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6화: 북쪽 초소의 응답
북쪽 자동 초소 제1 접근문으로 향하는 강제 응답까지 26분 41초.
비상 지휘실의 낡은 저장 장치는 붉은 숫자를 토해 내고 있었다. 지한은 화면 아래에 연결한 아르케 탐침을 뽑지 않은 채 에바의 흉부 접속부를 바라봤다.
"에바를 여기 두고 가면 안 됩니다."
한도윤이 저장 장치의 전원선을 끊었다.
"데려가도 안 돼. 북쪽 초소가 저 녀석의 신호를 받는 순간 요새 전체가 적성 구역으로 분류될 수 있어."
"그래서 초소보다 먼저 신호를 잡아야 합니다."
지한은 절연 케이스에서 백검 현장 키 조각을 꺼냈다. 흰색 세라믹 표면에 발전기의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이걸 초소 제어선에 꽂으면 에바의 응답을 없애는 대신 수신 확인만 다른 중계기로 돌릴 수 있어요. 문을 열 권한은 없지만 현장 유지보수 신호를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틀리면?"
"에바의 식별자가 요새 좌표와 함께 전송됩니다."
"그걸 알고도 데려가겠다고?"
"여기서 끊어도 신호는 초소까지 갑니다. 저장 장치가 다음 수신 경로를 열었으니까요. 에바가 없으면 놈들이 요새 안의 다른 군용 장비를 찾을 겁니다."
에바가 손상된 보조 팔을 들어 올렸다. 팔꿈치 아래 외피가 갈라져 내부 구동선이 드러났다.
"저를 미끼로 사용하는 작전이라면 조건을 정해야 합니다. 제 코어에 외부 지휘 신호가 침투할 경우 마스터가 강제 차단하십시오. 제 동의 없이 정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한은 에바의 붉은 안광을 마주 봤다. 그녀는 보호 명령을 기다리는 병기가 아니라 작전의 위험을 계산하는 주체처럼 말하고 있었다.
"차단 포트 위치를 알려 줘. 내가 직접 끊을게."
"승인합니다."
지한은 현장 키 조각을 작은 절연 하우징에 끼우고 도선을 세 갈래로 연결했다. 하나는 에바의 식별 파형을 읽고 하나는 초소의 유지보수 확인을 흉내 낸다. 마지막 선은 응답이 외부로 빠져나가기 전에 지한의 손으로 돌아오는 수동 감지선이었다.
통신기에서 윤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문 감시조 재배치가 끝났어. 센서망 공백은 18분 9초 뒤 시작되고 40초 동안 이어져. 그 시간에 외곽을 건너야 해."
카이론이 끼어들었다.
"응답 시각까지 26분 12초입니다. 이동과 문 개방을 고려하면 여유는 4분 30초입니다. 인간의 보행 속도를 반영하면 낙관적인 계산입니다."
"고맙다. 덕분에 뛰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네."
피포가 동쪽 벽 앞에서 빠르게 선회했다. 청색 렌즈가 벽 안쪽을 비추더니 바닥 가까이에 레이저 점을 찍었다.
지한이 철판을 두드렸다. 한 곳에서만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정비 통로가 있어. 북문으로 이어져."
한도윤이 수동 레버를 잡았다.
"내가 뒤를 맡는다. 에바가 이상해지면 먼저 멈추게 하겠다."
"그때는 제가 먼저 멈추라고 말할 겁니다."
한도윤은 잠시 에바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벽 안쪽 통로는 냉각관과 통신선이 뒤엉킨 틈이었다. 사람 하나가 몸을 비틀어야 지나갈 만큼 좁았고 바닥에는 금속 가루가 얇게 깔려 있었다.
피포가 앞에서 낮게 날았다. 아르케 화면에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유지보수 크롤러 6기 / 부분 활성
"냉각 펌프와 같은 전원 분기를 사용합니다." 카이론이 말했다. "차단하면 발전기 온도가 상승합니다."
지한은 분전함을 열었다. 릴레이 사이로 검은 실핏줄 같은 나노 회로가 이어져 있었다. 크롤러의 접지선만 분리해야 했다.
"에바. 앞쪽 신호를 얼마나 오래 끌 수 있어?"
"현재 출력으로 6초입니다."
에바가 통로 앞에 섰다. 군용 식별 파형이 번지자 어둠 속에서 금속 다리가 하나씩 펴졌다. 정비 크롤러들이 에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에바는 보조 팔의 접속부를 벽에 대고 짧은 신호를 흘렸다. 크롤러들은 그녀를 향해 달려들지 않고 오른쪽의 폐쇄 검사 포트로 몸을 돌렸다.
"지금입니다."
지한은 전자기 해머의 출력을 최저로 낮추고 접지선 위의 나노 결합부를 내리쳤다.
쾅.
여섯 대의 크롤러가 멈췄다. 냉각 펌프의 구동음은 계속 이어졌다.
가장 뒤에 있던 크롤러 한 대가 갑자기 몸을 틀었다. 다리 끝에서 검은 금속 실이 튀어나와 에바의 발목을 감쌌다.
에바의 임시 의족이 바닥을 긁으며 밀렸다.
한도윤이 방패를 밀어 넣고 크롤러의 관절을 쐈다. 기계는 뒤집혔지만 검은 실은 에바를 놓지 않았다.
에바가 무릎을 꿇고 팔꿈치 관절을 바닥에 박았다. 차단 파형이 실을 타고 역류했다.
치직.
검은 실이 오그라들며 떨어졌다. 에바의 출력이 13%에서 11%로 내려갔다.
"통로를 건널 수 있나?" 지한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전투 지속은 불가능합니다."
"전투하러 온 게 아니야."
지한은 에바의 의족 고정판을 눌러 확인했다. 관절 오차가 생겼지만 움직임은 유지됐다.
두 번째 방폭문 앞에서 피포가 멈췄다. 문 중앙의 유지보수 포트에는 백색 세라믹 홈이 있었지만 현장 키와 모양이 달랐다.
지한은 하우징의 보조 도선을 포트 옆에 걸었다. 아르케에 경고가 떴다.
외부 지휘 신호 감지 / 접근 권한 불일치
"문이 에바를 인식하면 방어 모드가 켜집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문을 여는 신호와 경계 신호를 따로 보내겠습니다."
지한은 수동 감지선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손목 안쪽에서 통증이 번졌지만 릴레이를 한 칸씩 맞췄다.
에바가 포트에 손을 댔다.
철컥.
방폭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통로로 밀려들었다. 먼지 사이로 북문 외곽의 회색 하늘이 보였다.
세라의 통신이 잡음과 함께 이어졌다.
"센서 공백까지 3분 20초. 초소 외곽 포탑이 한 기 살아 있어."
"그럼 포탑보다 먼저 도착하자."
북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카이론의 카운트가 울렸다.
"센서망 공백까지 10초."
한도윤은 방위대원 둘을 북문 안쪽 수동 조준구에 배치했다.
"공백이 끝날 때까지 우리를 쏘지 마라. 표적이 움직여도 확인 전에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카운트가 0이 됐다.
아이언 헤이븐 외곽 감시등이 한 줄씩 꺼졌다. 피포가 먼저 날아가며 바위와 녹슨 배관을 표시했다.
일행은 몸을 낮추고 움직였다. 에바의 의족이 바닥을 칠 때마다 금속음이 났다. 지한은 그 소리를 줄이려고 걸음을 맞췄다.
북쪽 능선 위에서 붉은 렌즈 하나가 켜졌다.
미승인 전술 자산 접근
오래된 포탑의 총열이 돌아갔다. 모래 속에서 방어 드론 두 기도 튀어나왔다.
"피포. 오른쪽 드론 시야를 가려."
피포가 상승하자 방어 드론 하나가 뒤를 쫓았다. 청색 섬광과 붉은 레이저가 먼지 사이에서 엇갈렸다.
지한은 포탑 아래의 탄약 공급함을 살폈다. 포탑을 부수면 초소 전체에 침입 경보가 울린다. 공급 릴레이만 끊으면 한 번의 조준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에바가 그의 앞을 막았다.
"포탑의 표적 규칙이 두 겹입니다. 외부 지휘 신호는 저를 적성 자산으로 지정하고 원래 화이트 소드 규칙은 현장 자산의 접근을 허용합니다."
"둘을 분리할 수 있어?"
"한 번만 가능합니다."
에바가 보조 팔을 들어 올렸다. 차단 파형이 퍼지자 포탑의 총열이 에바에게 고정됐다가 옆으로 틀어졌다.
쾅!
포탄이 뒤쪽 바위에 부딪혔다. 파편이 지한의 어깨를 스쳤다.
"지한!"
"괜찮아. 지금이야."
지한은 포탑 하부 점검 덮개에 해머를 밀어 넣었다. 덮개 안에는 검은 선과 흰색 선이 서로 다른 릴레이에 묶여 있었다.
그는 검은 선만 아르케의 역위상 단자에 연결했다. 손목이 타는 듯 아팠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카이론. 탄약 릴레이를 2초만 지연시켜."
"완전 차단이 안전합니다."
"경보가 울려. 내가 고른다."
아르케가 진동했다. 검은 선의 신호가 거꾸로 흐르며 흰색 선과 분리됐다. 포탑의 붉은 렌즈가 꺼졌다.
에바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흉부 출력이 9%로 내려갔다.
"에바!"
"기능 정지 아닙니다. 출력 절약을 위한 자세입니다."
한도윤이 에바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꺼진 포탑과 에바 사이를 오갔다.
"네가 포탑을 멈췄나?"
"지한이 규칙을 분리했습니다. 저는 신호를 잠깐 되돌렸습니다."
지한이 점검 덮개를 닫았다.
"부수지 않고 원래 기능을 골라낸 겁니다."
한도윤은 북문 쪽을 돌아봤다.
"북문 수동선은 내가 맡는다. 너희는 초소로 가."
센서 공백은 12초 남아 있었다. 피포가 초소 쪽으로 급강하했다.
북쪽 자동 초소 제1 접근문은 능선 아래에 반쯤 묻혀 있었다. 입구 주변 콘크리트는 갈라졌고 흰색 군용 표식은 검은 나노 금속에 덮여 있었다.
지한은 문 옆 정비 포트에 현장 키 하우징을 끼웠다.
센서망이 복구되기까지 4초.
초소 내부에서 낮고 긴 구동음이 울렸다. 에바의 안광이 문 위의 표시등을 따라 움직였다.
WHITE SWORD 현장 자산 확인
그 아래에 붉은 문장이 겹쳐 나타났다.
E.V.A.-004 / 비승인 이탈 자산 / 회수·파괴 절차 준비
"문이 저를 인식했습니다."
"아직 열지 마."
지한은 아르케 화면을 두 갈래로 나눴다. 현장 키의 유지보수 신호는 안쪽 중계기로 돌리고 에바의 식별자는 수동 감지선에 묶었다.
피포가 문 아래 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비어 있는 대기실과 중앙 릴레이가 있었다. 릴레이 옆에 작은 백색 부품이 꽂혀 있었다.
백검 현장 키 / 미등록
지한의 손이 멈췄다.
에바의 흉부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문 안쪽의 키가 그녀의 신호에 응답했다.
삐.
아르케 화면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미등록 현장 키 응답]
[E.V.A.-004 접근 확인]
[강제 응답 수신까지 00:00:09]
한도윤의 목소리가 외부 통신으로 끼어들었다.
"지한. 센서가 돌아왔다. 초소가 우리 위치를 읽기 시작했어."
지한은 에바의 코어 접속선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내가 문을 열게. 네 신호는 안쪽까지만 보내."
"제가 통제력을 잃으면 차단하십시오."
지한은 손목의 통증을 무시하고 아르케의 수동 승인 레버를 눌렀다.
"그때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말할게."
현장 키 하우징이 푸른빛을 냈다. 잠금 장치가 하나씩 풀렸다.
철컥. 철컥.
강제 응답까지 5초.
문 안쪽의 미등록 키가 다시 울렸다.
강제 응답까지 3초.
어둠 속에서 무거운 장갑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대기실 벽면의 붉은 센서들이 차례로 켜졌다.
강제 응답까지 1초.
제1 접근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동시에 초소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자동 병기의 기동음이 터져 나왔다.
삐-.
E.V.A.-004 수신 확인
지한은 열린 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