방앗간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광장에 들어선 마차 세 대에는 황실 문장이 찍혀 있었다. 에드윈은 금실이 놓인 정식 제복을 입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은색 문서함을 든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공녀님. 황실 전례원에서 나온 아르망 경입니다.”
아르망은 라 보나와 새 공정실을 차례로 살피더니 문서함을 열었다.
“황실은 라 보나의 공정실을 황실 직속 공급 시설로 승인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엘리제 드 밸류어 공녀를 황실 공식 수석 파티시에로 임명하는 안을 상정했습니다.”
마리가 들고 있던 쟁반을 멈췄고 베른은 장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상정했다는 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공녀께서 수도로 와서 전례에 따른 심사를 받으시면 바로 결정될 사안입니다.”
아르망이 두꺼운 문서를 펼쳤다. 황실 공정실 사용권과 궁정 연회 참석 의무가 적혀 있었다. 레시피와 공정 기록의 통제권도 황실에 있었고 생산량은 황실 필요에 따라 조정할 수 있었다.
엘리제는 문서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건 임명이 아니라 인수 계약이네요.”
“표현이 과격합니다. 황실의 이름을 등에 업는 자리입니다.”
“제 레시피를 보관하고 공정 기록을 승인하며 생산량까지 정한다면 제가 가진 건 앞치마뿐이잖아요.”
아르망의 입가가 굳었다.
“개인 카페의 권한을 조정하는 대가로는 충분히 큰 영예입니다.”
“저는 영예를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엘리제는 문서의 빈 여백에 선을 그었다.
“레시피와 기록은 라 보나의 소유로 남겨 주세요. 공정실은 독립 검수관을 두고 원료 등급 기준은 제 허락 없이 바꾸지 마세요. 주민들과 맺은 원료 계약도 유지해야 합니다.”
“황실 직속 시설에 그런 조건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직속으로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공녀님. 이 자리는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검토하신—”
“에드윈.”
카일레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에드윈은 입을 다물었다.
엘리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전하께서요?”
카일레온은 문서함 위에 손을 올렸다.
“이 제안은 내가 검토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왜 본인이 아닌 사절을 보내서 제 카페를 사려는 것처럼 말하게 했죠?”
엘리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카일레온 님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권한이 있는 사람인 건 알겠어요. 이제부터는 본인 이름으로 말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협상도 없어요.”
카일레온은 아르망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 나가라.”
“전하. 아직 공식 절차가—”
“나가라고 했다.”
아르망은 문서를 거두었다. 에드윈도 문가로 물러났지만 카일레온은 손을 들어 그를 멈추게 했다.
“에드윈은 남아라. 오늘 일의 증인이 필요하다.”
엘리제의 불안이 깊어졌다. 증인이 필요한 고백이라면 사적인 감정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해가 진 뒤 라 보나의 문이 닫혔다. 마리와 아델은 별저로 돌아갔고 베른과 로딘은 공정실의 자물쇠를 확인하러 나갔다. 카페 안에는 엘리제와 카일레온 그리고 에드윈만 남았다.
카일레온은 망토 안에서 작은 검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뚜껑에는 로젠버그 황실의 금색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뚜껑을 열자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드러났다. 반지 안쪽에는 황실 직계만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카일레온 폰 로젠버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제를 향해 몸을 낮췄다.
“로젠버그 제국의 황태자이며 황제의 장남이다.”
엘리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페의 마력 안정석이 작은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조차 멀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대가 내 이름을 부르던 날부터.”
“저는 몰랐어요. 당신이 황태자라는 걸 알았다면 에그타르트를 던지고 문부터 잠갔을 겁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기만이에요.”
엘리제의 손이 주먹으로 굳었다. 카일레온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맞다. 숨겼다. 그대가 내 신분이 아니라 나를 보기를 원했다.”
“이제 와서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겠다.”
카일레온은 새 문서를 꺼냈다. 황실 직인 대신 자신의 서명이 맨 아래에 놓여 있었다.
“황실 공식 수석 파티시에의 자리를 제안한다. 레시피의 소유권은 그대에게 남긴다. 라 보나는 밸류어 영지의 독립 사업체로 보장한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사교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엘리제는 문서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요?”
카일레온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황태자비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
에드윈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 말은 카페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저를 치료해 준 대가인가요?”
“아니다.”
“카페가 제국에 돈을 벌어다 주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아니다.”
카일레온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무도 믿지 않던 영지에 규칙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자란 원료에 값을 매기고 불량품을 돌려보내면서도 그들의 내일을 보장했다. 황실의 명령보다 품질을 앞세웠고 내 앞에서도 살려 달라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대가 만든 질서 안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감각을 되찾은 뒤에도 이곳을 떠나기 싫었던 이유는 디저트 때문만이 아니다.”
엘리제의 심장이 불편하게 뛰었다.
“정확히 말해요. 감사인지 동정인지 욕심인지.”
“좋아한다.”
카일레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살려서가 아니라 엘리제 드 밸류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내가 가진 권력으로 그대를 묶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 제안으로 왔다.”
엘리제는 문서의 빈 서명란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원작의 단두대로 이어질 황실의 문이었다.
“제가 거절하면요?”
“아무것도 빼앗지 않겠다.”
“황태자라면 약속을 지키기 어렵겠죠.”
“그러니 증인을 세웠다.”
에드윈이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공녀님께서 거절하셔도 라 보나의 계약과 영지 운영 권한에는 불이익을 주지 않겠습니다.”
엘리제는 카일레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약속도 계약서에 적을 거예요.”
“그렇게 하라.”
다음 날 아침 밸류어 공작이 라 보나에 도착했을 때 카일레온은 광장에 나와 있었다. 검은 망토 대신 황실 문장이 수놓인 외투를 입고 있었고 에드윈은 그의 뒤에서 정식 예를 갖추고 서 있었다.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짧은 인사가 광장에 퍼졌다. 마리는 찻주전자를 내려놓았고 아델은 기록판을 품에 안았다.
엘리제는 카운터 위에 새 계약서를 펼쳤다.
“조건은 다섯 가지예요.”
카일레온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첫째. 라 보나의 레시피와 공정 기록은 제 소유로 남깁니다. 둘째. 황실 공정실에는 제3자 독립 검수관을 둡니다. 셋째. 주민 원료 계약과 고정 매입가는 황실이 바꾸지 못합니다.”
엘리제는 펜을 움직였다.
“넷째. 황태자비가 되더라도 사교 행사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다섯째. 제가 결혼을 거절하거나 나중에 파혼을 요구해도 라 보나와 밸류어 영지에 보복하지 않습니다.”
공작의 눈썹이 올라갔다. 카일레온은 계약서를 읽은 뒤 펜을 들어 모든 항목 아래에 서명했다.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쉽게요?”
“그대가 지키려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카일레온은 마지막 서명 옆에 황실 반지를 눌렀다. 푸른 빛이 종이 위로 번지며 계약의 문장이 봉인되었다.
그때 광장 입구에서 황실 전령이 달려왔다. 전령은 무릎을 꿇고 봉인된 서류를 내밀었다.
“엘리제 드 밸류어 공녀께 전달하는 황실 소환장입니다.”
엘리제가 봉인을 깨자 짧은 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비 후보 공식 심사와 수석 파티시에 임명식을 위해 열흘 안에 수도로 출두할 것.
마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베른은 말없이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공작은 황실 인장을 확인하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엘리제는 소환장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청혼에 대한 답은 아직 하지 않았는데 심사부터 잡았네요.”
“황실은 성급하다.”
카일레온이 말했다.
“그래도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엘리제는 새 공정실 쪽을 바라보았다. 반응관 안에는 어제 채취한 회색 침전이 봉인되어 있었다. 수도로 떠나는 동안 누군가 그 시료를 바꿀 수도 있고 공정실을 차지하려 할 수도 있었다.
“가긴 갈 거예요.”
카일레온이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제 공정실과 제 사람들을 지키러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대의 곁에 서겠다.”
“황태자로서 말고요.”
엘리제는 계약서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카일레온 님으로 와요. 그래야 제 답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카일레온의 표정에 안도와 기쁨이 번졌다.
엘리제는 아직 웃지 않았다. 수도의 황실에는 원작의 단두대와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녀는 회색 침전이 든 반응관을 상자 깊숙이 넣었다.
“좋아요. 수도로 가죠. 대신 돌아올 때까지 라 보나의 문은 닫지 않을 겁니다.”
황태자의 청혼은 카페의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 너머에는 가장 위험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