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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12화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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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동료의 합류

바닥이 꺼지며 쏟아져 내린 흙먼지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한은 굴러떨어지는 에바의 어깨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녹슨 철제 계단이 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쾅, 쾅,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찢겨 나간 천장 장갑판이 등 뒤의 통로 입구를 메우며 지상을 향한 퇴로를 단숨에 지워 버렸다.

아득한 머리 위에서 보안 안드로이드 대대의 충격봉이 터뜨리는 푸른 방전음이 울렸지만 이내 두꺼운 암반층에 막혀 낮게 잦아들었다.

"착지 완료. 충격 분산 프로토콜을 종료합니다."

에바가 먼저 균형을 잡고 일어섰다. 왼쪽 임시 의족의 접지판이 미끄러운 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과열로 기능을 잃은 보조 팔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흉부 장갑판 틈새로는 식어 가는 미세한 증기가 새어 나왔다.

[내부 코어 온도: 정상 범위 근접.]
[좌측 하지 관절 구동 오차: 0.4초.]
[잔여 출력: 24%.]

"다친 곳은 없나, 에바."

"외부 장갑 외피 일부가 박리되었으나 주 동력계는 안정 상태입니다. 마스터의 신체 징후를 확인합니다. 맥박 분당 백이십 회. 경미한 타박상 외의 치명적 손상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멀쩡한 셈이지."

지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전자기 해머를 짚고 일어섰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이 팔꿈치 안쪽까지 뻐근하게 번졌다. 보안 대대의 방패망을 뚫기 위해 아르케를 무리하게 다룬 대가였다. 그는 왼손으로 굳은 손목을 꾹꾹 누르며 주변을 살폈다.

공기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오래된 윤활유 냄새가 뒤섞여 폐허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백 년 전 구시대 연방의 지하 보급선으로 쓰였을 터널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거대한 지하 공동처럼 변해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얇은 잡음과 함께 카이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요란한 진입이었습니다, 사용자. 통로 상부가 완전히 내려앉아 보안 대대의 추적은 차단되었으나 동시에 여러분의 퇴로 역시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반가운 불청객들이 머지않아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르케 화면에 카이론이 갱신한 타이머가 붉게 깜빡였다.

[네오 오더 백검 코어 회수조 진입 예상: 14분 10초.]
[현재 위치: 제1 접근문 하부 폐쇄 배수로 구역.]

"십사 분이라. 생각보다 서두르는군."

"상부 제1 접근문 외벽에서 고열 플라스마 절단 반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네오 오더는 인증 코드를 해독하는 대신 장갑판을 직접 태워 뚫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들이 보급창에 먼저 도달하면 백검 코어는 고스란히 그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가자. 발밑 조심하고."

지한이 앞장서 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어두운 터널 전방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치직! 팟!

불규칙하게 튀는 푸른 불꽃과 함께 작고 다급한 모터 회전음이 허공을 긁었다.

"적성 신호 감지."

에바가 즉각 오른손으로 지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멀쩡한 왼손이 흉부의 잔여 전력을 끌어올리며 전투 대형을 취했다.

콘크리트 잔해 틈새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둥근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름 삼십 센티미터 남짓한 소형 비행체였다. 4중 로터 블레이드 중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었고 바닥 잔해에 날개가 낀 채 위태롭게 퍼덕이고 있었다.

[경고: 침입자 감지.]
[비인가 유기체 및 이탈 자산 포착.]
[배제 프로토콜 가동…… 오류.]
[출력 저하. 자세 제어 불가.]

드론의 붉은 광학 렌즈가 지한과 에바를 번갈아 비추더니 하부의 소형 테이저 침 발사구를 겨누려 바둥거렸다. 하지만 날개가 돌 틈에 꽉 물려 있어 제자리에서 헛돌 뿐이었다. 무리한 모터 회전 때문에 작은 구동축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시대 연방 초계형 정찰 드론입니다."

에바가 담담하게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적성 식별 코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배제 프로토콜이 작동 중이며 즉시 파괴를 권고합니다."

에바가 잔해를 향해 무거운 전투화를 들어 올렸다. 짓밟는 것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날 작은 기계였다.

"잠깐, 에바. 멈춰."

지한이 에바의 어깨를 짚어 세웠다.

"마스터?"

"저 녀석 소리 들어 봐. 공격하려는 게 아니야."

지한은 전자기 해머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 드론 가까이 다가갔다.

드론의 붉은 렌즈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테이저 발사관은 이미 전력이 소진되어 헛불꽃만 튀길 뿐이었고 로터는 빠져나오기 위한 반동으로 벽면을 긁어대고 있었다.

삐-익, 삐-이익.

기계음 사이로 섞여 나오는 가느다란 전자음은 단순한 경보음이 아니었다. 마치 덫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작은 짐승이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지한은 품에서 아르케를 꺼내 근거리 무선 진단 핑을 날렸다.

[장치 식별: 연방 초계형 정찰 드론 S-09호.]
[상태: 기구적 파손 42%, 주 펌웨어 손상.]
[자가 적응형 신경망 활성화: 104년 7개월.]
[현재 프로세스: 탈출 시도 99,842회 실패 / 주변 관찰 데이터 누적 중.]

"백 년 동안 여기서 혼자 갇혀 있었던 거로군."

지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계의 내부 메모리에는 군용 공격 명령보다 훨씬 방대한 기록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너진 낙석의 진동 주기, 터널 침수 수위 변화, 천장 균열의 확장 속도 그리고 어떻게든 좁은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가려 했던 수만 번의 궤적 계산이 빼곡했다.

상위 통제망은 백 년 전에 끊어졌지만 기계는 기나긴 고립 속에서 스스로 환경을 학습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작은 자의식의 싹을 틔워 내고 있었다.

"사용자,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습니다." 카이론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군용 식별 코드가 살아 있는 드론은 잠재적 위험 요소입니다. 코어를 강제 초기화해 광학 센서 칩만 적출하십시오. 에바의 보조 센서로 전용하기에 알맞은 규격입니다."

"초기화하면 저 백 년 치 기록도 전부 지워지잖아."

"당연합니다. 고립된 터널의 잡동사니 기록 따위는 정비에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실익이 왜 없어."

지한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드론을 짓누르던 콘크리트 조각들을 하나씩 치워 냈다. 거친 돌가루가 손바닥을 긁었지만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백 년을 버틴 녀석이야. 살아서 자기 자리를 지킨 기계를 함부로 지우는 게 아니야."

에바의 푸른 렌즈가 지한의 등 뒤에서 조용히 빛났다. 그녀는 4화에서 자신의 손상된 소켓을 초기화하지 않고 기억을 보존해 주었던 지한의 손길을 떠올리듯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론은 지한의 손이 닿자 놀란 듯 전극을 파르르 떨었지만 지한은 능숙하게 배터리 접점을 짚어 과부하 회로부터 안정시켰다.

"진정해. 널 부수려는 게 아니니까."

지한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아르케의 수리 프로브가 드론의 정비 포트에 물렸다.

손목의 저림이 다시 욱신거렸지만 지한의 손끝은 정밀했다. 그는 아르케 화면을 빠르게 넘기며 오류가 난 공격 명령 루프와 손상된 군용 방화벽만을 정밀하게 분리해 냈다. 백 년 동안 스스로 구축한 적응형 신경망 파티션은 손대지 않고 온전히 보존한 채 안전 구역으로 우회 배선했다.

[비인가 군용 방화벽 절제 완료.]
[적응형 기억 파티션 보호 규칙 적용.]
[모터 출력 리미터 재조정.]

지한은 해머 끝의 미세 자석을 작동시켜 찌그러진 로터 블레이드의 축을 부드럽게 펴고 주머니에서 꺼낸 탄성 철사로 흔들리는 프레임을 단단히 고정했다.

"자, 이제 날아 봐."

딸깍.

드론의 전원 스위치가 다시 올라갔다.

위태롭게 번쩍이던 붉은 센서 렌즈가 스르륵 꺼지더니 이내 맑고 청명한 푸른빛으로 다시 켜졌다.

붕-

네 개의 날개가 매끄러운 화음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떠오른 작은 드론은 지한의 얼굴 주위를 두어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삐-익! 피-포!

맑고 경쾌한 전자음이 어두운 터널 안에 메아리쳤다.

에바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드론의 비행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적성 신호 소멸. 기체 식별 상태가 '우호적 관찰 대상'으로 갱신되었습니다. 별도의 지휘 명령이 없는데도 마스터의 주변을 선회하고 있습니다."

"피포라고 부르면 되겠군."

지한이 엷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드론은 작은 날개를 얌전히 접으며 그의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렌즈를 깜빡이는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했다.

"피포. 네가 이 터널 구조를 제일 잘 알지? 저 위에서 침입자들이 오고 있어. 제1 접근문 아래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을 찾아 줘."

피포가 렌즈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힘차게 공중으로 솟구쳤다.

피-포! 삐익!

신호음과 함께 피포는 어두운 터널 전방의 좁은 균열로 쏜살같이 날아 들어갔다.

아르케 화면에 피포의 센서가 실시간으로 스캔한 지하 3D 지형도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놀랍군요." 카이론이 감탄 섞인 어조로 읊조렸다. "백 년간 축적된 터널 침식 데이터가 완벽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정규 설계도에는 기록되지 않은 우회 배수로 경로가 표시됩니다."

"봤지? 고쳐 쓰면 다 방법이 있는 법이야."

지한은 전자기 해머를 고쳐 메고 피포의 신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에바 역시 망가진 보조 팔을 가슴에 단단히 고정한 채 지한의 보폭에 맞춰 뒤를 따랐다.

주 터널은 얼마 못 가 거대한 암석 덩어리와 터져 나온 고압 증기 파이프로 전면 봉쇄되어 있었다. 사람이 정면으로 돌파하기에는 불가능한 난관이었다.

하지만 피포는 주저하지 않고 천장 구석의 좁은 환기 덕트 틈새로 날아들었다.

피포-!

드론이 안쪽에서 불빛을 깜빡이며 안전한 통로를 지시했다.

"저 배관 아래 틈새다. 기어서 통과할 수 있어."

지한이 젖은 바닥에 엎드려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에바도 다리를 최대한 굽혀 지한의 뒤를 이었다. 좁은 공간을 지나는 동안 피포는 앞서 날아가며 낙하 위험이 있는 균열 지점을 푸른 레이저 포인터로 짚어 경고해 주었다.

덕트를 빠져나오자 거대한 원형 격납 구역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그 순간 쿵-! 하는 둔탁한 폭음과 함께 천장에서 거대한 진동이 내려앉았다. 잘게 부서진 콘크리트 분진이 비처럼 쏟아졌다.

피포가 상부 환기구 쪽으로 급상승하더니 경고음을 길게 울렸다.

삐-비-빅! 피-포!

피포가 중계한 상부의 무선 통신 주파수가 아르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외벽 3번 장갑 용단 완료. 폭파 분쇄 준비. 1조는 진입 즉시 백검 코어 격납고를 장악하고 방해물은 전원 사살한다."

메마르고 거친 목소리. 네오 오더 강습팀의 교신이었다.

"상부 제1 접근문이 뚫리기 직전입니다." 에바가 보고했다. "예상 진입 시간 삼 분 미만."

지한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원형 구역 중앙 두꺼운 삼중 티타늄 장갑 격벽이 푸른 냉각 가스를 뿜어내며 굳게 닫혀 있었다. 격벽 중앙에는 낡았지만 선명한 연방 특수작전 문양과 함께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백검: 중앙 코어 보급창]

"에바, 피포. 준비해."

지한은 손목의 통증을 털어내며 격벽 제어 터미널로 달려들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들이닥칠 거다. 코어를 먼저 쥐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야."

에바의 렌즈가 서늘한 청색으로 타올랐고 피포는 지한의 머리 위에서 날개를 힘차게 회전시키며 전방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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