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5화: 마더 노드의 그림자
발전기 코어가 정상적인 구동음을 되찾았는데도 아르케 화면의 한 줄은 사라지지 않았다.
[MEMORY FRAGMENT DETECTED]
[마더 노드 활성 신호 감지: 3%...]
지한은 쓰러진 에바 곁에 무릎을 꿇었다. 검게 그을린 외피 사이로 희미한 열이 올라왔다. 좌측 임시 의족은 관절축 하나가 빠져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고 흉부 출력계는 13%에서 더 내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의족부터 고정한다."
"외부 신호가 아직 제 코어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에바가 손상된 보조 팔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 손가락 두 개만 늦게 접혔다.
한도윤이 방폭문 쪽에서 총구를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당장 다시 묶어야 한다. 차폐막을 살렸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야."
"묶으면 신호가 사라집니까?"
"적어도 네가 신호를 따라 문을 열지는 않겠지."
지한은 부러진 관절축을 들어 올렸다. 그는 축 표면의 그을음을 닦아 내고 메카 곤충 잔해에서 떼어 낸 얇은 보강판을 덧대 임시 고정했다. 손목의 피드백 화상이 맥박마다 욱신거렸다.
피-포.
피포가 바닥에 떨어진 중추 유닛 잔해 위로 내려앉았다. 청색 렌즈가 세 번 점멸하더니 작은 레이저 점이 발전기 바닥의 균열을 가리켰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아르케 스피커에서 낮게 흘렀다.
"출력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주 순환망과 분리된 보조 버스에서 초당 한 번씩 전력 유출이 발생합니다. 메카 군집이 죽은 뒤에도 남은 중계 회로가 있습니다."
지한은 아르케의 분석창을 백도어 로그 위에 겹쳤다. 네오 오더의 암호 패킷과 에바의 메모리 파형이 한 지점에서 겹쳤다.
"3%는 기동률이 아니야. 응답 확인률이야."
"무엇에 대한 응답입니까?" 세라가 물었다.
에바가 먼저 대답했다.
"저를 통해 요새 안에 살아 있는 군용 식별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신호입니다."
한도윤의 시선이 에바에게 꽂혔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호가 제 코어의 차단 규칙을 읽은 뒤 방향을 바꿨습니다. 저를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통과해 안쪽을 찾고 있습니다."
지한은 균열 틈에 아르케 탐침을 밀어 넣었다. 얇은 전력선 하나가 발전기 바닥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표면에는 오래된 군용 각인이 남아 있었다.
비상 지휘실 보조선 / 수동 유지
"지하에 또 선이 있어. 발전기를 깨운 게 아니라 지휘실로 문을 연 거야."
"비상 지휘실은 폐쇄 구역입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방위대도 접근하지 않는다."
"그래서 안에 누가 먼저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해."
지한이 일어서자 에바가 한쪽 무릎을 세웠다. 의족이 늦게 잠기며 금속음이 났다.
"동행합니다."
"출력 13%야."
"전투가 아니라 응답 경로 분석이 목적입니다. 제 존재가 단서입니다."
한도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에바에게 총구 대신 손전등을 비췄다.
"내가 뒤를 감시한다. 이상 징후가 보이면 멈추게 한다."
"조건을 수락합니다."
지한은 피포를 발전기 바닥의 정비 덮개로 보냈다. 드론이 틈을 스캔하자 녹슨 사다리와 아래로 꺾인 케이블 통로가 나타났다. 차폐막을 살리기 위해 우회한 전류가 그곳으로도 흘러가고 있었다.
정비 덮개 아래의 통로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폭이었다. 뜨거운 배관 사이로 푸른 냉각 증기가 새어 나왔다. 에바는 손상된 다리를 끌면서도 지한보다 반 걸음 앞을 지켰다.
"앞에 잠금문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잠겼습니다."
피포가 먼저 틈으로 들어가 안쪽 영상을 전송했다. 화면 속에는 원형 지휘실과 꺼진 단말기들이 보였다. 중앙 단말 한 대만 붉은 점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한은 현장 키 조각을 절연 케이스에서 꺼냈다.
"문을 태우면 안 돼. 발전기 보조 버스가 같이 끊길 수 있어. 피포, 안쪽 잠금핀을 찾아. 에바는 키를 접점에 대고 있어 줘."
"제 출력으로 접점 안정화가 가능한 시간은 22초입니다."
에바가 흉부의 세라믹 접속부를 문 옆 포트에 밀착했다. 출력계가 13%에서 12%로 내려갔다.
"충분해."
지한은 아르케에서 바이패스 계산창을 열었다. 발전기에서 남는 전류를 4단계로 잘게 나누고 잠금 솔레노이드에 짧게 흘려보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온 저림이 팔꿈치까지 퍼졌다.
피포의 신호가 한 번 울렸다.
철컥.
잠금핀 하나가 올라갔다. 두 번째 핀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한은 해머를 꺼내지 못했다. 진동이 배관을 울리면 지휘실의 자동 방어가 깨어날 수 있었다.
에바가 손상된 보조 팔을 문틈에 끼웠다. 굳은 손가락 대신 팔꿈치 관절을 접어 잠금핀이 걸린 위치를 밀었다. 금속 외피가 더 갈라졌다.
"에바, 그 팔은 이미—"
"이 동작은 전투가 아닙니다. 정비 보조입니다."
두 번째 핀이 올라갔다. 문이 열렸다.
지휘실 안의 단말들이 동시에 켜졌다. 낡은 화면마다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백검 보조망: 현장 중계기 응답 확인]
[군용 식별자 E.V.A.-004: 비승인 이탈 자산]
[복구된 차폐막을 통한 내부 식별자 수집 대기]
세라가 숨을 삼켰다.
"차폐막을 고친 순간부터 우리 안쪽을 훑고 있었다는 거야?"
"정확히는 고쳐진 전력망을 기다린 거야." 지한이 화면을 넘겼다. "네오 오더의 백도어는 발전기를 끄는 명령만 갖고 있지 않았어. 전력이 복구되면 내부 군용 장비가 어떤 응답을 내는지 수집하게 되어 있어."
한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에바가 목표였나?"
"에바의 응답을 이용해 더 큰 망의 좌표를 얻으려는 거야."
그 순간 중앙 단말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강제 응답 절차 준비]
[대상: E.V.A.-004]
[응답 대기: 00:30]
에바의 눈동자가 가늘게 조여졌다.
"마스터. 제 코어를 격리하면 절차가 멈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문 외곽 센서망도 함께 끊깁니다."
한도윤이 즉시 말했다.
"그럼 정지해. 요새 센서가 우선이다."
지한은 에바를 바라봤다. 이전이라면 자신이 계산한 답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에바의 코어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차단 규칙이 남아 있었다.
"네가 결정해."
에바의 붉은 안광이 한 번 흔들렸다.
"저를 정지시키면 적은 다른 군용 신호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휘실의 중계기는 계속 열려 있습니다. 응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카이론이 빠르게 계산했다.
"중계기를 우회하면 북문 센서 공백은 40초입니다. 그동안 외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40초면 충분해?" 세라가 물었다.
"충분하게 만들겠습니다."
지한은 중앙 단말의 전력선을 두 갈래로 나눴다. 하나는 에바의 코어로 다른 하나는 지휘실 안쪽의 낡은 중계기로 이어져 있었다.
응답 대기 시간이 18초로 줄었다.
지한은 아르케 탐침을 에바의 흉부 접속부에 연결했다. 즉시 강한 피드백이 손목을 후려쳤다. 화면에 보이지 않던 차단 파형이 검은 선처럼 떠올랐다.
에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규칙은 외부 지휘망을 거부합니다. 동시에 신호의 방향을 바꾸는 접점도 포함합니다."
"기억나?"
"아닙니다. 몸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에바가 왼손을 지휘실 중앙의 접속판에 얹었다. 손상된 팔은 떨렸지만 차단 파형이 역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더 노드 신호가 에바의 코어를 파고들다가 낡은 중계기 쪽으로 비틀렸다.
[대상 응답 경로 변경]
[E.V.A.-004 → 비상 지휘실 중계기]
[북문 외곽 센서: 00:40 통신 공백 예정]
한도윤이 지한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끊어."
"피포가 레버를 잡아야 해."
피포가 단말 아래의 좁은 틈으로 날아갔다. 레이저 점이 수동 차단 레버 위에 멈췄다. 하지만 레버에는 붉은 나노 금속이 엉겨 있었다.
지한은 해머를 들었다. 이번에는 진동을 줄일 시간이 없었다.
"피포, 레버에서 떨어져!"
피-포!
지한이 해머의 출력을 최저로 낮춰 레버 옆의 나노 결합부를 쳤다.
쾅!
금속 실핏줄이 끊기며 레버가 반쯤 내려갔다. 피포가 집게로 남은 손잡이를 물고 아래로 당겼다.
철컥!
중계기의 전력등이 꺼졌다.
동시에 에바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눈앞에 보이지 않던 검은 파형이 그녀의 흉부 안쪽에서 폭발하듯 번졌다.
"에바!"
지한이 접속선을 잡아 뽑으려 했지만 에바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아닙니다. 신호가 이동 중입니다."
꺼진 중계기 안쪽에서 작은 릴레이가 마지막으로 작동했다. 발전기 바닥 아래가 아니라 지휘실 벽면 깊은 곳에서 다른 전류가 깨어났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끊겼다가 돌아왔다.
"중계기 차단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신호가 오래된 군사 저장 장치로 전이되었습니다. 위치는 지휘실 동쪽 벽입니다."
한도윤이 벽을 걷어찼다. 얇은 금속판이 들리며 안쪽에서 검은 저장 장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한이 아르케를 연결하자 낡은 기록과 현재 명령이 겹쳐 쏟아졌다.
[WHITE SWORD 현장 차단 작전]
[자산 E.V.A.-004: 외부 지휘망 차단 후 회수 금지]
[현재 변조 명령: 강제 응답 및 위치 전송]
[다음 응답 개시까지: 00:27:00]
[수신 예상: 북쪽 자동 초소 제1 접근문]
에바의 안광이 저장 장치의 문장을 따라 움직였다.
"제 과거가 저곳에서 끝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끝난 게 아니야." 지한이 케이블을 거둬들였다. "놈들이 네 응답을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게 만들자."
한도윤은 지휘실 출입문을 바라봤다. 얼굴의 경계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총구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북쪽 초소로 간다고? 센서 공백이 생기면 요새를 비우는 셈이야."
"세라가 외곽 감시를 맡고 방위대는 공백 구간을 사람으로 메워. 우리는 27분 안에 초소 중계기를 끊어야 해."
윤세라가 통신기를 움켜쥐었다.
"할 수 있어. 다만 지한, 에바가 버틸 수 있겠어?"
에바는 손상된 팔을 내려다봤다. 보조 팔 손가락 하나가 늦게 움직였다. 임시 의족의 고정판도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완전한 전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동행은 가능합니다."
에바가 지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스터. 이번에는 보호 명령이 아니라 동행을 요청합니다."
지한은 대답 대신 그녀의 임시 의족 고정 나사를 다시 조였다.
"요청을 수락할게."
그때 저장 장치 깊은 곳에서 희미한 백색 불빛이 켜졌다.
[백검 현장 키: 추가 응답 감지]
[위치: 미등록]
지한의 손목 통증이 다시 치솟았다. 어둠 속에서 두 번째 신호가 한 번 울리고 사라졌다.
북쪽 자동 초소를 향한 카운트다운은 이미 26분 41초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