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16화: 물길에는 퇴직금이 걸려 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로잘린은 북쪽 저수지의 석조 둑 앞에 섰다.
저수지에는 물이 있었다. 그것도 둑 윗선 가까이 차올라 있었다. 발밑의 흙은 갈라져 있는데 높은 곳의 수면만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가뭄 때문이라더니요."
로잘린이 청동 열쇠 세 개를 손바닥에 놓았다.
둑 아래에는 세 개의 잠긴 공공 수문이 나란히 있었다. 그 위쪽에서 따로 갈라진 좁은 돌홈에는 물이 쉼 없이 흘렀다. 돌홈은 마을 반대편의 골트 상단 농장으로 굽어 들어갔다.
"저쪽은 아주 잘 흐르는군요."
말끝이 떨어지자 창을 든 사내 여섯이 돌계단을 가로막았다. 저택에서 무장 해제된 용병들과는 별도로 저수지를 지키던 자들이었다.
"더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바르토 지부장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수문에 손댈 수 없습니다."
대장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뒤에 선 황실 근위대와 칼릭스를 보자 창끝이 조금 내려갔다.
칼릭스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의 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로 붉은 마력이 피어났다.
"그 허락은 지하 창고에서 받게 해주지."
"폐하."
로잘린이 그 앞에 서류 한 장을 들었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현지 감찰 명령서였다.
"저 사람들까지 기절시키시면 누가 언제 이 수문을 드나들었는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제 조사 시간을 늘리지 말아 주세요."
칼릭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력이 사그라드는 데에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말해라."
로잘린은 경비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찰단장 로잘린 폰 벨리아입니다. 이 시설의 출입권과 장부 보존권을 회수합니다. 창은 근위대에 맡기세요. 저항하면 이름과 소속을 적어 체포할 겁니다. 협조하면 오늘 있었던 일도 그대로 기록하겠습니다."
사내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 창을 내려놓았다.
"저희는 문을 건드린 적 없습니다. 지부장이 직접 열쇠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말을 확인할 기록이 있습니까?"
경비대장은 둑 옆 작은 벽돌 창고를 가리켰다. 마르셀이 근위대 두 명과 함께 출입 기록을 확인하고 창고를 봉했다.
로잘린은 수문 앞에 무릎을 굽혔다. 세 자물쇠에는 오래된 녹과 달리 열쇠 구멍 가장자리에 새로 긁힌 자국이 있었다. 최근에도 누군가 이 문들을 잠가 왔다.
"다 열면 끝나겠군."
칼릭스가 말했다.
"물이라면 이미 저 위에 있다."
로잘린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열쇠를 돌리고 영주 저택으로 돌아가 하루 업무를 끝낸 뒤 감자를 심을 땅이나 고르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둑 아래에서 쉰 목소리가 올라왔다.
"둘째 문은 열면 안 됩니다!"
낡은 장화를 신은 여자가 근위대 사이로 달려왔다. 손에는 물때가 낀 나무 자가 들려 있었다.
"미라입니다. 이 수로를 관리했어요. 상단이 들어온 뒤에는 접근을 못 했지만 여기 돌이 언제 빠졌는지는 압니다."
그녀는 둘째 수문에서 이어지는 농업용 수로를 가리켰다. 멀리서는 흙길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 보니 벽 한쪽의 받침돌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그 위에 새 흙이 허술하게 발라져 있었다.
"문을 끝까지 열면 저기서 터집니다. 아래에는 집이 세 채 있습니다."
칼릭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상단이 돌까지 뽑았다는 건가?"
"그건 아직 모릅니다."
로잘린은 미라가 가리킨 틈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흙은 아직 속까지 마르지 않았다. 파손 시점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단순한 오래된 균열이라고 넘기기도 어려웠다.
"미라 씨. 첫째 문은요?"
"마을 공동 물통으로 갑니다. 길이 짧아서 어제도 아래쪽을 걸어 봤어요. 막힌 곳은 없습니다. 다만 오래 비워 둔 수로니까 처음부터 크게 열면 안 돼요."
"셋째 문은?"
"서쪽 밭으로 가는데 중간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열쇠가 세 개 있다고 세 문을 한꺼번에 열 수는 없었다. 로잘린은 자루 속에서 조사 기록지를 꺼냈다.
"첫째 문만 시험 개방하겠습니다. 미라 씨가 물높이를 보고 멈추라고 하면 즉시 멈춥니다. 둘째와 셋째는 점검 전까지 봉인합니다."
"짐이 둑을 갈라 물을 보내면 더 빠르다."
"마을까지 쓸려 나가는 속도도 빨라지겠지요."
칼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 보이자 로잘린은 벽에 기대어 삐걱거리는 수문 손잡이를 가리켰다.
"손잡이가 갑자기 돌아가지 않게 잡아 주시겠습니까? 힘은 필요합니다. 방향은 미라 씨가 정합니다."
그는 잠깐 로잘린을 보더니 손잡이 옆에 섰다.
첫째 자물쇠가 열렸다. 녹슨 바퀴가 우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수문 아래로 검은 흙탕물이 토해져 나왔다.
"반 바퀴만요!"
미라의 외침에 칼릭스의 손이 멈췄다. 황제가 지방 수로지기의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는 광경에 근위대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로잘린은 그 표정들을 못 본 척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엄보다 하류 가옥의 지붕이었다.
미라와 근위병 두 명이 수로를 따라 달렸다. 잠시 뒤 멀리서 흰 천이 흔들렸다. 물길이 새지 않고 통과했다는 신호였다.
"조금만 더."
수문이 한 뼘 더 올랐다. 고여 있던 물이 좁은 홈을 차지하고 마을 쪽으로 흘러갔다. 골트 상단 농장으로 이어지는 사설 취수로에는 근위대가 보초를 세웠다.
"폐하의 마력을 아무 데나 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칭찬인가?"
"수로가 터지지 않았다는 현장 평가입니다."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마을의 공동 물통은 오랫동안 빈 채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누런 먼지가 켜켜이 쌓였고 그 옆에는 깨진 두레박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멀찍이 서 있었다. 돌홈의 끝에서 졸졸거리는 소리가 나자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물통을 들여다보았다.
흙탕물이 한차례 지나고 맑은 물이 뒤따랐다. 미라가 물통을 씻어 낸 뒤 사람들에게 말했다.
"바로 마시지 마세요. 한 번 가라앉히고 끓여서 드세요."
한 노파가 물에 손끝을 담갔다. 손등의 마른 주름 사이로 물방울이 흘렀다.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몇 번이나 손을 적셨다.
로잘린은 고개를 돌렸다. 이 장면을 보고도 농장용 수로는 남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물통까지 채웠으면 오늘 할 일을 다 한 셈이었다.
"보좌관님."
한 여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다가왔다. 품에는 구겨진 종이 두 장이 있었다.
"물을 받았으니 밀린 물값도 내야 하나요?"
"무슨 물값입니까?"
"골트 상단에서 매달 거뒀어요. 물이 안 나와도 수문 유지비라면서요. 못 내면 밭을 가져간다고 했습니다."
로잘린이 종이를 받아 보았다. 하나는 상단의 수세 영수증이었다. 다른 하나는 벨리아령 명의의 체납 독촉장이었다.
"이 밭은 이미 상단에 넘어갔군요."
"봄에 넘겼어요. 아이 먹일 곡식값을 빌린 대신에요. 그런데 세금은 아직 제 이름으로 와요. 상단에도 물값을 냈는데요."
물은 막혔다. 물값은 나갔다. 땅은 빼앗겼다. 땅세는 계속 원래 주인에게 왔다.
로잘린이 조금 전에 마음속에 그었던 선이 무너졌다. 공동 물통에 물이 찬들 저 여인의 밭이 비어 있고 세금 고지서가 쌓이면 마을은 텅 비게 된다. 빈 마을 옆에 혼자 감자를 심어 봐야 심을 사람도 먹을 사람도 남지 않는다.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원본은 가지고 계세요. 제가 내용과 번호를 적고 마르셀이 확인하게 하겠습니다."
여인은 경계하는 얼굴로 이름을 말했다. 로잘린은 두 종이의 날짜와 금액, 수령인, 봉인 모양을 따로 적었다. 마르셀은 독촉장 인영을 얇은 종이에 베낀 뒤 기록을 소리 내어 확인했다.
"오늘 이후로 상단이 수세를 강제로 걷거나 체납을 이유로 밭을 넘겨받으려 하면 영주 저택으로 오세요. 감찰 종료 때까지 강제 징수를 멈추겠습니다. 이미 낸 돈도 장부와 대조하겠습니다."
"돌려받을 수 있나요?"
"대조가 끝나야 확정할 수 있습니다. 대신 기록이 사라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여인은 종이를 도로 받아 품에 넣었다. 막연한 약속보다 제 손에 남은 영수증이 든든한 모양이었다.
칼릭스가 로잘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빚을 지워 주면 되지 않나. 짐이 명하면 된다."
"그렇게 하시면 상단의 가짜 채권과 영민의 진짜 세금까지 한 덩어리가 됩니다. 누가 얼마를 훔쳤는지 못 찾습니다."
"그래서 또 장부인가."
"네. 불행히도 제 퇴직금도 장부에 달렸습니다."
"무슨 뜻이지?"
"이 사람들 모두 떠나면 제 감자밭 옆에 물길을 봐줄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혼자 수문까지 관리하면서 은퇴해야겠습니까?"
칼릭스는 물통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보았다. 로잘린이 말해 온 은퇴가 한 사람의 침상과 닭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처음 실물로 보는 얼굴이었다.
오후가 되자 로잘린은 영주 저택 집무실에 임시 지시서를 펼쳤다.
첫째 수문은 미라의 감독 아래 제한 개방. 둘째와 셋째 수문은 근위대 입회 없이 조작 금지. 훼손 부위와 사설 취수로는 그림으로 남긴다. 상단의 수세 징수와 체납을 빌미로 한 토지 이전은 감찰 종료까지 정지.
"수로 보수에는 석공과 목재가 필요합니다. 인력도요."
미라가 말했다.
"영민을 무보수로 부르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사람 수와 작업 일수를 적어 주세요. 근위대가 경비를 맡고 임금은 현지 감찰 경비에서 우선 지급하겠습니다. 이후 상단 재산에서 환수할 수 있는지는 감사로 확인하죠."
로잘린은 마르셀에게 주민 영수증과 압수 장부를 대조할 담당자를 배정해 달라고 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떠안으면 또 쓰러질 것이었다. 그녀가 수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미라가 수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에 놓인 마지막 종이는 오전에 창고에서 압수한 출입 기록이었다. 로잘린은 날짜를 훑다가 손을 멈췄다.
바르토가 저택을 점거한 뒤에도 전임 영지 대리인 명의로 수문 출입이 승인되어 있었다. 주민의 독촉장에서 베낀 인영도 그 승인란의 것과 닮았다. 독촉장의 날짜는 불과 사흘 전이었다.
"대리인이 도망친 지 여덟 달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마르셀이 답했다.
로잘린은 인영 기록과 출입 대장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인장이 쓰였는지는 원본 대조가 필요했다. 분명한 것은 오래 비운 대리인의 이름으로 지금도 일이 처리된다는 점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봉인하고 내일 아침 원본 대장과 맞춰 보죠."
칼릭스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더 조사하지 않겠다고?"
"쉬어야 내일도 일을 합니다. 그리고 혼자 해치우면 또 저만 못 떠납니다."
로잘린은 탁자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는 마을 공동 물통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문 옆에 붙일 현장 공고의 첫 줄을 다시 읽었다.
벨리아령 수세와 토지 체납 강제 집행, 감사 종료 시까지 정지.
물길은 겨우 하나 열렸다. 그러나 다른 둘을 막아 둔 손과 사라진 대리인의 인장을 찍는 손이 같은지 알아내기 전에는 이곳에서 느긋하게 닭을 키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