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3화: 요새의 의뢰
삼중 티타늄 격벽의 잠금등이 하나씩 꺼졌다.
지한은 아르케 화면에 떠오른 박자 표시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세 번. 제1 접근문에서 확보한 우회 코드는 숫자가 아니라 오래된 유지보수 신호의 리듬이었다.
"마스터. 상부 장갑판 절단이 끝났습니다. 네오 오더가 진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에바가 멀쩡한 왼팔로 지한의 앞을 가렸다. 망가진 보조 팔은 흉부 옆에 묶여 있었고 좌측 임시 의족의 관절은 한 박자 늦게 떨렸다.
피포가 격벽 위쪽 환기구로 날아올랐다. 청색 렌즈가 깜빡이자 아르케에 터널 안쪽의 열원이 점으로 표시됐다.
"네 명입니다." 카이론이 말했다. "플라스마 절단기 한 대와 군용 충격봉 두 개. 생포용 전자 그물도 있습니다."
"피포는 냉각관 쪽을 확인해."
피포가 짧게 울고 균열로 사라졌다. 지한은 마지막 입력을 끝냈다.
철컥.
격벽이 안쪽으로 밀려나며 하얀 냉각 가스가 바닥을 기었다. 그 너머에는 둥근 보급창이 펼쳐져 있었다. 벽면의 정비 레일 중앙에는 검은 기둥처럼 생긴 장치가 자석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장치 표면에는 연방 특수작전 문양과 함께 두 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PROJECT WHITE SWORD]
[현장 접속 차단용 중앙 코어]
"저게 백검 코어입니까?"
"외형상 중앙 코어 본체입니다." 카이론이 대답했다. "다만 주 제어부는 비활성 상태입니다. 측면 슬롯에 현장 키가 삽입되지 않았습니다."
"현장 키가 있으면 마더 노드 오염 지휘망의 접속을 끊을 수 있습니다. 화이트 소드 작전의 현장 부대가 사용하던 장비입니다."
그 순간 기둥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V.A.-004 식별 확인.]
[이탈 전술 자산은 지휘망으로 복귀한다.]
[복귀 거부 시 기억 코어를 보호 구역에서 분리한다.]
에바의 몸이 굳었다. 오른쪽 흉부 장갑 안쪽의 푸른 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에바. 네가 선택해."
에바는 검은 기둥을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상된 기억 속에서 서로 다른 명령이 겹쳤다. 돌아가라. 기억을 포기하라. 회수 신호를 믿지 말라.
그녀는 멀쩡한 왼손으로 자신의 흉부 접속부를 눌렀다.
"화이트 소드 규정 44조를 현재 명령으로 우선합니다. 오염 지휘망의 회수 신호를 거부합니다."
흉부의 청색등이 한 번 크게 떨리더니 일정한 빛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마스터의 명령이 아닙니다. 제 판단입니다."
지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둥 측면의 덮개를 열었다. 회색 봉인판 아래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백색 세라믹 조각이 박혀 있었다.
[현장 키 조각: 유지보수 권한 1단계]
[권한 범위: 오염 접속 차단 / 중앙 코어 기동 불가]
[분리 시 보급창 자동 봉인]
"본체를 깨울 수는 없지만 접속을 끊는 데는 쓸 수 있군."
지한이 집게를 넣는 순간 천장이 울렸다.
쾅!
외벽 장갑이 녹아내리며 붉은 불꽃이 쏟아졌다. 피포가 급히 돌아와 머리 위를 맴돌았다.
지한은 세라믹 조각을 절연 케이스에 넣었다. 동시에 보급창의 잠금등이 붉게 바뀌었다.
절단된 장갑판이 안쪽으로 쓰러졌다.
검은 방탄 외피를 입은 네오 오더 회수조가 냉각 가스 사이로 들어왔다. 선두의 남자가 충격봉을 세워 에바의 흉부를 겨눴다.
"이탈 전술 자산 E.V.A.-004. 무장 해제 후 회수에 응하라. 현장 키도 인계한다."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는군." 지한이 해머를 들어 올렸다. "누가 먼저 필요한데?"
회수조 뒤쪽 단말의 신호를 피포가 받아 아르케로 중계했다.
[백검 회수 순서 변경.]
[현장 키 확보 후 차폐막 발전기 접속.]
[요새 내부 방어망을 우선 정지한다.]
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차폐막 발전기라고?"
"아이언 헤이븐의 방어 시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이론이 말했다. "네오 오더가 현장 키를 서두르는 이유도 설명됩니다."
선두 남자가 충격봉을 휘둘렀다. 에바가 미끄러지듯 나가 왼팔로 봉을 받아 냈다. 금속이 부딪히며 푸른 불꽃이 튀었다. 충격을 흘려 낸 에바의 임시 의족이 반 박자 늦게 꺾였다.
지한은 해머를 휘두르는 대신 천장 밸브를 내리쳤다.
칙!
양쪽 냉각관이 열리며 하얀 가스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회수조의 광학 센서가 흐려졌다.
"피포. 정비 레일 전원 위치."
피포가 벽면 오른쪽을 가리켰다. 지한이 달려가는 사이 회수조원 하나가 전자 그물을 발사했다. 에바가 망가진 보조 팔로 그물을 옆으로 튕겼다. 팔 외피가 더 갈라지며 경고등이 번졌다.
"에바, 그 팔은 쓰지 마!"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은 사용해야 합니다."
지한은 정비함 덮개를 열었다. 레일 제어선 세 가닥이 서로 다른 주파수로 떨고 있었다. 그는 아르케 프로브를 꽂아 가장 낮은 신호를 끌어올렸다.
[정비 레일 수동 전환.]
[이동 플랫폼: 보급창 중앙 대기.]
[과부하 허용 시간: 4초.]
손잡이를 당기자 중앙의 검은 기둥이 레일을 따라 옆으로 밀렸다. 회수조가 코어 쪽으로 몰린 순간 지한은 두 번째 선을 접지시켰다.
레일 아래 자석 고리가 일제히 풀렸다. 검은 기둥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냉각관에 매달린 채 내려왔다. 처진 관이 회수조의 발목과 무기를 휘감았다.
선두 남자가 넘어졌다. 에바는 남은 한 명의 팔을 잡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두 번째 충격봉이 그녀의 흉부를 스쳤고 청색등이 크게 흔들렸다.
지한은 떨어진 충격봉 대신 회수조의 허리 아래로 드러난 전력 접속구를 해머 끝으로 찍었다.
쾅!
회수조원의 외피에 흐르던 전류가 꺼졌다.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손에서 무기가 떨어졌다.
에바가 숨을 고르며 돌아섰다.
"발밑의 냉각관이 파열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중앙 코어가 과열되어 보급창 전체가 붕괴합니다."
지한은 절연 케이스를 아르케에 연결했다. 백색 조각에서 가느다란 선이 뻗어 기둥의 접속부를 스쳤다.
[유지보수 권한 확인.]
[오염 지휘 접속 차단 명령을 수신.]
[중앙 코어 보호 모드 전환.]
[보급창 봉인까지 20초.]
검은 기둥 주위로 금속 셔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코어는 남았지만 네오 오더가 바로 손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왼쪽 승강로입니다." 피포가 통로 끝에서 긴 신호를 냈다.
지한은 에바의 멀쩡한 손목을 잡았다.
"뛴다."
두 사람은 냉각 가스 사이를 가로질렀다. 뒤에서 회수조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와 봉인 셔터가 부딪히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승강로는 지하 보급선의 화물용 수직 통로였다. 바닥에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정비용 레일 썰매가 녹슨 채 놓여 있었다.
지한이 제동함을 열자 끊어진 케이블과 굳은 윤활유가 드러났다. 그는 아르케 대신 철사를 꺼내 케이블을 임시로 연결했다. 손목의 저림이 팔 전체를 타고 올라왔지만 장력을 맞추는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피포가 위쪽을 정찰하는 동안 카이론이 긴급 통신을 연결했다. 잡음 뒤에 윤세라의 목소리가 터졌다.
"지한! 듣고 있으면 대답해!"
"세라?"
"아이언 헤이븐 차폐막이 불안정해졌어. 외곽 북문 쪽 출력이 계속 빠지고 있어. 이대로면 한 시간도 못 버텨."
"발전기 자체가 고장 난 거야?"
"정비반이 열어 봤는데 구식 군용 인증에 막혔어. 네 아르케가 아니면 내부 제어부를 읽을 수 없대."
지한은 손안의 절연 케이스를 내려다봤다. 백색 현장 키 조각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오 오더도 차폐막 발전기를 노리고 있어."
통신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럼 더 빨리 와. 이번 의뢰는 부품값으로 못 갚아. 요새 전체를 걸어야 해."
지한은 에바를 먼저 썰매에 앉힌 뒤 자신이 뒤에 올라탔다.
"요새에 들어가면 네 신호를 숨기지 않을 거야."
"한도윤 방위대장이 반대할 것입니다."
"그래도 같이 들어간다. 조건은 내가 만들게."
"동행을 선택합니다."
지한이 레버를 밀었다. 썰매가 덜컹거리며 어두운 승강로를 올랐다.
중간에서 케이블 하나가 끊어졌다. 지한은 해머로 썰매를 붙잡고 남은 철사를 케이블에 감았다. 손목 통증이 번개처럼 튀었지만 피포가 가리킨 안전 구간까지 레버를 당겼다.
썰매가 삐걱거리며 지상 출구로 올라갔다.
황야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멀리 아이언 헤이븐의 차폐막이 일정하지 않은 푸른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이언 헤이븐 북문 앞에서 한도윤의 방위대가 총구를 겨눴다.
"강지한만 들여보내라. 에바는 여기서 대기한다."
에바의 군용 식별 신호가 요새의 경계등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윤세라가 방위대장 앞으로 나섰다.
"지한 혼자서는 발전기 인증을 못 풀어요. 당신도 그건 알잖아요."
"그래서 요새 안에 군용 병기를 들이겠다는 건가? 저 기계가 또 추적망을 깨우면 누가 책임지지?"
지한은 절연 케이스를 들어 보였다.
"내가 책임진다. 에바의 무장을 제한하고 독립 통신을 끊어. 발전기 안에서 이상이 생기면 나도 같이 격리해."
한도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기계를 믿는 건 상관없다. 나는 요새 사람들을 걸 수 없다."
"나도 사람들을 걸 생각 없어. 그래서 원인을 직접 확인하려는 거야. 지금 차폐막은 고장 난 게 아니라 누군가 깨우고 있어."
지한은 발전기 외부 포트에 아르케를 대지 않고 절연 케이스만 가까이 가져갔다. 백색 현장 키 조각에서 미세한 맥박이 뻗었다.
[외부 충격 및 기계 손상: 없음.]
[전력 소모 경로: 내부 제어선 우선.]
[호출 파형: 백검 보조망 계열과 87% 일치.]
[발신 위치: 차폐막 발전기 내부.]
한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방위대 뒤쪽 경계등이 한 번에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에바가 조용히 말했다.
"발전기가 외부를 막는 대신 내부의 무언가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내부에 뭐가 있다는 거지?" 세라가 물었다.
지한은 발전기 격납고의 닫힌 문을 바라봤다. 문틈 아래로 검은 실핏줄 같은 금속 흔적이 번지고 있었다.
"아직 몰라. 직접 고쳐야 알아낼 수 있어."
한도윤은 끝내 에바 쪽으로 구속용 신호 차단 고리를 던졌다.
"이걸 착용해. 발전기 통신망에 접근하면 즉시 전원을 끊는다."
에바는 고리를 흉부 접속부 옆에 걸었다.
"조건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지한.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네가 먼저 에바를 정지시켜라."
"그건 에바와 내가 판단한다. 대신 문제가 생기면 둘 다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한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차폐막 너머 황야에서 금속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십 분 안에 수리반을 교대한다. 그 안에 들어가."
격납고 문이 열리자 뜨거운 전기 냄새가 밀려 나왔다. 어둠 속에서 작은 금속 발톱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피포가 지한의 어깨 위에서 날개를 세웠다.
피-포.
아르케 화면에 새로운 경고가 떠올랐다.
[차폐막 발전기 내부 전력 침식 감지.]
[미확인 기계 군집 다수.]
[백검 보조망 호출 신호 재생 중.]
지한은 전자기 해머를 들고 격납고 안으로 들어섰다. 에바가 그 뒤를 지켰고 한도윤의 방위대가 문밖에서 총구를 고정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작은 붉은 렌즈가 차례로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