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14화: 휴가는 출장이 아닙니다
황궁 중앙 복도의 황실 공보판 앞은 이른 아침부터 관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붉은 비단 위로 황제의 옥새가 찍힌 긴급 칙령이 나부꼈다.
칙령 제41호: 황제 직속 특별 행정 순행에 관한 건.순행지: 동부 벨리아령 및 인근 군사 관구.수행 총괄: 황제 수석 보좌관 겸 특별 행정 감찰단장 로잘린 폰 벨리아.
문관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동부 벨리아령? 거긴 동쪽 끄트머리에 처박힌 벽지 아닌가?"
"농지도 척박하고 수로도 막혀 세금조차 안 걷히는 곳인데 폐하께서 왜 가신다는 거지?"
"수행 총괄이 로잘린 보좌관님이야. 감찰단장이 직접 뜬다는 건 동부 관료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뜻 아닌가?"
복도 한구석에서 공보판을 보던 에드먼드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서류철을 쥐었다.
"단장님, 정말로 칙령이 내려왔습니다."
로잘린은 칙령의 활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집무실 책상 위에 검토 도장만 찍혀 있던 안건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정식 칙령으로 둔갑해 온 황궁에 공표되어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속이 타들어 갔다.
'휴가를 신청했더니 황실 공식 순행이 되어 돌아왔다고?'
자신이 원했던 것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닭을 치고 감자를 심는 평화로운 안식이었다. 황궁의 결재 서류와 폭군 황제에게서 벗어나 사람답게 누워 자는 두 달간의 유예였다.
그런데 그곳으로 황제가 직접 행차를 하겠단다. 그것도 자신을 수행 총괄로 앞세워서.
감찰단 사무실로 돌아오자 감시병의 경계를 받던 이사벨 드 몬테르가 고개를 들었다.
"소문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동부로 직접 내려가신다면서요? 하필이면 벨리아령이라니, 썩은 내가 진동하는 늪에 발을 들이시는군요."
이사벨이 서류철 하나를 탁자 위로 밀었다.
"벨리아령은 세금 체납이 누적되었고 수문 세 곳이 모조리 폐쇄되었습니다. 심지어 영지 대리인은 여덟 달 전 사직서를 던지고 잠적했지요. 그곳은 행정이 완전히 마비된 무법지대입니다. 폐하께서 가시면 피바람이 불 테고 단장님은 그 피를 닦느라 단 하루도 쉬지 못할 겁니다."
조용히 닭을 키우고 감자를 캘 낙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벨리아령은 당장 처방을 내리지 않으면 무너질 빚더미였다.
화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머릿속 계산기는 차갑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사가 강제로 떠넘긴 지방 출장은 직장인에게 최악의 재앙이다. 하지만 그 재앙을 공짜로 받아주는 순간 직장인은 영원한 노예가 된다.
로잘린은 서랍에서 정식 공문서 양식을 꺼냈다.
"이안 부단장, 수도 감찰단 총괄 직무 대리 서류를 작성하세요.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1차 결재권을 완전히 행사합니다."
"예, 단장님."
"에드먼드는 중앙 기록 보존함의 원본 대장을 삼중 봉인하고 매일 일몰 전 변동 내역을 암호 전표로 저에게 발송하세요. 그리고 이사벨 국장님."
로잘린의 서늘한 시선이 이사벨에게 닿았다.
"우리가 황궁을 비우면 재무부 개편 초안을 훔쳐보려 했던 내부자가 반드시 다시 움직일 겁니다. 미끼 결재선 열람 로그를 감시하세요. 수상한 접근이 발생하면 즉시 기록패에 덫을 놓으십시오."
이사벨이 희미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지독하게 실무적이시군요. 좋습니다."
로잘린은 백지 명령서 한 장을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에 다녀오겠습니다. 폐하께 출장비 청구서를 내밀어야 하니까요."
황제 집무실 문이 열리자 방 안의 서늘한 기운이 일순간 멎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칼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왔군, 로잘린."
"폐하."
로잘린은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정중했으나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칼릭스는 탁자 위에 놓인 칙령 사본을 가리켰다.
"공보판을 보았겠지. 동부 벨리아령은 세금이 체납되었고 수문이 닫혔으며 대리인은 도망쳤더군. 그런 곳에 너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영지의 기강을 바로잡고 네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짐이 직접 가기로 했다."
자못 당당한 군주의 어조였으나 로잘린은 속지 않았다.
이것은 순행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집착이자 도망치려는 부하를 감시망 안에 가두려는 꼼수에 불과했다.
"폐하, 벨리아령의 행정 붕괴는 중앙 부처의 직무유기입니다. 현지 감찰관을 파견하면 될 일이지 국가 원수께서 직접 행차하실 사안이 아닙니다."
"짐이 내린 결정이다. 황제의 행차를 신하가 가로막을 셈인가?"
칼릭스의 눈동자가 가라앉으며 미세한 마력이 공기를 짓눌렀다. 하지만 로잘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로막지 않습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명칭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동행하시는 순간 제가 신청했던 '귀향 휴가'는 소멸했습니다."
로잘린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황제가 행차하고 감찰단장이 동행하는 일정은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황실 특별 감찰 출장'입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서류 위로 떨어졌다.
동부 벨리아령 특별 순행 수행 및 현지 감찰 조건부 명령서.
칼릭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출장이라니. 짐과 함께 가는 것이 그리도 고역인가?"
"고역인 정도가 아닙니다. 상사와 함께 떠나는 출장은 모든 관료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습니다. 폐하와 함께 가는 이상 저는 마차 안에서도 결재를 해야 하고 영지에 도착해서도 수습하느라 잠을 잘 수 없을 겁니다. 그게 어찌 쉼입니까? 강제 노동의 연장선이지요."
칼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로잘린을 묶어두려 할 때마다 그녀가 과로로 쓰러졌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릭스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도권이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로잘린은 탁자 위의 명령서를 가리켰다.
"출장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우와 규칙을 세워 주십시오. 이 명령서에 폐하의 옥새를 찍어 주셔야만 저는 마차에 오를 겁니다."
"조건을 말해라."
"첫째, 출장 수당 및 특수지 위험 수당 지급입니다. 황실 내탕금 기준 일반 파견 수당의 세 배를 일일 단위로 책정해 주십시오. 영지에 머무는 동안 매일 황실 금고에서 지급되어야 합니다."
"짐의 곁에 있는 것이 위험 수당을 받을 만큼 험지라는 뜻인가?"
"폐하의 마력이 흔들릴 때마다 제 심장도 함께 흔들립니다. 충분히 위험합니다."
로잘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칼릭스는 기가 찬 표정이었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좋다. 수당은 내탕금에서 지급하지. 다음은?"
"둘째, 이동 중 및 현지 체류 중의 엄격한 노동 시간 제한입니다. 마차 안에서의 업무는 하루 최대 4시간을 넘길 수 없으며 정오 이전 대면 보고 금지와 야간 호출 금지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루 여섯 시간의 수면과 식사 시간도 침해할 수 없습니다."
"마차 안에서조차 짐을 피하겠다는 건가?"
"마차 안에서도 일을 시키실 생각이었습니까?"
로잘린의 서늘한 물음에 칼릭스는 시선을 돌렸다. 실제로 마차에 서류함을 가득 싣고 갈 생각이었던 속내가 들통난 탓이었다.
"……수락한다. 다른 것은?"
"셋째, 벨리아령 현지 행정 쇄신에 대한 감찰단장의 독립 전권 보장입니다. 부패가 발견되더라도 즉결 처형 대신 감찰단의 법적 절차를 우선해야 합니다. 수로를 정비하고 세금 제도를 개편하는 행정 실무는 제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겠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부패를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피를 흘리면 땅만 오염되고 세금은 사라집니다. 행정의 문제는 행정으로 풀어야 합니다."
칼릭스는 로잘린을 응시했다. 자신의 폭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여인이었다.
"좋다. 행정 권한을 넘기지. 그것이 끝인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조항이 남았습니다."
로잘린은 서류 하단의 굵은 문장을 가리켰다.
넷째, 벨리아령의 행정 정상화 및 감사 종료 즉시 황제는 근위대와 함께 수도 황궁으로 복귀한다. 이후 로잘린 폰 벨리아는 원래 신청했던 두 달간의 온전한 귀향 휴가를 개시하며 황제는 이에 일절 개입할 수 없다.
집무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칼릭스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였다.
"짐을…… 쫓아내겠다는 말이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을 통치하셔야 하고 저는 빼앗긴 휴가를 누려야 하니까요. 출장이 끝났는데도 상사가 휴가지에 눌러앉아 있으면 그건 휴가가 아니라 감금입니다."
"로잘린!"
"거부하신다면 보좌관 직무 정지를 요청하고 병가를 내겠습니다. 어제 베르딘 경이 작성한 진단서를 잊지 않으셨겠지요? 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폐하의 순행을 수행할 의무는 없습니다."
완벽한 논리와 합법적인 방패였다. 칼릭스는 주먹을 쥐었다. 손끝에서 요동치던 마력은 로잘린의 단호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흩어졌다. 그녀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순간 영원히 마음을 닫아버릴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며 책상 위의 옥새를 쥐었다.
묵직한 붉은 옥새가 명령서 하단에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서명했다. 이제 만족하는가?"
"현명한 결단이십니다, 폐하. 그럼 내일 아침 출발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로잘린이 뒤돌아 나서는 순간 칼릭스가 등 뒤에서 낮게 덧붙였다.
"기억해라. 정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너는 짐의 곁에 있어야 한다."
"예, 폐하. 그러니 최대한 신속하게 끝내드리겠습니다."
로잘린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음 날 새벽 황궁 중앙 정문은 출정을 방불케 하는 순행 행렬로 장관을 이루었다.
철갑을 두른 황실 근위 기사들이 도열했고 황제의 흑철 마차 바로 뒤편에는 로잘린을 위해 특수 개조된 감찰단 전용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단장님, 요청하신 물품들을 전부 실었습니다."
마르셀 시종장이 마차 문을 열었다. 안에는 고정식 책상과 양털 담요가 깔린 침상, 베르딘의 피로 회복용 탕약과 고급 홍차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고마워요, 마르셀 시종장님."
"폐하의 엄명이셨습니다. 보좌관님의 안락함을 해치는 자는 마차 바퀴 밑에 던져버리겠다고 하셔서요."
마르셀이 무표정하게 살벌한 진실을 전했다. 마차 앞에는 이안과 에드먼드가 배웅을 나와 있었다.
"단장님, 수도의 일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장부의 일점일획도 놓치지 않고 지키겠습니다."
"믿어요, 에드먼드. 무리하지 말고 정해진 업무 시간만 지키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안 역시 묵직한 고갯짓으로 화답했다.
"재무부 개편안 관련 동향도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로잘린이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묵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대한 흑마가 다가왔다. 칠흑 같은 갑주를 입고 붉은 망토를 두른 칼릭스였다. 황제는 마차 대신 직접 말을 타고 행렬의 선두에 서 있었다.
칼릭스의 붉은 시선이 로잘린에게 닿았다.
"출발 준비는 끝났는가."
"예, 폐하. 계약 조항에 따라 정오 이전까지는 대면 결재를 올리지 않겠습니다."
로잘린이 깍듯하게 대답하자 칼릭스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철저하군."
"철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칼릭스는 고개를 돌리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출발한다! 동부로 향한다!"
나팔 소리가 새벽하늘을 갈랐고 마차 바퀴가 거대한 황궁 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로잘린은 푹신한 침상에 몸을 기댔다.
'휴가가 출장으로 둔갑해 버렸지만…….'
로잘린의 눈동자에 서늘한 결의가 차올랐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영지라면 도망치는 대신 완벽하게 뜯어고쳐 주리라. 황실의 돈과 권력을 최대한 뜯어내 수로를 뚫고 상단을 갈아엎어 가장 안락한 은퇴의 낙원을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영지가 정상화되는 날 계약서대로 황제를 수도로 쫓아내고 당당하게 사표를 던질 것이다.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부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과로에 찌든 보좌관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