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8화: 전진 요새
"도착까지 39분 14초."
카이론의 건조한 음성이 초소 천장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지한은 망설이지 않고 대기실 안쪽 무기고 격벽으로 걸어갔다. 결합된 1·2단계 백검 현장 키를 벽면 슬롯에 밀어 넣자 두꺼운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치이익.
백 년 동안 갇혀 있던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조명이 켜지자 벽면 랙에 도열한 구시대 연방의 보급 상자들이 드러났다.
대부분은 산화되어 굳어 있었지만 밀폐 챔버 한 칸만은 온전했다. 표면에 희미한 녹색 표시등이 살아 있었다.
[제4특수작전대 예비 교체 프레임][규격: 4세대 전술 근접 자산 외장 상지]
챔버 덮개를 제쳐 내자 짙은 무광 검은색의 합금 전완 프레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티타늄 골격과 탄소 섬유가 촘촘하게 얽힌 군용 규격이었다.
지한은 정비대로 돌아와 에바의 곁에 섰다. 에바의 우측 보조 팔은 파수꾼의 해머를 막아내느라 피복이 뜯겨 나가고 내부 구동 케이블이 절단된 채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보조 팔 마운트를 분리한다. 통증 피드백을 차단해."
"감각 차단 루프는 기동 효율을 저하시킵니다. 감각을 켠 채로 작업하십시오. 견딜 수 있습니다."
"아픈 걸 참는 건 자랑이 아니야. 불필요한 부하를 줄이는 게 정비의 기본이다."
지한은 신경 감쇠 코드를 밀어 넣은 뒤 전동 렌치를 집어 들었다.
위잉.
타버린 고철 의수가 회전 핀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한은 4세대 전술 합금 프레임을 조인트에 밀착시켰다.
철컥!
골격 결합 래치가 닫혔다. 지한은 초소의 예비 컨디셔너 모듈을 에바의 흉부와 신형 전완에 동시 직결했다.
푸슈우욱.
고순도 절연 냉각액과 농축 에너지 셀 촉매가 튜브를 타고 에바의 전신 회로로 흘러 들어갔다.
바이오 셀 안정화율 98%.출력 7%... 14%... 21% 도달.
에바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낮고 묵직한 구동음이 울렸다. 과열로 달아올랐던 흉부 반응로가 차분한 은청색 빛을 되찾았다.
새로 장착된 검은색 합금 손가락이 유연하게 주먹을 쥐었다. 관절 모터가 만들어 내는 미세한 금속성 파음이 공기를 갈랐다.
"신경 전달 지연 시간 0.002초. 기존 임시 프레임 대비 반응 속도 340% 향상되었습니다."
"네 원래 규격에 맞춘 군용 정품이니까."
지한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웃었다.
"이제 한쪽 팔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겠군."
에바는 검은 합금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지한을 바라봤다. 무기물에 불과했던 눈동자에 형언하기 힘든 깊은 빛이 감돌았다.
"이 손으로 지한을 지키겠습니다."
"지키는 건 나중이고 살아남는 게 먼저다. 아직 30분 남았어."
지한은 곧장 대기실 중앙에 굳어 있는 불워크 파수꾼에게로 걸어갔다.
"파수꾼의 기본 교전 규칙을 뜯어고쳐야 해."
지한은 파수꾼의 점검 슬롯에 결합된 백검 현장 키를 물리고 아르케 화면을 두드렸다.
3미터에 달하는 강철 괴물은 여전히 녹색 대기 모드로 침묵하고 있었다.
"이 녀석의 원래 프로그램은 초소 내부로 들어온 침입자를 분쇄하는 루프야. 하지만 놈들은 밖에서 수송선을 몰고 온다. 안에서 기다리면 초소 문이 먼저 뜯겨."
카이론이 계산 결과를 띄웠다.
"파수꾼의 사격 통제 컴퓨터는 단독 방어용입니다. 아군 식별 대역이 좁아 한도윤 대장과 방위대원을 오인 사격할 확률이 41%입니다."
"그 확률을 0으로 만든다."
지한은 아르케의 패치 도구로 파수꾼의 피아 식별 라이브러리를 강제로 리셋했다. 아이언 헤이븐 방위대의 무전 암호 대역과 에바의 식별 신호를 '최우선 아군 보호 대상'으로 박아 넣었다.
동시에 파수꾼 가슴팍의 보조 산탄포 조준 링크를 분리했다.
"피포, 이리 와."
피포가 맑은 기계음을 내며 지한의 어깨 위로 날아앉았다. 지한은 피포의 광학 타겟팅 모듈과 파수꾼의 산탄포 컨트롤러를 초소 무선망에 직렬로 묶었다.
"이제 피포가 레이저를 찍는 곳이 파수꾼의 조준선이 된다."
[사격 통제망 재구성 완료][표적 유도 권한: 피포 이관][주 목표: 접근 협곡 방어선 사수]
쿵!
파수꾼이 거대한 두 발을 내딛으며 오른손의 암반 분쇄 해머를 바닥에 찍었다. 센서에 확고한 푸른빛이 차올랐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한도윤이 외쳤다.
"지한! 북서쪽 하늘에 엔진 열원이 잡혔다!"
윤세라의 통신도 이어졌다.
"지한, 세라야! 방금 아이언 헤이븐 북문에서 후방 차폐 격벽 보강 자재를 실은 수송조가 출발했어! 놈들이 초소를 뚫고 내려오면 북문 전체가 고립돼. 협곡에서 막아야 해!"
"걱정 마십시오. 절대 못 지나갑니다."
지한은 제1 접근문 앞 좁은 협곡 바닥으로 뛰어나갔다. 바위투성이 길목 아래로 깔려 있던 초소의 고압 전력 케이블 트레이를 해머 끝으로 뜯어냈다.
지한은 초소 보조 발전기의 고전압 라인을 케이블 트레이에 직결했다.
"카이론, 놈들이 협곡 중앙 킬존에 진입하면 전압을 3000볼트로 튕겨 올려."
"유도 펄스 트랩 장전 완료. 침입자의 구동 관절을 즉시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준비가 끝난 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로터 소리와 함께 협곡 상공의 먼지구름을 뚫고 잿빛 비행체가 나타났다. 네오 오더의 강습 수송선이었다.
수송선은 착륙하지 않고 초소 상공 30미터에서 정지 비행하며 하부 해치를 열었다.
쿵! 쿵! 쿵!
금속 덩어리들이 협곡 바닥으로 낙하했다. 거미 다리를 번뜩이는 고기동 드로이드, 하베스터 스캐빈저 네 기였다. 그 뒤로 중화기 강습병들이 뛰어내렸다.
백검 키 신호 및 E.V.A.-004 회수 개시.저항 병력 전원 파괴.
강습병들의 헬멧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 합성음이었다.
카이론이 경고창을 띄웠다.
"네오 오더 전술 링크에 인공지능 하위 침투 신호가 감지됩니다."
"마더 노드의 입김이 닿아 있군."
타타타탕!
수송선 하부의 기관총 포탑이 초소 정면을 향해 불을 뿜었다. 초소 상부 진지의 한도윤과 방위대원들이 방패를 세우며 응사했다.
"사격 개시! 방폭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하베스터 스캐빈저들이 거미 다리를 놀리며 협곡 길목으로 돌진했다. 앞발의 고주파 드릴이 바위를 갈아엎었다. 초소 문을 통째로 뚫어버릴 기세였다.
"지한, 놈들이 들어옵니다!"
에바가 신형 전술 합금 팔을 앞세우며 도약하려 했다.
"아직이야. 1초만 기다려!"
지한은 스캐빈저 네 기가 바닥 케이블 트레이 위로 올라탄 순간을 포착했다.
"지금이다, 카이론! 전압 방출!"
콰지지직!
노출된 케이블에서 푸른빛 고전압 펄스가 폭발했다. 역위상 전류가 스캐빈저들의 관절 모터를 직격했다.
끼이익!
스캐빈저 네 기의 다리가 굳어버리며 협곡 바닥에 처박혔다.
"피포! 찍어!"
피포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타겟팅 레이저를 바닥에 꽂았다. 붉은 조준선이 스캐빈저들의 동력 코어에 십자선을 그렸다.
쿠웅!
초소 문 안쪽에서 불워크 파수꾼이 튀어나왔다. 파수꾼의 가슴 장갑이 열리며 산탄포가 피포의 레이저를 따라 각도를 틀었다.
콰아아앙!
산탄 덩어리가 굳어 있던 스캐빈저들을 덮쳤다.
퍼엉! 퍼어엉!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스캐빈저 세 기가 한순간에 고철로 분해되었다. 남은 한 기도 다리가 날아간 채 바닥을 긁었다.
"저 녀석이 사격을 연동했다고?"
상부 진지의 한도윤이 탄성을 터뜨렸다.
선발대가 무너지자 수송선의 메인 해치에서 가장 거대한 기체가 떨어졌다.
쿠우우웅!
높이 4미터에 달하는 중장갑 보행 병기, 아이언 브루트였다. 두꺼운 전면 장갑 위로 붉은 나노 문양이 꿈틀거렸고 오른팔에는 거대한 나노 절단 도끼가 달려 있었다.
위이이잉!
도끼날에 녹색 플라스마가 타올랐다.
방해물 배제. 정문 강제 돌파.
아이언 브루트가 육중한 무게로 협곡을 가르며 돌진했다.
콰앙!
아이언 브루트의 나노 도끼가 파수꾼의 전면 장갑을 강타했다.
쇳소리와 함께 불워크 파수꾼의 흉부 장갑판이 쪼개져 나갔다. 3미터의 거구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긁었다.
"파수꾼 장갑 45% 손상! 다음 일격을 버티지 못합니다!"
아이언 브루트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때 파수꾼의 푸른 센서가 번뜩였다. 파수꾼은 물러서는 대신 앞으로 파고들었다. 왼팔의 거대한 방패로 도끼자루를 들이받아 타격점을 비틀었다.
쿠웅!
도끼날이 빗나가며 협곡 절벽을 찍었다.
동시에 파수꾼의 암반 분쇄 해머가 회전했다.
위이이잉! 쾅!
해머가 아이언 브루트의 무릎 관절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유압 실린더가 터져 나가며 브루트의 거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지금입니다, 에바!"
피포의 레이저가 브루트의 목덜미 아래 장갑 틈새를 비췄다.
스팟!
지면을 박찬 에바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출력이 21%로 회복된 그녀의 움직임은 이전과 달랐다. 잔상을 남기며 에바는 브루트의 어깨 위로 착지했다.
4세대 전술 합금 프레임으로 강화된 검은 오른팔이 벼락처럼 뻗어 나갔다. 손끝의 전자기 단검이 장갑 틈새의 나노 제어선 다발에 깊숙이 박혔다.
푸쉬이익!
에바는 단검을 비틀며 아르케와 동기화된 차단 파형을 중추 코어로 쏟아부었다.
"명령 수신 거부. 회로 영구 분리."
치지직! 펑!
아이언 브루트의 붉은 나노 문양이 일제히 꺼졌다. 거대한 동체가 맥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쿵!
협곡을 울리던 소음이 멎었다.
상공의 수송선이 다급하게 터보팬의 각도를 뒤로 꺾었다. 주력 병기가 단숨에 쓰러지자 잔여 병력을 버려둔 채 급선회했다.
슈우우우웅!
수송선은 검은 매연을 뿜으며 북서쪽 고철 야적장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겼다...!"
초소 상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한도윤도 소총을 내린 채 쓰러진 아이언 브루트와 그 위의 에바를 멍하니 바라봤다.
지한은 브루트의 조종석 해치를 전자기 해머로 뜯어냈다. 내부의 지휘 통신 단말기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아르케를 단말기에 연결하자 도주한 수송선과 야적장 사이에 오간 통신 패킷이 쏟아졌다.
최상단에 붉게 점멸하는 문장이 박혀 있었다.
[마더 노드 글로벌 재동기화 활성률: 4.1%][강제 집행 명령: 제17 야적장 잔여 병력 총동원][목표: 백검 현장 키 회수 및 센트럴 코어 심층 봉인 해제]
카이론이 경고를 띄웠다.
"지휘관의 통신 채널에 마더 노드의 직접 명령 코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마더 노드의 수족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활성률 4.1%. 수치는 조금씩 올랐지만 파급력은 이미 인간 세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한도윤이 지한의 곁에 섰다.
"초소가 완전히 살아났군. 이제 여긴 요새의 북쪽을 지키는 철벽의 방패다."
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센트럴 코어로 이어지는 안쪽 차폐 격벽을 바라봤다.
"네. 하지만 수비만으로는 끝낼 수 없습니다."
지한은 결합된 두 개의 백검 현장 키를 쥐었다.
"놈들이 총동원령을 내렸다면 본대가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센트럴 코어로 들어가야 합니다."
초소 너머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정비사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기계들은 굳건히 대지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