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7화: 두 번째 현장 키
제1 접근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것은 백 년 묵은 냉각 가스와 기름 냄새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센서 세 쌍이 번뜩였다. 높이 3미터에 달하는 강철 프레임이 바닥 그레이팅을 짓이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구시대 연방 기지 방위용 3세대 중장갑 기체, 불워크 파수꾼이었다.
오른팔에는 암반 분쇄 해머가 달려 있었고 가슴팍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전자음이 터져 나왔다.
E.V.A.-004 수신 확인.미승인 이탈 자산 제압 절차 개시.외부 강제 송신까지 00:00:08.
파수꾼의 유압 실린더가 비명을 지르며 팽창했다. 묵직한 쇳덩이가 지한과 에바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물러서십시오!"
에바가 앞을 막으려 했다. 지한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며 옆 통로로 밀쳐냈다.
"출력 9%로 맞설 상대가 아니야!"
동시에 피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전방 렌즈에서 고출력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번쩍! 번쩍!
파수꾼의 주 광학 센서가 과광량에 반응해 조리개를 닫았다. 돌진 궤적이 빗나가며 거대한 해머가 대기실 좌측 차폐벽을 후려쳤다.
쿠웅!
벽면 철판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지고 불꽃이 튀었다.
그 충격 속에서도 파수꾼의 관절은 지한 쪽으로 틀어졌다. 센서가 꺼져도 바닥에 흐르는 금속 진동을 읽고 있었다.
지한은 허리춤의 전자기 해머를 양손으로 쥐었다. 그는 파수꾼의 장갑 대신 바닥 케이블 트레이 덮개를 내리쳤다.
쾅!
역위상 유도 전류가 케이블을 타고 바닥 접지선을 훑었다. 강한 전자석 펄스가 파수꾼의 하부 서보 모터를 강타했다.
지지직!
육중한 두 다리가 굳었다. 1초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지한에게는 충분했다.
"에바, 중앙 릴레이 콘솔로 붙어!"
지한은 굳어버린 파수꾼의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대기실 한가운데 원통형 통제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기둥 중앙 단말에는 검은색 변조 슬리브가 덧씌워진 백색 세라믹 부품이 꽂혀 있었다.
미등록 백검 현장 키.
키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전류가 송신 안테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외부 강제 송신까지 00:00:04.
카운트다운 숫자가 붉은 피처럼 번뜩였다.
"카이론! 송신 큐 경로 읽어!"
지한이 아르케 탐침을 단말 측면 포트에 찔러 넣었다. 통신 칩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쏟아졌다.
"초소 외부 송신선이 17번 고철 야적장과 네오 오더 통신망에 물려 있습니다. 패킷에는 아이언 헤이븐 발전기 좌표와 E.V.A.-004 식별 코드가 들어 있습니다."
"강제로 뽑으면?"
"트랩 회로가 즉각 방전되어 잔여 전력 전체를 긴급 송신 펄스로 전환합니다. 뽑는 순간 좌표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뽑지 않고 묶는다."
지한은 절연 하우징에 담긴 1단계 현장 키 조각을 꺼냈다. 세라믹 표면의 홈들이 단말에 꽂힌 2단계 키와 정확히 맞물리는 구조였다.
"연방 제4특수작전대 현장 감독관이 쓰던 상위 키다."
뒤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바닥 전류를 털어낸 파수꾼이 관절을 꺾으며 콘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체의 가슴 장갑이 열리며 보조 산탄포의 총열이 드러났다. 거리는 고작 5미터였다.
"지한!"
에바가 갈라진 임시 의족을 박차며 날아들었다. 그녀는 손상된 보조 팔을 뻗어 산탄포 총구를 위로 쳐올렸다.
타앙!
산탄 덩어리가 천장 배관을 꿰뚫으며 냉각수가 비처럼 쏟아졌다. 반동으로 에바의 보조 팔 피복이 찢어졌다.
E.V.A.-004 바이오 셀 출력 6%.
에바의 안광이 잘게 흔들렸다.
"출력이 급락하고 있습니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딱 3초만 버텨 줘!"
지한은 1단계 키 하우징의 도선을 2단계 키의 접속 핀에 직렬로 감았다. 아르케 화면에 두 개의 위상 그래프가 겹쳐졌다.
주파수가 어긋나며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서로 다른 암호화 계층이 충돌하고 있었다.
"에바! 네 코어 동기화 신호가 필요해!"
에바가 왼손을 콘솔 금속판에 내리꽂았다. 가슴 중심부에서 은백색 전류가 흘러나와 단말선으로 스며들었다.
치지직!
지한의 손목을 타고 아르케의 역류 전압이 파고들었다. 뼈마디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턱을 악물었다.
"카이론! 송신 헤더를 초소 내부 폐쇄 루프로 돌려!"
"헤더 바이패스 실행. 루프 밀폐 100% 완료!"
철컥!
두 개의 백색 세라믹 키가 하나로 결합하며 푸른빛을 토해 냈다. 단말 화면의 붉은 카운트다운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위로 고대 연방의 녹색 텍스트가 떠올랐다.
[화이트 소드 비상 규정 44조 원본 서명 복원][식별 코드: E.V.A.-004 / 전술 지휘 자산 정상 확인][원천 명령: 상위 오염 지휘망 영구 단절 및 현장 자율 방어 인계]
에바의 안광이 크게 확장되었다.
인격 코어를 백 년 동안 옭아매고 있던 탈주 자산이라는 족쇄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에바는 부대를 배신한 고철이 아니었다. 상위 지휘망이 마더 노드의 나노 오염에 잠식당했을 때 끝까지 방어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통신을 끊었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외부 송신은 차단되었지만 파수꾼의 물리적 공격 루프는 멈추지 않았다.
파수꾼은 콘솔 전체를 짓뭉개기 위해 양손으로 분쇄 해머를 번쩍 치켜들었다. 모터가 회전하며 해머 끝의 초경합금 팁이 고속으로 돌았다.
위이이잉!
단말과 지한을 한 번에 갈아 마실 수 있는 궤적이었다.
"물러나십시오!"
에바가 지한의 앞을 가로막으며 보조 팔의 내부 케이블을 끌어당겼다. 프레임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해머 자루를 측면에서 낚아챘다.
끼기긱!
초경합금 해머의 회전력이 에바의 외피를 갉아먹으며 쇳가루가 쏟아졌다.
에바의 임시 의족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관절에서 흰 연기가 치솟았다.
바이오 셀 출력 4%. 임계 도달.
"에바! 놔!"
"놓으면 지한이 사망합니다. 놓지 않습니다."
에바의 목소리는 파들거렸지만 손가락은 해머 자루를 부러뜨릴 듯 쥐고 있었다.
피포가 허공에서 급선회하며 파수꾼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레이저 조준선이 파수꾼 목덜미 아래 두꺼운 장갑판 틈새를 가리켰다.
삐-! 삐-!
냉각 루버가 열리며 붉은 열기를 뿜어냈다. 그 깊숙한 틈새에 비상 점검 슬롯이 숨겨져 있었다.
지한은 바닥을 구르며 파수꾼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전자기 해머 대신 아르케의 가느다란 점검 탐침을 움켜쥐었다. 탐침 끝에는 복원된 2단계 현장 키의 승인 코드가 흐르고 있었다.
"부수지 않는다."
지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도 네 임무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니까."
지한은 탐침을 냉각 루버 틈새로 찔러 넣었다.
투둑!
점검 슬롯의 핀들이 아르케의 접점과 맞물렸다. 지한은 아르케 상단의 수동 오버라이드 스위치를 끝까지 밀어 올렸다.
[현장 감독관 권한 승인][비상 규정 44조 연동 / 아군 전술 자산 재분류][표적 지정 해제 및 긴급 대기 모드 진입]
파수꾼의 거대한 몸집이 파르르 떨렸다.
회전하던 해머 모터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멈춰 섰다.
기체의 붉은 안광이 일제히 꺼졌다. 3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차분한 녹색 표시등이 점등했다.
치이익-.
압축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파수꾼은 양팔을 늘어뜨린 채 직립 대기 자세로 굳어졌다.
에바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지한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의 화상 부위가 욱신거리며 맥박을 쳤다.
에바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출력을 소진한 프레임이 쓰러지려는 찰나 지한이 몸을 던져 그녀를 받아냈다.
차가운 장갑판 너머로 에바의 가슴속 코어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지한... 목표를... 달성했습니까."
"그래. 완벽하게."
지한은 에바를 바닥에 눕히고 얼굴에 묻은 쇳가루를 털어냈다.
쿵.
대기실 안쪽의 차폐 격벽이 위로 솟아올랐다.
안쪽에는 먼지 쌓인 군용 콘솔들과 함께 연방의 정비 랙이 보존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은빛으로 봉인된 원통형 장치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카이론의 분석창이 떠올랐다.
"초소 비축 물자 확인. 고순도 절연 냉각액 및 4세대 군용 바이오 셀 정제 컨디셔너 모듈 2기입니다. E.V.A.-004의 영구 손상을 방지할 수 있는 설비입니다."
지한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래. 고칠 수 있어."
지지직.
먹통이었던 외부 통신 채널에서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 에바! 들리나? 북문 외곽 관측선이다!"
한도윤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살아 있습니다. 초소 내부 상황 종료됐어요."
지한이 무전기를 쥐고 답했다. 통신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접근문 밖에서 군화 소리가 울리더니 한도윤과 방위대원 둘이 소총을 겨눈 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광경은 파괴의 잔해가 아니었다.
녹색 표시등을 깜빡이며 대기 중인 거대 파수꾼과 그 아래에서 차분하게 랙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는 정비사의 모습이었다.
한도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불워크 파수꾼? 이걸 안 부수고 세워 뒀다고?"
"변조된 규칙만 걷어냈습니다. 원래 우리 편을 지키던 녀석이니까요."
지한은 랙에서 꺼내온 컨디셔너의 투명 튜브를 에바의 흉부 주입구에 결속했다.
푸슈욱.
투명한 절연 냉각액이 에바의 코어 내부로 스며들자 과열되었던 흉부 장갑이 원래의 짙은 회색으로 되돌아왔다.
바이오 셀 출력 4%... 5%... 7% 안정화 진행 중.
에바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붉은 안광이 지한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체온 정상화. 코어 붕괴 위험 해제되었습니다."
에바는 부러진 보조 팔을 가슴에 얹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한."
건조한 보고체였지만 그 음색에는 미세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한도윤이 총구를 내리고 지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굳은살 박인 손을 내밀었다.
"내가 틀렸다. 너희는 요새의 재앙이 아니라 방패였어."
지한은 한도윤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예요."
지한이 아르케 단말을 가리켰다. 결합된 두 개의 백검 현장 키에서 추출된 데이터가 초소 중앙 스크린에 띄워져 있었다.
스크린 상단에는 붉은 경고문이 점멸하고 있었다.
[마더 노드 글로벌 재동기화 활성률: 3.8%]
그리고 그 아래로 카이론이 가로챈 통신 감청 로그가 떴다.
[북서쪽 제17 고철 야적장 / 네오 오더 회수 수송선 1기 기동 확인][추정 목표: 북쪽 자동 초소][도착 예상 시간: 42분 뒤]
윤세라의 긴급 통신이 이어졌다.
"지한, 들려? 야적장 쪽에서 대형 비행체가 떴어! 초소 쪽 전력 서지를 감지하고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지한은 조용히 일어나 전자기 해머를 고쳐 쥐었다.
"초소를 넘겨줄 수는 없죠. 여기가 뚫리면 아이언 헤이븐도 끝입니다."
그는 녹색 불빛을 뿜고 있는 거대한 파수꾼과 초소의 두꺼운 방폭문들을 둘러보았다.
"42분이면 충분합니다. 이 고철들을 전부 요새의 무기로 다시 세워 놓겠습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초소의 방어 시스템들이 정비사의 손끝에서 하나씩 새로운 박동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