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15화: 내 고향이 이럴 리 없다
황실 순행 행렬이 동부 가도를 달린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로잘린은 특수 개조 마차의 안락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채 모래시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모래가 마지막 한 알까지 떨어져 내렸다.
"정오입니다."
로잘린은 들고 있던 깃펜을 단호하게 먹통에 꽂았다.
출장 조건부 명령서 제2조. 마차 내 업무 시간은 하루 최대 4시간. 정오 이전 대면 보고 일절 금지.
그녀는 정확히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만 일했다. 1분도 더 일할 생각은 없었다.
안쪽 황동 종을 흔들자 마르셀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님, 정오가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와 탕약을 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육중한 문이 열리며 마르셀이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은쟁반에는 따뜻한 호밀빵과 닭가슴살 수프, 베르딘 궁의관이 처방한 피로 회복용 탕약이 놓여 있었다.
"폐하께서는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고 계십니다. 다만 오전 내내 마차 쪽을 돌아보시며 정오가 아직 멀었냐고 물으셨습니다."
"규정은 규정입니다. 정오 전에는 대면하지 않기로 옥새까지 찍으셨으니까요."
로잘린은 탕약을 들이켠 뒤 두꺼운 비단 커튼을 걷어 올렸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흑마를 탄 칼릭스가 마차 창문 옆으로 다가왔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그의 눈동자가 로잘린의 안색을 훑었다.
"안색이 나쁘지 않군."
"폐하께서 규정을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마차에서 결재 서류에 깔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살 것 같습니다."
칼릭스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암호 통신통을 건넸다.
"수도에서 온 전령이다."
로잘린은 통의 봉인을 풀고 양피지를 펼쳤다. 에드먼드의 글씨와 이안의 확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수도 감찰단 보고: 기록 보존함 삼중 봉인 유지 완료. 회계 분류표 대조 정상 진행. 이사벨 국장의 감시로 재무부 개편 초안에 접근하려던 서기관 1명 포착되어 동선 추적 중.
수도는 안전했다. 시스템을 구축해 둔 보람이 있었다.
"에드먼드와 이안이 제 몫을 다하고 있군요."
"네가 사람 부리는 솜씨 하나는 지독하지."
칼릭스가 낮게 읊조리며 저 멀리 굽이치는 능선을 가리켰다.
"저 고개만 넘으면 벨리아령이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고향이지."
고향이라는 말에 로잘린의 가슴이 뛰었다.
빙의 후 3년 동안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다. 푸른 초원과 살진 암탉, 주먹만 한 감자가 가득한 텃밭. 회의도 없고 결재도 없는 영원한 안식처.
"폐하, 약속대로 영지가 정상화되면 즉시 수도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칼릭스는 말머리를 돌렸고 행렬은 고갯길을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가 평원에 들어선 순간 로잘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이게 뭐야?"
상상했던 푸른 낙원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풀포기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메마른 대지였다.
영지 한가운데를 흘러야 할 수로는 하얀 자갈과 흙먼지만 뒹굴고 있었다. 수로 옆의 오두막들은 지붕이 주저앉아 폐허나 다름없었다.
앙상하게 마른 영민들은 황실 행렬을 보자 환호 대신 겁에 질려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 감자는? 내 살진 닭들은? 낮잠을 자려던 잔디밭은 어디로 간 건데?'
로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행렬은 벨리아 영주 저택 앞 광장에 멈춰 섰다. 저택의 붉은 벽돌벽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철제 울타리는 녹슬어 쓰러져 있었다.
그 황폐한 저택 정문 앞에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무리가 버티고 서 있었다.
화려한 자주색 비단 코트를 입은 거구의 사내가 배를 불룩 내민 채 서 있었다. 굵은 목에는 금목걸이가 번쩍였고 뒤에는 사설 용병 삼십여 명이 흉포한 무기를 든 채 도열해 있었다.
마르셀이 낮게 속삭였다.
"보좌관님, 영지 대리인이 아닙니다."
"골트 상단이군요."
동부 일대의 고리대금과 곡물 유통을 독점하던 토착 상단이었다. 도망친 전임 대리인이 영지 공금을 횡령하고 상단에 막대한 빚을 졌다는 기록이 떠올랐다.
자주색 코트의 사내가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어떤 귀하신 분들이기에 이 벽지까지 요란하게 오셨는가. 나는 벨리아령의 채권 관리인이자 골트 상단 동부 지부장 바르토요. 전임 대리인의 빚더미를 대신 떠안고 영지를 돌봐주고 있지. 통행세를 내러 오셨나?"
오만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 순간 행렬 최전선에서 서늘한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마력이 광장을 짓눌렀다.
흑마에서 내린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칠흑 같은 갑주 위로 붉은 망토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바르토는 그제야 흉갑의 황실 쌍두독수리 문양과 피처럼 붉은 안광을 발견했다.
"폐, 폐하……?"
쿵.
바르토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용병들도 사색이 되어 무기를 내던지며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소인이 눈이 멀어 존안을 몰라뵈었습니다!"
칼릭스는 미동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황실의 영지에 기어들어 와 대리인을 자처하고 영민들을 굶기며 통행세를 뜯어내는 도적 떼를 황제가 친히 보았군."
"아닙니다, 폐하! 가뭄이 심해 상단이 부득이 채무를 대납하고 영지를 지켰을 뿐입니다!"
쉬익.
칼릭스가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핏빛 마력이 검신을 감쌌다.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짐의 면전에서 혀를 놀리는군. 네놈의 목을 베어 영지 입구에 걸겠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기사들이 칼을 뽑으며 광장이 피바람으로 물들기 직전이었다.
"폐하, 검을 거두십시오."
차분한 목소리가 살기를 갈랐다.
칼릭스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로잘린이 서류철을 든 채 다가왔다.
"로잘린. 저자는 황실을 기만하고 백성을 착취했다. 즉결 처형해야 마땅하다."
"출장 조건부 명령서 제3조를 잊으셨습니까?"
로잘린은 황제의 살기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현지 행정 쇄신에 대한 감찰단장의 독립 전권 보장 및 즉결 처형 금지 조항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옥새를 찍으셨습니다."
"저런 자를 살려두겠다는 것인가?"
"살려두는 게 아닙니다. 목을 베면 피만 튀고 횡령된 세금의 행방과 은닉된 장부는 영원히 사라집니다. 죽이는 것은 가장 게으른 행정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먼저 토해내게 만들어야지요."
칼릭스는 이를 악물었으나 로잘린의 단호한 눈동자 앞에서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네 뜻대로 해라, 감찰단장."
로잘린은 바르토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르토 지부장."
"예, 예! 감찰단장 나으리!"
"대리인이 도망친 여덟 달 동안 저택을 무단 점거하고 있었군요? 그리고 북쪽 수로의 수문 세 곳을 폐쇄한 이유가 뭡니까?"
"수로가 낡아 보수 공사를 하느라 잠시 닫아둔 것입니다……."
"보수 공사를 여덟 달이나 하면서 농경지를 다 말려 죽였다고요?"
로잘린이 차갑게 비웃으며 바르토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허리띠에 묵직한 청동 열쇠 세 개가 매달려 있었다.
"보수 공사 중인 수문 열쇠를 상단 지부장이 차고 다닙니까?"
바르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로잘린은 근위대장에게 명령했다.
"열쇠를 압수하세요. 또한 저택 내 모든 집무실을 봉쇄하고 지난 3년간의 거래 전표와 소작 장부를 전량 압수하십시오. 지부장은 지하 창고에 구금하고 외부 서신 왕래를 금지합니다."
"예, 감찰단장님!"
일사천리로 떨어지는 명령에 바르토는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정돈된 마당을 보며 로잘린은 한숨을 삼켰다.
꿈꾸던 시골 농장은 없고 썩은 행정 지옥만 남았다.
'기필코 이 쓰레기장을 완벽한 낙원으로 뜯어고치고 말겠다.'
밤이 깊어지자 영주 저택 집무실에 촛불이 켜졌다.
탁자 위에는 낮에 압수한 골트 상단의 장부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수로를 고의로 막았어."
장부를 넘기던 로잘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골트 상단은 북쪽 저수지의 물길을 차단해 농민들을 말려 죽이고 있었다. 물을 인질 삼아 헐값에 토지를 빼앗고 상단 소유 농장으로만 물을 돌리는 악덕 수탈이었다.
문이 열리며 칼릭스가 들어왔다. 편안한 검은 튜닉 차림의 그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마르셀이 끓인 차다."
황제가 직접 차를 날라오다니 황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로잘린이 놀란 눈으로 보았다.
칼릭스는 벽에 기대어 낡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었나. 네가 돌아오고 싶어 하던 고향이 겨우 이런 폐허였느냐는 말이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물도 나오지 않고 도적 같은 상놈들이 활개 치는 땅이다. 이런 곳에서 닭을 키우겠다고 짐을 떠나려 했단 말인가? 황궁으로 돌아가자. 로잘린. 네 영지를 황실 직할지로 흡수하고 가장 기름진 남부 영지를 새로 하사하겠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간절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로잘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습니다. 남부 영지로 가면 또 새로운 귀족들이 들러붙고 폐하께서는 새 업무를 떠넘기실 것 아닙니까?"
로잘린은 압수한 수문 열쇠를 탁자 위에 쾅 내려놓았다.
"폐허라면 고치면 됩니다. 도망친 대리인도 없고 상단 놈들도 처넣었으니 이제 이 영지는 백지나 다름없습니다."
"백지라니?"
"출장비와 전권을 동원해 수로를 뚫고 상단의 은닉 재산을 몰수해 종자를 보급할 겁니다. 기름진 땅에 감자를 심고 살진 닭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로잘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 눈동자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정상화가 끝나는 날 명령서 제4조에 따라 폐하께서는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는 완벽하게 고쳐진 낙원에서 퇴사할 것입니다."
칼릭스는 숨을 멈춘 채 그녀를 응시했다. 은퇴를 위해 폐허를 통째로 뜯어고치겠다는 여인.
그 눈부신 생명력에 심장이 요동쳤다.
칼릭스의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독하군. 정말 지독해."
칼릭스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짐도 순순히 돌아갈 수는 없겠군. 네가 이 폐허를 어떻게 바꾸는지 똑똑히 지켜보겠다. 네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로잘린의 눈썹이 꿈틀했다.
상사를 내쫓으려면 영지를 초고속으로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고치는 동안 상사는 계속 곁에 붙어 있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또 야근과 개혁의 굴레였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내일 새벽 일출과 동시에 북쪽 저수지로 가겠습니다. 늦잠 주무시지 마십시오, 폐하."
보좌관의 은퇴를 건 진짜 행정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